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웃음소리
김수용, 1978
<갯마을>(1965)과 <안개>(1967), 그리고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와 <사격장의 아이들>(1967), 김수용 감독은 문예영화와 아동영화에 장기를 가진 1960년대가 전성기인 감독으로 기억된다. 그는 <공처가>(1958)를 시작으로 코미디, 멜로드라마, 문예영화, 청춘영화, 아동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109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1967년에만 10편의 작품을 연출했는데, 여러 편을 한 해에 만들었다고 하여 전체적으로 작품성이 하향 평준화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완전히 기우일 뿐이다. 그는 그 해에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산불> <어느 여배우의 고백> 등 자신의 영화 세계의 대표작들이 내놓았다.
그러나 1970년까지도 왕성했던 연출 활동은 점차 뜸해지게 된다. 바야흐로 새로운 영화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장호, 하길종, 김호선 3인방은 자유로움과 신선함을 무기로 1970년대 영화계에 청년문화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1978년이면 균형추는 이미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뉴시네마의 기치를 내건 ‘영상시대’는 <겨울여자>(김호선, 1977)를 통해 최고흥행을 기록하며 관객들로부터 확증을 받았다.
<웃음소리>는 ‘영상언어의 진화’라는 이전과 달라진 시대에, 이미 전성기를 지나친 감독이 다시 한 번 존재감을 발하는 영화다. 김수용에게 있어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문예영화의 대표 감독이라는 칭호 속에서도 늘 따라오던 말이 “문학 번역보다는 고유한 영화언어”를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안개> <화려한 외출>(1977)<야행>(1977) 등은 뉴시네마의 흐름을 반영하는 모던한 영화형식을 도입하는데, 마음속에 잠재한 또 다른 자아를 찾아 나서는 환상여행이라는 점에서 일관되어 있다.
<웃음소리>는 단지 이미지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실험적인 시도를 행하는 작품이다. 현실의 연상 작용을 통한 교차편집으로 플래시백으로 진입하는 방식, 현실과 과거가 난데없이 포개지는 의식의 흐름 기법, 대사를 절제하고 인물 클로즈업의 주된 사용을 통해 심리를 전달하기, 일상적 사물 포착을 통한 상징적 의미 작용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에 비해 한발 앞서 나간다. 이러한 영화적 표현 방식은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나 프랑스의 루이 말을 연상시킬 정도다. 이는 김수용 감독이 유럽풍의 뉴웨이브 언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영화 언어적 세계를 끝까지 한층 격상시키고자 노력했다는 징표가 된다.
<웃음소리>는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진부하다. 한 여성(남정임)이 수면제를 사서 모은다. 그녀는 혼자 기차여행을 떠나고 산속의 호텔에서 며칠을 보낸다. 그녀의 회상으로 몇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그녀는 남자들에게 인기 좋은 호스티스인데, 하숙집에서 대학생(이영하)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의 학업을 적극적으로 뒷바라지한 후 그 남자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여자는 인맥을 발휘하여 그의 해외발령을 도와준다. 그러나 남자는 사랑의 맹세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좌절한 그녀는 자살 여행을 떠나지만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산에서 또 다른 한 남자(김만)를 만나 하룻밤을 보낸다. 산속에서 끌어안은 채 죽은 젊은 커플을 목격한 후, 여자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 호스티스 생활로 복귀한다. 또 다른 남자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맹세하지만 그녀는 그저 웃음소리로 응답할 뿐이다.
이야기는 ‘너무도 70년대스러운’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호스티스일망정 순정을 간직한 여자가 사랑을 위해 희생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신이고 그녀의 삶은 비극으로 치닫는다는 것. 하지만 뻔한 틀에도 불구하고 <웃음소리>는 이야기를 담는 형식 실험이 매우 독창적이어서 뻔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학처럼 고고한 여주인공 학자의 대사가 엔딩부를 제외하고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성적으로 대상화되어버린 윤락가 여성의 목소리를 거세함으로써 영화는 소통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거세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남성들의 서사에 균열을 내는 묘한 저항적인 위치에 선다. 그녀는 끊임없이 손톱을 다듬는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일관되게 하는 행위가 바로 손톱 다듬기이다. 진지한 순간에 그녀가 손톱 다듬기를 내놓으면 분위기가 갑자기 웃기게 되어 버린다. 이러한 돌발적인 아이러니한 습관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지루한 일상에 대한 조롱의 반항적 언어로 보인다. 호텔 지배인의 귀를 만지는 습관, 미용사의 껌을 소리 내어 씹는 습관 역시 반복되는 권태로운 일상이 주는 짜증스러움을 나타낸다.
주인공 학자 역할은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일원인 남정임이 맡았다. 그녀는 도시적 세련된 감각을 가진 미모로 부각되었지만, 문희나 윤정희에 비해 비중 있는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0년대는 영상시대 감독들의 등장과 함께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으로 구성된 제2기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웃음소리>는 새로운 시대에도 살아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60년대 대표 감독과 1기 트로이카 배우의 합작품이다. 그들이 협업하여 완성한 실험적 시도에는 젊음의 활력이 아닌 권태로움이 묻어나는데, 이 권태로움에는 기묘한 매혹이 잠재되어 있다.
남정임은 결혼과 이혼 후 컴백했지만 재혼과 동시에 연애과정이 지면에 오르내리며 스캔틀 메이커라는 이유로 대중의 비난에 직면하였다. 결국 그녀는 <웃음소리>를 끝으로 은퇴한다. 그러나 그녀의 은퇴작은 바로 대표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