초이스
[초이스]그레고르 잠자의 변신
캐롤라인 리프, 1978
1.
카프카의 「변신」은 시각 예술로 변환하기가 다소 까다로운 작품이다. 벌레라는 존재의 구체성이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순간 서사는 평면적이고 납작해지기 때문이다. 다양한 층위를 함의하는 대신 그저 ‘어느 날, 한 불우한 남자가 벌레로 변신해버렸다’는 식의 기이한 이야깃거리에 그치게 된다.
1977년 작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The Metamorphosis of Mr Samsa>에서 캐롤라인 리프는 그 난점을 비껴간다. 「변신」의 특정 국면을 소실점 삼아 원작의 요소들을 압축적으로 재배열했고 그로 인해 사실상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어버렸다.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정제해 「변신」을 감정적인 상황 부조리극으로 변주한다. 주어진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고, 그 이후의 여백에 캐롤라인 리프가 채우는 것들이 더 중요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작품은 카프카 적이다.
흑백의 절제된 화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미지들,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는 형태감, 바람 한 번 불면 흩날려 사라질 모래라는 재료의 물성은 원작 「변신」의 근간 정서를 자극한다. 눈앞의 현실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 말이다. 샌드 애니메이션이라는 기법은 카프카 특유의 불온한 분위기와 일말의 유머를 살려낼 뿐만 아니라, 자유자재의 빠른 화면 전환을 용이하게 구사하도록 만들어준다. 도입부에서 그레고르가 침대에서 뒤뚱거리다가 떨어지자 시점샷이 되었다가 어느새 다시 그레고르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이동한 장면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계속해서 나오는 이런 장면들은 시점과 소실점이 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이탈하거나 부유해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2.
인간을 벌레로 비하하는 멸칭은 인류가 벌레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 순간 이래로 계속 이어져 왔을 것이다. 그래도 2010년대 중반의 한국만큼 유달리 벌레의 비유가 일상화된 현상은 전례가 없는 듯하다. 국내 각계각층에 달라붙은 ‘○○충’이란 단어가 어찌나 자주 쓰이는지 이제는 ‘~충’ 접미사가 낯설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로가 서로를 벌레로 보는 사회라면 어떤 사회여야 할까.
새삼 벌레에 대해 생각해본다. 벌레는 주어진 자극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생존 본능에만 충실한 생물이다. 자극과 신경 반사만으로 구성된 삶이다. 그것은 앞날을 예측하고 과거를 반성해 현재를 조정하는 추상적 사고가 불가능함을 뜻한다. 인간으로 치자면, 고도의 추상적 사고는 고사하고 주어지는 현재만으로도 팍팍한 삶이다.
인간이 의식주를 확보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성 유지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고 크게 유행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현재 한국에서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얻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헬조선’과 ''○○충''이 비슷한 시기 유행한 것은 우연의 일치지만, 두 단어를 통해 어떤 희미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악조건 속에서 아등바등하며 고통받는 벌레 같은 삶들의 지옥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에게 요구하는 미덕은 복합적인 인간성보다는 대체 가능한 단순 기능성이다. 원작 소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바로 그 요구에 적응하는 충실한 일꾼이다. 그의 직업은 스스로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외판원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대규모로 탄생할 수 있는 직업이다. 무엇보다 그 일은 그레고르 잠자라는 개인의 인간성과 무관하다. 「변신」은 스스로 소모품이 된 일개미 같은 인간들이 실제 벌레와 다를 것이 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지금 여기의 우리’ 쪽으로 약간 바꿔보면 어떨까. ‘헬조선’에 사는 우리가 벌레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3.
다시 캐롤라인 리프의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 속 그레고르는 기본적으로 딱정벌레의 모습이지만, 관객 입장에서 동그란 눈과 부들거리는 다리로 기호화된다. 상대적으로 귀여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외양이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그레고르는 실제 벌레의 모습에 가깝게 묘사된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완전히 벌레가 되었음을 깨달은 그는 침대 밑에서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레고르의 얼굴은 소름 끼치도록 이입할 수 없는 벌레의 그것이다. 그때 한순간이지만 그레고르의 귀가 보인다. 인간의 귀다.
상대적으로 단단한 물성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귀만 유독 유동적인 형태 변화를 보이며 화면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의혹을 준다. 그레고르는 미동도 없이 음악에 열중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인간적 신체 기관이 퇴화하고 음악 역시 소음에 불과해진 걸까. 샌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유동성은 모든 장면을 확정되지 않는 판단 유보적 상태로 머무르게 한다. 관객은 확신할 수 없다. 더욱이 원작의 비참한 결말을 아는 사람이라면.
원작에서 그레고르는 동생의 연주를 열렬히 감상하며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인간성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 일벌레였던 그레고르가 진짜 벌레가 되자 오히려 이전에 딱히 챙겨 듣지도 않았을 연주를 갈구하는 역전이다. 예술의 향유를 인간성의 상징으로 그려내는 이 대목에서 감독이 작품에 대한 실마리를 얻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캐롤라인 리프는 인간성에 대한 원작의 고찰을 약간 비틀어서 질문한다. 벌레가 되어도, 혹은 벌레가 된 지금, 연주를 들을 만한 감각 기관이 남아 있을까? 추상적으로 감각할 수 있을까? 그게 뭐든 간에 어떤 예술을 향유할 여력이 있는가? 어쩌면 그것이 인간으로서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성일 수도 있다.
카프카의 「변신」은 시각 예술로 변환하기가 다소 까다로운 작품이다. 벌레라는 존재의 구체성이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순간 서사는 평면적이고 납작해지기 때문이다. 다양한 층위를 함의하는 대신 그저 ‘어느 날, 한 불우한 남자가 벌레로 변신해버렸다’는 식의 기이한 이야깃거리에 그치게 된다.
1977년 작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The Metamorphosis of Mr Samsa>에서 캐롤라인 리프는 그 난점을 비껴간다. 「변신」의 특정 국면을 소실점 삼아 원작의 요소들을 압축적으로 재배열했고 그로 인해 사실상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어버렸다.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정제해 「변신」을 감정적인 상황 부조리극으로 변주한다. 주어진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고, 그 이후의 여백에 캐롤라인 리프가 채우는 것들이 더 중요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작품은 카프카 적이다.
흑백의 절제된 화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미지들,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는 형태감, 바람 한 번 불면 흩날려 사라질 모래라는 재료의 물성은 원작 「변신」의 근간 정서를 자극한다. 눈앞의 현실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 말이다. 샌드 애니메이션이라는 기법은 카프카 특유의 불온한 분위기와 일말의 유머를 살려낼 뿐만 아니라, 자유자재의 빠른 화면 전환을 용이하게 구사하도록 만들어준다. 도입부에서 그레고르가 침대에서 뒤뚱거리다가 떨어지자 시점샷이 되었다가 어느새 다시 그레고르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이동한 장면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계속해서 나오는 이런 장면들은 시점과 소실점이 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이탈하거나 부유해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2.
인간을 벌레로 비하하는 멸칭은 인류가 벌레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 순간 이래로 계속 이어져 왔을 것이다. 그래도 2010년대 중반의 한국만큼 유달리 벌레의 비유가 일상화된 현상은 전례가 없는 듯하다. 국내 각계각층에 달라붙은 ‘○○충’이란 단어가 어찌나 자주 쓰이는지 이제는 ‘~충’ 접미사가 낯설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로가 서로를 벌레로 보는 사회라면 어떤 사회여야 할까.
새삼 벌레에 대해 생각해본다. 벌레는 주어진 자극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생존 본능에만 충실한 생물이다. 자극과 신경 반사만으로 구성된 삶이다. 그것은 앞날을 예측하고 과거를 반성해 현재를 조정하는 추상적 사고가 불가능함을 뜻한다. 인간으로 치자면, 고도의 추상적 사고는 고사하고 주어지는 현재만으로도 팍팍한 삶이다.
인간이 의식주를 확보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성 유지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고 크게 유행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현재 한국에서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얻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헬조선’과 ''○○충''이 비슷한 시기 유행한 것은 우연의 일치지만, 두 단어를 통해 어떤 희미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악조건 속에서 아등바등하며 고통받는 벌레 같은 삶들의 지옥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에게 요구하는 미덕은 복합적인 인간성보다는 대체 가능한 단순 기능성이다. 원작 소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바로 그 요구에 적응하는 충실한 일꾼이다. 그의 직업은 스스로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외판원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대규모로 탄생할 수 있는 직업이다. 무엇보다 그 일은 그레고르 잠자라는 개인의 인간성과 무관하다. 「변신」은 스스로 소모품이 된 일개미 같은 인간들이 실제 벌레와 다를 것이 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지금 여기의 우리’ 쪽으로 약간 바꿔보면 어떨까. ‘헬조선’에 사는 우리가 벌레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3.
다시 캐롤라인 리프의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 속 그레고르는 기본적으로 딱정벌레의 모습이지만, 관객 입장에서 동그란 눈과 부들거리는 다리로 기호화된다. 상대적으로 귀여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외양이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그레고르는 실제 벌레의 모습에 가깝게 묘사된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완전히 벌레가 되었음을 깨달은 그는 침대 밑에서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레고르의 얼굴은 소름 끼치도록 이입할 수 없는 벌레의 그것이다. 그때 한순간이지만 그레고르의 귀가 보인다. 인간의 귀다.
상대적으로 단단한 물성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귀만 유독 유동적인 형태 변화를 보이며 화면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의혹을 준다. 그레고르는 미동도 없이 음악에 열중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인간적 신체 기관이 퇴화하고 음악 역시 소음에 불과해진 걸까. 샌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유동성은 모든 장면을 확정되지 않는 판단 유보적 상태로 머무르게 한다. 관객은 확신할 수 없다. 더욱이 원작의 비참한 결말을 아는 사람이라면.
원작에서 그레고르는 동생의 연주를 열렬히 감상하며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인간성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 일벌레였던 그레고르가 진짜 벌레가 되자 오히려 이전에 딱히 챙겨 듣지도 않았을 연주를 갈구하는 역전이다. 예술의 향유를 인간성의 상징으로 그려내는 이 대목에서 감독이 작품에 대한 실마리를 얻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캐롤라인 리프는 인간성에 대한 원작의 고찰을 약간 비틀어서 질문한다. 벌레가 되어도, 혹은 벌레가 된 지금, 연주를 들을 만한 감각 기관이 남아 있을까? 추상적으로 감각할 수 있을까? 그게 뭐든 간에 어떤 예술을 향유할 여력이 있는가? 어쩌면 그것이 인간으로서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성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