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벨빌의 세쌍둥이
실방 쇼메, 2003
실벵 쇼메 감독의 2003년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작 <벨빌의 세쌍둥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매 장면이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실벵 쇼메를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 반열에 올려놓은 이 작품이 올가을 13년 만에 국내 정식 개봉했다. 혁신적이라 평가받았던 연출은 지금 봐도 탁월하다. 무엇보다도 애니메이션 <일루셔니스트>와 실사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으로 작품 세계가 확고해진 실벵 쇼메의 13년 전이 거기 있다. 2D 애니메이션의 미학을 추구한 젊은 애니메이터의 초심, 씨네필로서의 취향이 한껏 녹아 있다.
이야기는 파리 외곽에 사는 노부인 마담 수자와 외로운 어린 손자 챔피언이 ‘벨빌의 세쌍둥이’가 나오는 TV 쇼프로그램을 보면서 시작된다. TV를 봐도, 강아지를 안겨줘도, 통 웃지 않는 소년 챔피언. 실은 자전거에 관심이 있다. 마담 수자가 자전거를 선물하자 신나게 자전거를 타던 챔피언은 세월이 흘러 사이클 선수로 성장한다. 하지만 사이클 대회 ‘투르 드 프랑스’에 참여했다가 대회 도중 마피아들에게 납치당한다. 곧 반려견 브루노와 함께 손자를 찾아 나선 마담 수자. 손자를 납치한 마피아들의 배를 쫓아 낯선 도시 ‘벨빌’에 도착하고, ‘왕년의 스타’ 세쌍둥이를 우연히 만난 후 함께 챔피언 구출 작전에 돌입한다.
<벨빌의 세쌍둥이>는 그림이 주는 힘이 압도적이다.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니콜라 드 크레시의 영향을 받은 그래픽 스타일의 배경부터 캐리커처 느낌으로 그려진 캐릭터들까지 개성이 뚜렷하다. 게다가 모든 캐릭터들은 대사가 거의 없다. 그 대신 캐릭터마다 각자 독특한 동작으로 성격을 드러내고 감정을 전달한다. 마치 컬러풀한 무성영화를 보는 기분인데, 실제로 자크 타티, 버스터 키튼, 찰리 채플린을 사랑하는 ‘씨네필’ 실벵 쇼메가 의도한 바다. 그로 인해 이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사람의 일상과 움직임, 사물의 쓰임새를 예민하게 관찰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애니메이터들이 캐릭터의 액션을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 집중할 수 있도록(!) 자동차, 자전거, 마피아들이 타는 배 등등 ‘탈 것’은 3D로 작업했다.
<벨빌의 세쌍둥이>는 그렇게 캐릭터의 움직임과 이미지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사운드를 절묘하게 조화시킨다. 대표적인 장면이 마담 수자와 세쌍둥이가 ‘벨빌’의 다리 밑에서 처음 만나 연주를 하는 장면, 그리고 세쌍둥이의 레스토랑 공연 장면이다. 마담 수자가 세쌍둥이와 우연히 만나서 함께 ‘벨빌 랑데부’를 연주하는 첫 장면은 그야말로 기발하고 유쾌하다. 이 장면과 중반 이후 나오는 세쌍둥이의 레스토랑 공연 장면은 실벵 쇼메 감독이 ‘스톰프’ 공연에서 영감을 얻었다. 레스토랑 공연에서는 세쌍둥이가 신문을 접었다 펴고, 냉장고 안 받침대를 튕기고, 진공청소기로 소리를 내서 음악을 만든다. 여기에 마담 수자가 자전거 휠을 실로폰처럼 두드려 환상적인 합주를 완성한다. 그런데 이 떠들썩한 순간, 마담 수자는 매서운 눈초리로 마피아 보스가 읽고 있던 신문 기사를 통해 그들의 음모를 알아낸다. 몇 개의 컷으로 짧게 표현되지만 애니메이션다운 편집 효과를 확실히 보여준다.
일상적인 장면들도 지나칠 수 없다. 마담 수자가 훌쩍 커버린 챔피언과 극한 훈련을 하고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 장면은 대사 없이 오직 사운드만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창문 밖으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 반려견 브루노가 짖는 소리, 축음기의 음악 소리 등으로 집안의 공기와 일상의 리듬을 전달한다. 마담 수자가 진공청소기로 챔피언의 다리를, 잔디 깎기로 챔피언의 등을 자연스레 마사지해주는 광경은 또 어떤가. 자크 타티와 버스터 키튼, 찰리 채플린이 봤다면 흐뭇하게 웃어줬을 것 같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세쌍둥이 자매가 자기 전 침대에 앉아서 TV로 실사영화(자크 타티 영화 <축제>의 한 장면)를 보며 깔깔대는 광경도 기막히다. 영화 후반 마피아들과의 엄청난 추격전까지, 말없이 많은 것을 말하는 이 기묘한 유머 감각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공간 디자인도 눈여겨 볼만하다. 가장 눈에 띄는 공간은 역시 ‘벨빌’이다. 1960년대 캐나다의 몬트리올과 퀘백, 미국 뉴욕의 건축 양식을 혼합해 디자인했다. 2m 길이의 종이에 애니메이터들이 직접 초고층 빌딩들을 그린 후 스캔을 해서 작업한 도시 전경이 압권이다. 뚱뚱한 자유의 여신상이 빅 버거를 들고 있고, 거리엔 온통 비만 체형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벨빌’은 마담 수자가 살아온 파리의 동네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실벵 쇼메는 자신이 경험했던 미국과 프랑스의 문화적 차이를 ‘벨빌’을 통해 다양하게 풍자한다. 그곳에서 유독 호리호리하게 나이든 세쌍둥이는 자신들처럼 대도시의 외곽에서 수수하게 살아온 마담 수자와 의기투합하는데, 이들을 둘러싼 묘한 대구와 공통점, 아이러니한 설정은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한다.
실벵 쇼메는 자신이 사랑해온 문화적 유산, 어린 시절 파리 외곽에서 살았던 추억, 애니메이터가 된 후 영국과 캐나다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한편의 애니메이션에 담았다. 유쾌하고 멜랑꼴리한 스릴러 <벨빌의 세쌍둥이>는 오랫동안 아끼고 추구해온 많은 것들이 일상에 뿌리를 둔 상상력을 통해 하나가 된 작품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이야말로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이 세상을 들여다보는 좋은 창이 되는지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