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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이미지

안제이 바이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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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의 리스트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쉽지 않다. ‘여성’ ‘역사’ ‘일상에서 비켜난 삶’ 등 몇몇 개념이 떠오르지만 전체 리스트를 다 아우르지는 못한다. 다시 한번, 나 자신은 과연 이 영화들의 무엇에 끌렸나 질문한 끝에 이 리스트의 최대 공약수를 “존엄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군분투” 정도로 정리해 본다. 이 리스트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삶의 궁지에 몰린 평범한 사람들이다. 침범당한 삶, 위기에 빠진 삶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 속에서 이들의 존재 가치가 드러난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저마다 다르고 그들은 오직 자신의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골몰할 뿐이지만 그러한 고군분투 속에서 빛나는 삶에 대한 애착과 위로의 힘은 매우 크다. 타인의 인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인간으로서 자신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이들의 몸부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발신한다. 

마닐라 빈민가의 뒷골목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가게를 운영하면서 마약을 거래하는 로사를 윤리적인 인간이라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마’ 로사>(브릴얀테 멘도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억척스럽게 뛰어다니는 그녀의 모호한 얼굴에서, 부패한 공권력이 지배하는 거친 뒷골목에서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강렬한 생의 에너지에서 우리는 순간이나마 숭고미마저 느끼게 된다. 라브 디아즈의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에는 헤수스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필리핀의 어두운 과거와 비타협적으로 치열하게 싸워온 거장의 신작에서 여성혁명가 헤수스는 총살당한 혁명 영웅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시신을 찾아 산속을 헤맨다. 그녀를 통해 다시 한번 역사의 격변기를 호명하면서 영화는 과거에 벌어진 사건의 의미를 필리핀의 현재로 확장시킨다. 필리핀 민중에게 호소하는 감독의 목소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고 직설적인 울림이 있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두 번째 장편 <아쿠아리우스>는 아름다운 노년 여성의 눈을 통해 개발과 보존, 기억과 망각이라는 사회정치적 이슈를 서정적이고 파워풀하게 그려낸다. 기억의 의미, 추억과 공간의 관계, 아카이브로서의 공간이라는 테마를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로 멋지게 풀어낸 이 영화의 중심에도 섬세하고 강인한 여성이 자리 잡고 있다. <화염의 바다>는 근래 유럽 다큐멘터리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난민 문제를 다룬 영화다.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관문인 람페두사를 배경으로 참혹한 난민 구조 현장과 섬 소년의 일상을 느슨하게 교차시킨 이 영화는, 아름다운 섬의 나른하고 잔잔한 일상이야말로 목숨 걸고 고향을 떠나온 난민들이 소망했던 삶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어쩌면 “바다에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섬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난민 문제에 대한 모든 해법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붉은 거북>은 무인도에 난파되어 평생 외로움과 싸우다 늙어버린 남자에 관한 애니메이션이다.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이미지의 힘만으로 고립된 남자의 외로움, 절대고독을 재현한 이 영화는 마음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 뒤늦게 덮친 쓰나미처럼 내 마음을 어지럽게 휘저어 놓는다. 재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때로 침묵이 무엇보다 강렬한 언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영화다. 짐 자무쉬의 <패터슨>은 단조로운 삶이 반복되는 버스 기사 패터슨의 일주일을 그린다. 매일 반복되는 그의 일상은 집-버스-집-동네 주점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동선의 반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에도 변화는 있고 그러한 변화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다. 가장 큰 활력소인 시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실의에 빠진 어느 날, 그는 거리에서 만난 일본인에게 자신을 “시 쓰는 버스 기사”라고 소개한다. 시인이 아닌 시 쓰는 버스 기사. 평범한 삶의 특별함을 절제된 연출과 여백으로 보여주는 짐 자무쉬의 단단한 연출은 오즈 야스지로를 떠오르게 한다. 

올해의 가장 뛰어난 영화라 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하게 될 작품은 안제이 바이다의 <애프터이미지>이다. 이 영화는 토론토에서 처음 보고 부산에서 다시 한번 보았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감독의 부고를 들었다. 또 한 시대가 저물었구나. 가슴 속에서 쿵 소리가 울린다. 2차대전의 상처와 폴란드의 역사적 경험을 어루만지면서 폴란드의 역동적 변화와 공명해온 감독의 이력답게 <애프터이미지> 역시 스탈린 체제하의 폴란드라는 역사의 어두운 시기로 걸어 들어간다.

폴란드 아방가르드 예술의 대표 작가인 스트르제민스키의 삶을 통해 스탈린 체제 하에서 예술에 가해진 억압에 대해 고발하는 이 영화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스탈린의 예술 테제가 어떻게 예술의 숨통을 끊어놓고 예술을 프로파간다로 전락시켰는지 보여준다.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사물의 이미지가 망막에 남아있는 잔상 효과를 뜻하는 ‘애프터이미지 afterimage’는 스트르제민스키에게서 시각적 의식이 작용하는 특정한 메카니즘이자 역사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오프닝 신은 영화의 방향을 예시하는 복선으로 기능한다. 스트르제민스키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이 새빨갛게 물든다. 거대한 붉은 천에 그려진 스탈린 초상화가 건물에 걸리면서 그의 작업실 전체를 가려버린 것이다. 붉게 물든 작업실은 스탈린의 소비에트 이데올로기가 폴란드 예술가의 삶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예술은 이념이 아닌 형태(form)라고 굳게 믿는 그에게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강요는 예술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의 강요 앞에 자신의 예술관을 꺾지 않던 그는 직장을 잃고 예술가조합에서 추방되며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동료 예술가인 아내 코브로와 헤어져 평생 만나지 않았던 이유도 예술관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예술은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가치였던 것이다. 배고픔에 굶주려 빈 접시를 하염없이 핥아대면서도 체제 이데올로기의 겁박에 순응하지 않았던 이 고집 센 예술가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의 죽음 소식을 들은 그는 아내의 무덤 앞에 파란 물을 들인 꽃을 바친다. 아내가 아름다운 푸른 눈을 가졌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붉게 물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횡행하던 체제에 저항하듯이 푸른 꽃을 예술가 아내의 무덤에 바치던 예술가 역시 쓸쓸하게 죽어간다. 

흥미로운 것은 예술 형식을 중시한 폴란드의 대표 전위예술가이자 자신의 우상이었던 스트르제민스키에 관한 영화를 만들면서 안제이 바이다 감독이 고전적 리얼리즘 양식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예술의 비개성화를 주장하면서 대중의 미적 기준을 향상시키려 했던 스트르제민스키의 예술 작업을 고려할 때 감독이 채택한 고전적 리얼리즘 양식은 조금은 의외다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 영화가 스트르제민스키의 예술보다는 시대와 불화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는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안제이 바이다 역시 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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