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X102
나는 왕이다 I Am a King
임권택, 1966
권투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 나는 <나는 왕이다>를 본 다음 잠시 멈추어 섰다.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1986년 서울에서 제10회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고, 그때 25개의 종목을 10개의 소주제로 해서 9명의 감독이 다큐멘터리로 찍었다. <나는 왕이다>를 찍은 다음 20년 후의 일이다. 그때 임권택과 이두용은 그 중 여섯 번째 편인 ‘힘과 기’를 공동 연출하였다. 여기서 복싱과 레슬링, 역도, 펜싱, 태권도를 중심으로 한 격투기를 다루었다. 이때 임권택은 권투만을 찍었다. (나는 이 영화를 편집 직후에 볼 기회가 있었는데 완성 이후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임권택은 수많은 스포츠 중에서 오로지 권투만을 영화로 다루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구경하기를 선호하는’ 스포츠는 축구라고 대답했다) 나는 두리번거리면서 질문했다. 권투는 영화적인가요. 그때 임권택 감독님은 내게 대답을 하는 대신 스포츠 선수들을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세상과 접촉하는 대신 자기 훈련만을 계속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하고 말하는 사람들이지요, 라는 말로 대신했다. 자기하고 말하는 사람. 혹은 자기의 규칙과 말하는 사람. 세르주 다네는 테니스가 가장 영화적인 스포츠라고 말했다. 쇼트와 리버스 쇼트로 이루어진 운동. 에릭 로메르는 축구를 찍는다는 문제는 영화의 윤리와 마주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불가능한 거리의 중계. 스포츠는 각자의 규칙의 방법으로 영화의 질서 안에 들어선다. 그때 영화는 스포츠의 규칙을 존중해야만 할 것이다. 거기서 영화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그때 임권택은 권투에서 무엇을 다루려는 것일까.

나는 조금 비스듬히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싶다. 권투라는 스포츠의 사회적 자리. <나는 왕이다>. 세상의 왕이 된다는 것. 권투의 챔피언이 되었을 때 세상으로부터 왕이라는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시간. 권투 선수 김기수는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이탈리아에서 온 리노 벤베누티를 판정승으로 물리치고 세계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이 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1968년 5월 이탈리아에서 산드로 마징가와의 3차 방어전에서 패하고 그 자리를 잃었다. 그가 세계 챔피언의 자리를 지킨 것은 매우 짧은 기간이었지만 김기수는 한국 복싱 사상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었고, 1966년 한국은 세계, 라는 타이틀이 필요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분단으로 두 개의 나라가 되었고, 전후의 빈곤과 동서 냉전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 변방의 작은 나라의 국민들에게 세계적, 이라는 말은 (약간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할지라도)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상상적 동일화의 꿈이 되었다. 김기수는 더군다나 아마추어 복싱 선수 시절 88전 87승 1패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위협받는 공동체. 보잘것없는 국가. 그때 세계 질서 안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 말하자면 일종의 초인적 존재의 간절한 요구. 이 믿음이 다소 기괴하다 할지라도 스포츠의 신화는 한국 사회 안에서 민족적인 사물의 존재인 양 여러 가지 방식으로 믿음을 재생산하였다. 그 승리는 무언가를 의미할 거예요. 물론 아무도 그 무언가가 무언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텅 빈 믿음. 그때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담론들 사이의 맹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물론 지금은 그 전투의 장이 여러 개의 진지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그때 축구는 월드컵을 감히 꿈꿀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농구와 배구는 은행들 사이의 대리홍보전이었다. 야구는 고등학생들의 경기였다. 레슬링은 흥미진진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걸 쇼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권투는 스포츠라기보다 그걸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몸에 관한 일종의 극단적인 자기 수련의 결과로 받아들여졌으며, 선수들은 가난한 삶에서 출발하여 오로지 자신의 몸과 타고난 재능에 의지하여 링 위에서 목숨을 건 인정투쟁을 벌이는 실존적 존재로 종종 사회적 각색이 이루어졌다. 나는 지금 1966년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누구나 권투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무나 챔피언이 될 수는 없어요. 훌륭한 선수는 언제나 혜성같이 나타났고, 그런 다음 그들은 링 위에서 어떤 방어물도 없이 권투 글러브만을 낀 채 규칙을 지키면서 그 안에서 상대방을 쓰러트려야만 다시 내려갈 수 있다. 링 위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은 끝까지 서 있을 것이며, 다른 한 사람은 결국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 아무도 기술을 눈 여겨 보지 않았고 사람들은 오로지 피투성이가 된 선수들의 승패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때 모든 신문 기사들은 권투가 진행되는 링을 정글에 비유했다. 선수들은 그러므로 그 위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가 되어야만 했다. 권투는 구경꾼들이 고통을 감상하는 스포츠이다. 세계로부터 잘려나간 일부. 그때 이 구경거리에는 우리가 그 일부로 포함되지 않는 세계가 잠시 동안 일상 바깥에 덧붙여진 것처럼 보인다. 이 세계가 분명히 삶의 일부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현실감각의 바깥에서 우리들의 상식적인 리얼리즘을 초월하는 그 무언가가 작동되고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같은 링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기인데도 불구하고 레슬링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희극적인 기분이 감도는데 비해 권투는 언제나 비극적이고 엄숙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나는 왕이다>는 김기수의 전기 영화가 아니다. 그때 이 영화는 챔피언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렇다면 임권택은 무얼 찍고 싶었던 것일까. 물론 대답은 권투를 다루려는 것이다. 그때 권투의 어떤 자리를 찍으려는 것일까. 약간 질문을 바꿔보자. 나는 가끔 영화에서 줄거리란 너무 불투명하거나 불확실해서 종종 그 영화의 스타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대부분의 관객들, 때로는 많은 비평들이 줄거리에 매달린 다음 영화 그 자체에서 눈 돌리는 것은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종종 영화에서 줄거리는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다. 아니, 어쩌면 대부분 그러하다. 나는 임권택의 영화에서 매번 이야기가 희미해지는 순간과 마주치게 된다. 그때 이야기는 대부분 불연속적이거나 종종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고 고정점이 옮겨가기 시작한다. 이 순간 갑자기 생각지 않았던 무대화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마치 이야기의 틈새 사이로 빠져나온 것만 같은 영화의 기호들이다. 이야기의 외곽에 있었던 것만 같은 형식적으로나 질료적으로 조심스럽게 숨어있었던 잉여들. 우리는 고전영화의 문법이 이 잉여들을 감추기 위한 미학적 문법의 역사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수없이 다양한 잉여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는 수줍은 잉여들. 하지만 종종 이야기를 정리할 때에는 거의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미세하고 우연하며 때로 하찮은 것처럼 취급되었던 것들이 마치 자기 자신의 기회를 붙잡은 것처럼 웅성거리기 시작할 때, 그때 비로소 영화의 시간이 시작된다. <나는 왕이다>를 보고 난 다음 줄거리를 옮겨 쓸 때 나는 수 없이 난처한 순간들과 반복해서 마주쳤다. 처음에는 간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빨리 해치운 다음 다른 영화로 옮겨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영화는 내게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내가 영화를 줄거리로 베껴 쓰려 들 때 어떤 영화들은 그걸 거절한다. 줄거리와 영화 기호들 사이의 부등가 교환. 나는 잠시 망설인 다음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마담과 영철

두호와 영철

마담과 두호
마치 독후감과 같은 방법으로 진술된 줄거리. 아마추어 경기에서 심판의 판정에 불복종하고 링 위에서 주먹을 휘두른 천부적인 복서 영철은 제명을 당한 다음 자기를 돌봐주는 명동 고급술집 ‘BAR 홍콩 쎈타’의 마담을 찾아간다. 마담은 영철의 학비를 대주면서 그가 권투를 그만두고 그냥 편안하게 자기의 기둥서방 노릇을 해주길 바란다. 우연히 술집에서 다툼이 벌어졌을 때 영철은 한 방에 상대방을 쓰러트리고, 역시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가던 ‘고려권투 구락부’ 관장 두호는 한눈에 그가 지닌 권투의 재능을 알아본다. 두호는 영철에게 프로 권투 전향을 제안하고 영철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마담은 영철이 다시 권투를 시작하는 것을 반대하고, 두호는 영철에게 마담과 헤어질 것을 종용한다. 영철은 승승장구하고, 두호의 선수를 빼내려는 돈 많은 다른 구락부의 박 사장이 눈독을 들인다. 두호는 영철과 마담을 헤어지게 만들기 위해 마치 자신과 마담이 정을 통한 듯 꾸미지만 그 일로 배신감을 느낀 영철은 두호를 떠나 박 사장에게 간다. 영철이 떠나자 그 허탈감으로 두호는 쓰러지고, 마담은 영철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이 그를 위한 두호의 생각이었다는 편지를 남기고 멀리 떠난다. 뒤늦게 이 모든 것을 안 영철은 아시아 챔피언 타이틀을 따고 병원으로 달려오지만 두호는 세상을 떠난 다음이다. 자,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투덜거릴지 모른다. 난 이런 줄거리의 영화들을 잘 알고 있어, 그럴 뿐만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진부한 지도 충분히 알고 있어. 물론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당신은 이 뻔한 이야기가 정작, 말 그대로 정작, 요긴하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다른 것이 술어를 감싸기 시작할 때, 영화 속에서 무엇이 무엇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서 얼마나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느슨해진 텍스트. 그때 무엇이 그 사이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는가. 이 말의 방점, 사이.

같은 방법으로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의문(들). <나는 왕이다>에는 영철이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수련의 기간이 없다. 그는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가져야 하는 신체적인 훈련의 기간을 갖지 않는다. 혹은 생략되어 있다. 영철은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으며, 그는 별다른 노력 없이 그 자리에 오른다. 자동적인 결과. (그러므로) 이 이상한 과정에서 영철은 마주쳐야 하는 거의 같은 수준의 경쟁자를 갖고 있지 않다. (혹은 가질 필요가 없다) 그는 링에 오른 다음 항상 별다른 위기의 우여곡절을 겪지 않고 차례로 승리를 얻는다.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우리는 단 한 번도 링 위에서 마주칠 영철의 경쟁자에 관한 소개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영철의 경쟁자들은 링의 일부처럼 보일 정도이다. 권투는 혼자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며 그러므로 링 위에서 영철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권투라는 스포츠의 규칙 일부로서의 경쟁자들이 이 영화에는 없다. 차라리 사라진 대립물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빈자리. 경기라는 드라마. 우리는 스포츠 영화에서 두 개의 드라마를 보게 된다. 하나는 그 영화의 드라마이며, 다른 하나는 경기의 드라마이다. 그런 다음 그 둘 사이를 슬그머니 겹쳐놓기. 따분할 정도로 전형적인 예. <록키>. 그 둘은 종종 비스듬히 위아래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따금 둘 사이에서 화해를 하지만 동일한 것이 아니다. 때로 경기장의 드라마는 공정성을 내세워서 영화의 드라마를 부수기도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경기의 결과는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한쪽에서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그만큼의 무게를 담고 링 위에서 마주치게 될 상대방도 그 삶 전체를 걸고 거기 올라와서 주인공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링 위에서 주인공이 가져야 할 우선권은 어디에도 없다.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 한 편의 드라마. 열정의 순간들. 영화를 보는 관객과 경기를 보는 관중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경기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드라마를 인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때로 고통스럽게 관객들이 경기를 보는 동안 관중들은 즐거운 듯, 때대로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걸 구경한다. 이 순간 이따금 링 위에서 참기 어려운 순간을 할 수 있는 한 과장해서 연장시키기조차 한다. 그 어떤 영화보다도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 스포츠 영화의 열린 가능성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스스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혹은 영화 안의 관중에게 외재적인 것이 영화 바깥의 관객에게는 내재적인 것이 된다. 능력과 감정 사이의 모순. 모든 드라마를 비합리적으로 만드는 세상의 합리성. 경기 그 자체에 사유는 없으나 그걸 바라보는 관객에게는 삶의 사유가 요구된다. 그러나 <나는 왕이다>는 이 자리를 시시하게 만든다. 그때 <나는 왕이다>에는 관중의 자리가 함께 사라진다. 이 영화는 권투를 다루면서 이상하게도 경기의 구경꺼리라는 효과가 사라져버렸다. 이 과정은 링 위에서의 드라마의 부재라는 이상한 결과로 이끌리기 시작한다. <나는 왕이다>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링 위에 드라마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임권택의 영화에서 비밀스럽게 마주치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숨기지도 않는데 이상하리만큼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이따금 신비스럽게까지 여겨지는 어떤 전도에 대해서 건드려보고 싶다. <나는 왕이다>는 어떤 방식으로 다시 옮겨 써도 영철의 자리만으로는 줄거리를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순간과 계속 대면하게 된다. 물론 그건 영철을 올바르게 이끈다(고 착각하)고 행동하는 두호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두 개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두호의 자리에서 이 줄거리를 완전히 다시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영철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순간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바꿔치기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일종의 평행론. 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바꿔치기라는 방법. 나는 여기서 엄밀하게 개념을 가져왔다기보다 전술적으로 응용하고 있는 중이다. 임권택은 일단 시작하면 둘 혹은 셋을 가져다 놓은 다음 그 사이에서 어떤 우월성도 부여하지 않은 채 그 모든 것이 일시에 작동되기 시작한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때 이쪽 이야기의 이쪽 칸에서 이쪽 이야기의 저쪽 칸으로 넘어갈 때 반드시 문제가 생겨난다. (여기서 세 개의 이쪽을 유심히 읽어주기 바란다) 종종 이런 이동을 위해서 영화는 몇 가지 트릭을 발명했다. 이를테면 갑자기 끼어드는 꿈 장면, 혹은 씬 자체의 거리를 유발하는 여백으로서의 보이스 오버, 무심한 (척하지만 반복적인) 인서트, 그 사이에서 활동하는 두뇌의 몽타주. 하지만 임권택은 그런 선택을 한 적이 없다. 혹은 마치 그런 방법을 모른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 대신 임권택은 이 평행론의 실천적 의미 속에서 세상이 구성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든다. 자, 이것이 요점이다. 영화에서 어떤 인물도 자기가 행동하는 세계의 상상적 경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없다는 무지를 드러내는 여백의 순간을 블랙홀로 만든 다음 그 행동을 다음 사람, 다른 사람, 이 둘 사이의 장에서 그 무게를 떠맡게 만들 때 이 모든 행동은 상호주관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분열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때 분열은 항상 상호주관적인 파국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파국은 상호주관적인 네트워크의 붕괴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그 붕괴를 다시 봉합하면 사건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어질 것인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때 이 둘 혹은 셋 사이의 분열은 서로 같은 수준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둘 혹은 셋 사이의 간극은 결코 좁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 사이의 파국은 결국 각자의 제한적인 관점 때문에 서로에게 비친 자신의 얼굴을 다시 되비쳐보는 각자 자리에서의 각자 행동의 모방의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때 임권택은 각자의 고유한 자리를 유지시키면서 상대방의 자리를 흉내낼 때 자리의 바꿔치기, 바꿔친 자리에서 행동하는 각자의 맥락들, 그들 사이에서 활동하는 상호주관적인 네트워크의 환상의 고리를 작동시킨다. 이것이 처음에는 임권택의 영화에서 희미하거나 종종 도식적으로 구성되었지만(<잡초>) 점점 더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나가면서(<짝코>) 결국 그의 영화에서 일관되게 시도되는 전도된 운명론으로 이어져나갔다. (<서편제>, 그리고 <천년학>) 나는 반복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임권택의 영화에서 그것이 부재하면 그것을 제외한 그 모든 것으로 그것을 대신하는 것을 보아왔다. 핵심은 그것의 자리이다. 그때 이 자리는 일종의 대리 충족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밀고 나아갔다면 임권택은 어딘가에서 멈춰서야 했을 것이다. 반대로 이 자리는 그 자체로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알렌카 주판치치가 끌어들인 니체를 다시 인용하여) 정오의 그림자이다. S1 과 S2 의 연쇄 망. 하나가 둘로 변하는 시간. 말 그대로 가운데의 시간.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 둘 사이의 거의(das Beinahe)라고 불러야 할 최소 차이, 최단 경로로서의 빗금. 이때 서로는 서로에 대한 잠재적 부채가 된다. 임권택의 세계는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 부채의 세계이다. 임권택 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이 이 셈법에 관한 대차대조표처럼 씌어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

만일 상투적인 셈이었다면 <나는 왕이다>는 영철을 사이에 두고 먼저 두호와 마담 둘로 칸을 나눈 다음 다시 주변의 인물들 사이로 여러 개의 칸을 나누었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 그렇게 할 것이다. 임권택은 영철에게서 시작하지만 금방 그를 그냥 내버려둔다. 그것이 영철에게서 어떤 신체적 훈련을 요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영철의 대립 항을 세워놓지도 않는다. 그 대신 마치 등가물의 이동처럼 영화는 두호에게로 옮겨간다. 그렇다고 여기서 두호의 이야기로 옮겨가거나 혹은 두호의 시선으로 다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두호는 다시 고유한 하나의 칸이 된다. 임권택은 자기 영화가 하나의 총체적인 국면을 갖는 것을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이때 영화의 무대는 매번 하나의 씬에서 하나만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면 다른 하나는 그 자리를 양보해야만 한다. 하나를 둘로 나누는 대신 둘이 번갈아 하나가 되자 그것을 대신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하나는 다른 하나를 항상 포함하게 된다. 임권택의 바꿔치기에는 확장된 형태의 교집합이 항상 매듭을 만든다. 그걸 풀면 갑자기 이야기가 단조롭게 여겨질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 대답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걸 풀면 이야기가 중단될 것이다. 왜냐하면 단지 이것이 저것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할 수 없는 것을 저것이 하면서 이야기를 성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영철은 자동적으로 챔피언이 되지만 (왜냐하면 그는 챔피언이 되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링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두호가 없다면 그는 중도에 권투를 포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되고 싶은 것은 챔피언이 아니라 단지 평범한 건축가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권투 자체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 영철은 이미 권투를 포기한 다음이기 때문이다. 만일 두호의 칸을 비워놓았다면 <나는 왕이다>는 권투와 아무 상관 없이 영철과 마담의 이야기로 흘러가버렸을 것이다. 여기서 챔피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영철이 아니라 두호이다. 그러나 링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두호가 아니라 영철이다. 두호는 자신이 챔피언 벨트를 차고 찍은 사진을 마치 홀린 듯이 바라보면서 간절하게 그걸 다시 한 번 이루고 싶어 한다. 놓치지 말아야 할 이상한 결정. 영철이 다시 권투를 시작하는 것은 그 자신의 결정이 아니라 두호의 요구 때문이다. 여기에는 부정과 부정의 부정 사이의 불명확한 자기 지시 관계가 있다. 그런 다음 그는 언제든지 권투를 그만 둘 태도를 종종 보인다. <나는 왕이다>는 시련과 극복, 좌절과 승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반대로 어떻게 하면 욕망을 중단하지 않고 챔피언 벨트를 향해서 영철이 마지막까지 링에 오르는 것을 멈추지 않게 하느냐가 이 이야기의 이면이다.




나는 당신에게 이 영화의 몹시 이상한 장면을 환기시키고 싶다. 두호는 영철을 자신의 권투 구락부에 데려온 다음 거의 겁탈이라도 하듯이 웃옷을 벗기고 그의 벌거벗은 육신의 살을 마치 에로틱한 대상을 만난 것처럼 주물럭거리고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면서 거의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더 이상한 것은 그때 영철이 약간 부끄럽다는 듯 몸을 움츠리면서 여성적인 제스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침대에서 영철과 마담이 뒹구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나오지만 이 장면만큼 육감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이 영화는 퀴어(-게이)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두호가 영철에게서 동성애적인 호감을 갖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 역도 아니다. 그런데도 두호는 영철의 육체에 대해서 페티시즘에 가까운 매혹을 느낀다. 누군가는 그냥 단순하게 이걸 두호의 나르시시즘이라고 설명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둘은 하나가 아니라 반대로 서로 겹치려는 둘 사이의 긴장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매우 아쉽기는 하지만 <나는 왕이다>는 종종 임권택 자신이 이 영화의 회로가 작동하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혹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이끌려 나갈 때조차 그저 그 힘을 간과하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는 그 힘이 <하류인생>이나 <취화선>처럼 잘 통제되지 않는다. 그 대신 임권택은 반영적 관계와 대립적 관계를 사방으로 펼쳐나간다. 영철이 사랑하고 영철을 사랑하는 마담은 몇 번이고 “그 야만적인 권투를 집어치우”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돈은 내가 벌 테니 그저 내 곁에 있기만 해달”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아마도 마담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이미 전에 영철이 링 위에서 권투 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마담은 링 위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몸서리를 친다. 영철을 따르는 거리의 동생 ‘땅콩’은 “오른손에 칼을 맞지만 않았다면 계속 권투를 했을 것”이라고 고백한 다음 “형이 부럽”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우리는 권투가 매우 이상한 자리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나는 맨 처음 질문을 다시 가져올 것이다. 권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 질문에 대한 임권택 감독님의 대답. 스포츠 선수들을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세상과 접촉하는 대신 자기 훈련만을 계속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하고 말하는 사람들이지요. 자기하고만 말하는 사람. 이때 <나는 왕이다>에서 임권택이 생각하는 권투하는 사람은 영철이 아니라 두호이다. 권투를 그만두고 명동의 마담을 찾아와서 기둥서방 노릇이나 하면서 지내려는 영철을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이 영화는 권투와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두호는 먼저 이 영화의 방향을 구부러트린다. 그런 다음 두호는 자신의 대립물을 차례로 분할시키거나 소멸시키기 위해 권투 이외의 칸들을 차례로 폐쇄시켜 나가려고 한다. 점점 더 커지는 두호의 칸. 두호는 자신의 칸과 영화 전체의 칸이 동일해질 때까지 팽창시켜 나가고 싶어 한다. 그는 차례로 다른 모든 것을 권투와 등가교환 시키려고 한다. 이때 이 과정을 대부분의 영화는 그 어떤 절대적인 목표를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을 희생시켜나가면서 밀고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차례로 그 목표에 대해서 수긍을 한 다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때 이 목표는 어떤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임권택은 반대로 이 과정에서 두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니, 차라리 두호가 실패하는 과정을 그저 쳐다보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자 여기서 일어나는 전도는 기이하게도 그 희생을 두호에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을 바꿔치기의 전도라고 부르고 싶다. 이 전도는 임권택 영화 전체에서 우리가 수없이 다시 마주치게 되는 실패이다. 실패? 그렇다. 교환의 실패. 물론 이것은 객관적으로 올바른 교환이 아니다. 그러나 두호는 이 교환을 객관적으로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하려는 방법은 상대방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과 그 자신이 내세운 목표 사이에서 생겨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주변의 모든 칸을 무효화시키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때 둘 사이의 모순을 자기와의 동일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두호의 행동은 사실상 그 자신의 상상적 대립 안에서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배제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나아간다. 임권택은 영철이 승리를 거두는 것을 활기차게 바라보는 것보다는 두호가 그렇게 실패의 과정을 거쳐서 그 모두의 관계 안에서 두호의 칸이 부서져 가는 것을 우울하게 바라보는 것에로 관심을 옮겨간다.
<나는 왕이다>는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영철이 챔피언이 되는 이야기지만 속으로는 두호가 그 스스로 내세운 목표가 다른 모두의 목표와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전체로부터 외부로 빼내가는 실패의 과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이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전체 안에서 결핍되어 채워 넣으려고 한 것이 사실상 과잉된 그 무엇이었음을 깨닫고 이 관계 전체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말소시켜나가는 이야기이다. 나는 임권택이 이러한 역설의 논리에 일관되게 자기의 주인공을 던져 넣는 것을 보아왔다. 주인공들은 이런 내기에 대해서 끝까지 버텨보지만 결국에는 부서져 나간다. 왜냐하면 이 내기는 (다소 따분하게 설명하자면) 스스로를 주체화시켜나가는 행위 자체가 자기 부정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때 핵심은 어느 순간에 자기 존재가 이 구조 안에서 잉여라는 것을 깨닫는가, 라는 그 순간을 임권택은 영화가 다룰만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임권택의 관심은 오로지 거기에 매달려 있다. 그는 줄기차게 실패한 만남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나는 이것을 과도하게 그의 전기와 연결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또한 이 과정을 일반화시켜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이 실패 안에서 임권택은 주인공을 거기에 하나 새롭게 더하는 덧셈의 공존 대신 빼 나가는 뺄셈의 외부, 말 그대로 바깥의 자리에로 밀어낸 다음 그것이 무효화 되어가는 과정을 영화의 경로라고 믿는다. 그때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물론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 대신 우리는 거기서 영화적으로 다룰만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어보아야 한다. 존재론적인 대답은 자명하다. 그건 존재의 오류를 다루려는 것이다. 그때 오류는 영화적으로 진리(를 찾으려는 행위)보다 무엇이 더 효과적인가. 임권택은 거기서 한 인물을 둘로 쪼개낸 다음 하나의 해결을 향해서 갈 수 있는 길을 내버려두고 갑자기 제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실제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사이의 미로 안으로 뛰어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왜 그것이 중요한가. 그것만이 현실적인 규정 바깥으로 빠져나와 현실의 구조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하나의 무대 위에서 종종 두 명의 인물을 제시한다. 그런 다음 그가 바꿔치는 것은 단지 이 인물에서 저 인물에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세계를 내버려두고 다른 세계로 옮겨갈 때 거기에는 우리들이 쫓아내 버린 것들, 부정된 것들, 배제된 것들, 나머지 것들, 명백히 동어반복처럼 보이면서도 바깥에 놓여진 것들의 칸이 남는다. 그것을 다루는 것은 영화에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그때 임권택이 서사를 버리고 묘사로 옮겨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하지만 아직은 1966년이다. <나는 왕이다>에서 임권택은 아직 이런 모든 것들을 다소 희미하게 다루고 있다. 나는 여기서 잠시 멈출 것이다. 하지만 이때 이 영화가 내게 흥미로운 것은 언제나 이미 자기와의 동일성이 불가능해져 버린 세상에 대해서 거의 동어반복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을 벌써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토록 끈질긴 실패한 만남.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해소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임권택은 여기서 마지막 순간 잉여를 치워버린다. 두호의 죽음. 그런데 그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스산한 공백. 거기에는 감정적인 격앙의 순간도 없고, 어떤 희생의 보답도 없다. 마치 얼룩을 지우듯이 그렇게 이야기에서 빠져나간다. 그때 남은 자들에게 남겨진 질문은 다소 두려워진다. 이 공백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혹시 이 공백 자체가 세상의 연쇄 속에 놓인 다른 가능성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영화에서 이 전체가 공백이며 이제 가까스로 그것을 채웠던 잉여의 칸이 사라지면 남은 세상은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그때 영화는 재빨리 끝난다. 나는 이 바꿔치기를 어딘지 모르게 다른 것을 위한 어떤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떤 것을 위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자, 우리의 원래의 논점으로 돌아가자. 권투는 영화적인가. 그렇다. 그때 임권택이 한 말을 다시 생각하기 바란다. 그는 링 위에서 싸우는 두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승자의 수직선도 없고 패자의 수평선도 없다. 여기에는 두 개의 선이 교차하지 않는다. 혼자 링 위에 올라가서 섀도 복싱을 하면서 그가 자기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의 대상이자 동시에 은유일 것이다. 나는 지금 링이 세상의 은유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정반대를 가리킨다. 링은 세상과 하나의 연쇄 망을 이룰 수 있는 치환이 가능한가. 그것은 S1과 S2의 이음새를 어디서 맺고 어디서 끊는가. 그때 우리는 영화가 만들어내는 고정점의 매듭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 문자 그대로? 그렇다. 이미지라는 문자. 언제든지 첫 번째 하나이자 두 번째 하나이자 세 번째 하나이자, 라고 이어지는 바꿔치기의 계열. 끝없는 칸들. 칸 사이의 바꿔치기로서의 은유. 임권택의 은유. 그때 은유는 영화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될 수 있는가. 나는 위험한 내기를 하고 싶어진다. 내 대답은 그렇다, 는 것이다. 그때 나는 새로운 유형의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빈 칸을 발견해야만 한다. 빈 칸의 미장센. 이 칸에는 어떻게 들어올 수 있을까. 그런 다음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거기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까. 사는 법. 그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 바란다. 그 칸에서 자기와 자기 자신의 그림자와 사는 법.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것을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하고 싶다. 내게 재치를 허락한다면 임권택의 모든 주인공들은 자기하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계속)
1966년 100분 흑백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세기상사
각본 강근식, 김지헌
촬영 장석준
음악 김용환
미술 박석인
편집 김희수
신성일 최영철
김승호 맹두호
주증녀 두호의 아내
이민자 마담
태현실 춘자
박암 백사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