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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길어 올리기 Hanji

임권택, 2010

달빛 길어 올리기 Hanji 대표 이미지

나는 <달빛 길어 올리기>가 나의 백한 번째 영화가 아니라 새롭게 데뷔하는 신인감독의 첫 번째 작품으로 불리고 싶습니다. 지난 백 편의 작품에서 도망쳐 새로운 느낌의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임권택은 여러 자리에서 말했다. 두 번째 데뷔작. 다시 시작한다는 말. 영화사에는 두 번째 데뷔작의 역사가 있다. 이를테면 1950년,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사제의 일기>. 1978년, 고다르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인생)>. 1979년,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카메라 광>. 1996년, 후 샤오시엔의 <남국재견>. 이들은 물론 각자 서로 다른 이유에서 이 영화들을 자신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고 불렀다. 나는 <달빛 길어 올리기>를 보면서 그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두 번째 시작한다는 말. 이제까지의 영화를 제로라고 선언하는 것. 왜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혹은 생겨난 것일까. 말하자면 결단. 그런데 어떤 결단? 서로 다른 판본의 대답. 그는 무엇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무엇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당신은 이 두 가지 질문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무언가 중단되어야만 했다. 두 개의 무엇. 나는 <달빛 길어 올리기> 앞에서 문득 멈추었다. 임권택은 무엇이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영화 안에서 중단시켜야만 했다. 그렇게 해야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중단되지 않았다. 그 자신이 한 말. 그래서 백 편의 영화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표현. 도망치다. 왜 버린다고 말하지 않고 도망친다고 말한 것일까. 임권택은 완전히 포위되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백 편의 영화라는 병풍. 나는 거슬러 올라가면서 셈하기 시작했다. (백 번째 영화) <천년학>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아흔아홉 번째 영화) <하류인생>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 (첫 번째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나는 백 편의 영화 안에서 한 편씩, 한 편씩 차례로 그 안에서 도망쳐야 한다, 는 말을 생각해볼 것이다.


 
첫 번째 영화를 만들고 나면 두 번째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 말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라는 뜻이다. n + 1. 언제나 이미 시작된 시작. 이때 도망치면서 (두 번째로 만든) 첫 번째 영화를 다시 시작한다는 말은 말하자면 n - 1 이라고 불러볼 수는 없는 것일까. 거기서 멈추기. <달빛 길어 올리기>에서 무엇을 빼고 싶었던 것일까. 이 영화에 대해서 모두들 무엇을 새로 더했는지를 셈하였다. 나는 반대로 그가 일백 편의 영화로부터 도망친 다음, 혹은 도망치기 위해서 시도한 뺄셈을 생각해보고 싶다. 하지만 이때 뺄셈을 시도하게 되면 우리는 다소 난처한 논제와 만나게 된다. 거기서 빼야 하는 것은 이제까지 우리들이 임권택이라고 불러온 영화적인 방법들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것만을 우리는 뺄셈에서 셈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영화에서 세계의 일부를 뺄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계는 언제나 영화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셈을 시도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달빛 길어 올리기>는 이제까지 만들어진 임권택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반(反) 임권택적인 영화가 된다는 사실이다. <달빛 길어 올리기>는 이제까지 임권택이 만든 일백편의 영화와 싸우(기 시작하)는 (첫 번째) 영화이다. 혹은 외면하려는 영화이다. 이때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임권택 영화냐고 근본적으로 반문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나는 <달빛 길어 올리기>가 지나칠 정도로 근본적인 질문을 담고 있어서 두렵게 느껴진다. 그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담은 영화.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임권택 영화 안의 내재적인 기호들 사이의 네트워크 안에서만 설명되어야 한다. 물론 이 사실을 임권택이 모를 리가 없다. 임권택이라는 일백 칸의 방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 그 집을 등 뒤로 하고 다시 그 집의 주인이 ‘도망치듯이’ 떠나기로 결심을 했을 때, 누구보다 그 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가 거기서 나가려고 할 때, 그 집 문을 걸어 잠그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임권택 그 자신일 것이다. 두 명의 임권택. 아니, 백 명의 임권택(들)과 한 명의 임권택.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임권택(들)과 거기서 도망치고 있는 임권택. 그런데 그 집에서 어느 문을 열어야 거기서 나갈 수 있을까. 그 문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무거운 빗장들. 열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것이 정말 문일까. 그런 다음 마침내 이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문을 열고 문턱을 넘자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상한 시작. <달빛 길어 올리기>의 첫 장면은 “이 영화는 전주시에서 추진 중인 조선왕조실록 복본화(複本化)사업을 담당했던 공무원들의 실화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라는 자막이다. 두 가지 사실. 첫째, 이 사업은 전주시와 한국고전문화 연구원이 2008년에 시작해서 (영화가 이미 2011년 3월 17일 개봉을 끝난 다음인) 2012년 7월에 완료하였다. 이는 태종에서 명종까지 13대에 이르는 조선 전기 왕조실록을 제작 당시의 원본에 따라 재현한 것으로 806권 614책 5만 5130쪽에 이르는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15억 원의 국고를 지원했으며 이 작업을 위해서 전주를 비롯하여 전국 24개 업체에서 공급된 전통 한지가 3만 8,000장이었다. (조선일보 2012년 8월 29일자 김창곤 기자) <달빛 길어 올리기>는 이 사업의 진행 과정 중에 기획된 다음 전주영화제가 제작하였다. 좀 더 정확하게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영화 안의 대사에 따르면) 2008년 7월 15일이다. 그러니까 전주시가 막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을 시작했을 때 시작한 다음 영화는 그 완성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본화 사업의 성공 여부를 이 영화만 보고는 알 수가 없다. 종종 이 영화에 비판적인 글들은 <달빛 길어 올리기>를 전주시의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에 관한 정책홍보 영화라고 비평을 하지만 정작 이 영화는 그 사업에 별 관심이 없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달빛 길어 올리기>는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의 관점에서 본다면 함께 시작한 다음 그냥 중간에 끝나는 영화이다.

 

둘째, 첫 자막이 끝난 다음 첫 장면은 전주시청 강당 회의실에서 전주 시장이 새로운 업무를 맡은 직원들에게 인사발령 임용장을 나눠주는 데서 시작한다. 청소과에서 근무하던 7급 공무원 한필용 주사(박중훈)는 이날 한 스타일 한지과로 새로 배속된다. 그런 다음 이 영화는 내내 한필용을 따라 진행된다. 아니, 한필용이 등장하지 않는 씬은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카메라로서의 한필용. 이야기의 동선으로서의 한필용. 이때 처음에는 이 첫 씬을 무심코 보았지만 이때 임용장을 나눠주기 위해 화면에 등장한 사람은 송하진 전주시장 그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권택은 종종 (주연이 아닌) 어떤 인물의 경우 전문적인 연기자를 사용하는 대신 거기에 걸 맞는 이들을 현장에 초대하여 이들에게 그 배역을 맡기곤 하였다. 이를테면 <태백산맥>에서 북한에서 내려온 공산군 장교들을 연기하는 (그 영화 촬영 당시의) 영화담당 기자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 자신이자 동시에 그 자신이 아니다. 그 대신 그 자신이 그를 연기한다. 이때 두 말의 차이를 생각해주기 바란다. 송하진 전주시장은 영화에 출연해서 그 자신이 항상 해 오는 업무를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이 행동은 그에게 익숙한 일의 일부이며, 그는 이 장면을 위해서 별다른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달빛 길어 올리기>에는 송하진 전주시장 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그 자신을 연기한다. 

이 영화에는 세 종류의 연기자가 있다. 하나는 박중훈, 강수연, 예지원, 안병경처럼 전문적인 연기자들이 영화 속의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한다. 물론 그들은 전문적인 연기자들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 역으로 송길한 시나리오 작가, 한지 수집가로 김동호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한지제작소 사장으로 민병록 전 전주영화제 집행위원장, 전주시청 국장으로 장제국 동서대 총장처럼 임권택의 지인들, 혹은 영화와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이들이 자신과 서로 다른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한다. 그들이 아마추어의 연기자들이긴 하지만 종종 자신의 영화에서 그렇게 연기자를 선택하는 건 임권택에게 드문 일이 아니다. “만일 척 보고 믿을만한 얼굴이나 살아온 모양새가 나지만 연기가 안 되는 사람과 연기는 잘 하지만 도무지 그 일을 했을 것 같지 않은 겉모습을 지닌 연기자 둘 중 하나를 써야 한다면 그 역할이 단역이면 단연 전자지요. 왜냐하면 모양새가 안 나면 그걸 설득시키는데 한참 걸리는 거예요. 그게 영화인 거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내가 말하는 것은 세 번째 경우이다. 우선 기술적인 설명. 이 영화는 전문적인 연기자 박중훈에서 시작하지 않고 전주시장 송하진이 그날의 하루 일과가 진행 중인 생활의 시간 안에서 시작한다. 전주시장 송하진에게 그 일은 항상 하는 일의 일부이고, 그 장소는 그가 생활하는 업무 공간의 일부이다. 부디 아무 것도 더 하지도 말고 덜 하지도 말아 주세요. 그때 박중훈은 그 장소에 들어와서 그 일과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때 그 일과의 매카니즘 안에서 박중훈은 송하진과 연기해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박중훈의 쇼트는 송하진의 쇼트와 서로 마주 붙어야 한다. 자크 오몽의 지적. 위대한 연기자들을 가장 난처하게 만드는 순간은 나무 옆에 서 있을 때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연의 일부인 나무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를 나무와 경쟁해야하기 때문, 이라고 썼다. 이 첫 씬에서 임권택은 송하진의 쇼트와 박중훈의 쇼트를 분리해서 찍은 다음 그 둘을 붙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둘이 하나의 프레임에 있는 경우는 없다. 프레임 안에서의 공존과 쇼트의 분리라는 문제. 이 방법은 <달빛 길어 올리기>에서 일관되게 몇 차례이고 상대를 바꿔가면서 반복되고 있다. 이때 나는 분리라는 문제를 생각하는 대신 두 개의 쇼트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임권택은 수없이 박중훈의 쇼트(라고 여기서 부른 연기자의 쇼트)를 찍어본 연출자이다. 그러나 송하진의 쇼트를 찍어 온 연출자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손쉽게 다큐멘터리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송하진이라는 실재. 박중훈이라는 드라마. 이때 이 분리에는 송하진이라는 실재 안으로 박중훈이라는 드라마가 침범해 들어오는 것을 견딜 수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송하진이라는 실재의 리얼리티를 포기할 수 없다는 어떤 구체적인 충실성에 대한 존중과도 같은 태도를 보게 된다. 이 장소에서 실재와 드라마 사이의 종합을 포기할지언정 그 둘의 어느 쪽도 다른 한쪽에 양보하거나 봉사하는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위한 어떤 위장도 없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달빛 길어 올리기>에는 실재와 드라마, 현실의 일부와 허구의 이야기,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야기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들, 그냥 간단하게 세계와 영화 그 둘 사이의 서로가 서로에 대한 침투를 시도하지만 임권택은 여기서 둘 사이의 어느 쪽도 상처받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여기서 상처라는 말을 신중하게 사용했다. 현실이, 실재가, 세계가 상처 난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이야기가, 연기가, 영화가 상처 난다는 말은 두 개의 연결 사이에 서로가 서로에게 용서할 수 없는 미학적 흔적의 고통이 뒤따른다는 뜻이다. 이때 <달빛 길어 올리기>는 영화의 어떤 시스템을 건드리는 것일까. 종종 비평은 이 둘 사이에 명백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때로 이 둘 사이를 오갈 때 무언가를 위반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그것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약속이 있다. 물론 이때 여기서 그것, 이라고 불리는 수수께끼는 항상 미학적 전쟁터가 되었다. 대부분 우리들은 현실에서 시작해서 영화가 드라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아왔다. 종종 이 과정에서 한쪽은 다른 한 쪽을 위해 봉사하거나 혹은 일부를 잘라 내거나 때로는 변형을 가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쪽은 다른 한쪽에게 어떤 불순물이 되어서 과도한 잉여의 불연속성을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임권택에게 많은 경우 그를 둘러싼 세계는 이야기의 풍경이었다. 종종 풍경은 텔레비전을 통해서나 혹은 미장센의 일부로 그 자리를 차지한 다음 슬그머니 이야기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그런 다음 인물을 설명하거나 혹은 칭칭 동여매듯이 그의 운명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다음, 의 연쇄적 사용법. 그런 다음은 여기서 중단된다. <달빛 길어 올리기>는 현실에서 시작해서 드라마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쇼트가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마주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마주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서로 마주하는 순간. 그 둘을 움직이는 서로 전혀 다른 운동의 기록.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달빛 길어 올리기>는 주인공이 작동하는 방식의 이야기와 인물이 작동하는 방식의 세계 사이를 분리시킨 다음 그 둘을 마주보게 만들고 있다. 이때 이 착상의 잔상들이 이제 서로의 쇼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스템을 건드리느냐는 질문이 되어 그 안에서 스스로 창조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하나의 차원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뒤이어 이어지는 씬은 갑자기 이 영화를 원래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자리에로 되돌려 보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씬. 늦은 밤. 귀가하는 한필용. 달빛이 떨어지는 골목을 따라서 걸어오면 그 골목이 끝나는 자리에 집이 기다리고 있다. 뇌경색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내 효경(예지원). 한필용의 등 뒤를 따라가면서 달빛이 떨어지는 골목장면은 임권택의 모든 영화중에서도 특별하게 우아한 순간이다. 또한 필용과 효경이 이야기를 나누는 씬은 매우 간결하게 그 두 사람의 지난한 삶을 소개한다. 바람을 핀 필용 때문에 효경은 뇌경색으로 고생하게 되었고, 게다가 아내 효경이 한지 장인 집안사람이라 시댁으로부터 천대를 받았으며, 그 아내가 어려서 고향을 잃어버려서 간절하게 한번은 그곳에 가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쓰러진 아내. 되찾아야하는 고향. 이제 이 영화가 나아가야 할 운동의 방향은 이미 여기서 결정된 셈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경제성에도 불구하고 임권택은 이 장면을 매우 고전적으로 연출하였다. 무엇보다도 박중훈과 예지원은 하나의 프레임 안에 대부분 공존하고 있으며, 그 두 사람의 쇼트는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롱 테이크로 멈춰 선 카메라 앞에서 두 사람의 동선이 딥 포커스 안에서 이어지거나 아니면 두 개의 쇼트 사이에 위 아래로 분리된 두 사람의 육체의 일부가 중첩된다. 여기서는 이미 앞서 본 송하진의 쇼트와 박중훈의 쇼트가 분리된 것과 완전히 반대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공간. 배우들의 연기. 그 안에 이야기 바깥의 실재는 그 방에 놓인 텔레비전 모니터 안에서 제한적으로 작동된다. 이때 임권택은 한편으로는 필용과 효경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방송물 <조선왕조실록 93년만의 귀환>을 보여준다. 이 방송 영상물의 쇼트가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독립적으로 우리에게 조선왕조실록의 역사에 관해서 알려주기 위해 등장하지만 그러나 이 씬 안에서 이 쇼트들은 부분집합이다. 왜냐하면 재빨리 필용의 시점 쇼트가 이 장면들을 씬 안으로 다시 봉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하진의 쇼트와 박중훈의 쇼트는 두 개의 모델이다. 그들은 각자 자명해보이지만 그러나 그 둘이 하나의 씬 안에 자리하는 순간 갑자기 세계와 이야기 둘 중 어느 쪽이 자명한 것인지 선택하기 어려워진다. 이때 롤랑 바르뜨라면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썼을 것이다. 세계와 영화 사이의 보이지 않는 틈새.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용법을 보고 있으면 이 영화는 인물의 쇼트와 세계의 쇼트 두 가지 방법 사이를 따라 진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다소 과도하게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집으로 들어가면 공존의 고전적인 운동에로 되돌아가고 세상 바깥으로 나오면 두 개의 분리된 쇼트들 사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세워진 위험한 범주들 사이의 마주침에로 나아가고 있다고 설명하고 싶다. 이 두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골목길. 여기에 한필용이 세계로부터 자기 집 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달빛이 떨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는 장면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스테디캠으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기나긴 쇼트. 이때 임권택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골목길을 걸어가는 장면 위에 송하진 전주시장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들려주는 (세계로부터의) 청각적 신호를 놓치지 않는다. 그의 등 뒤에 들러붙은 세계. 그런 다음 집 문 안으로 들어오자 그 청각적 신호는 중단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여기에 임권택은 세 번째 차원을 더한다.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을 한지제작업자들에게 설명하는 장면, 그러니까 영화가 시작하고 22분의 지점, 이 자리에 카메라를 든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강수연)이 조수와 함께 나타난다. 갑작스러운 등장. 지원이 나타나면서 <달빛 길어 올리기>는 두 편의 영화가 된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그녀가 한지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달빛 길어 올리기>이기 때문이다.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 그러나 우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원의 다큐멘터리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지 제대로 전체를 보지 못한다. (게다가 이 다큐멘터리 촬영 장면들은 별다른 사건 없이 그로부터 45분후, 그러니까 1시간 10분 정도가 되었을 때, 아직 영화가 40분이 더 남아있는 데도, “촬영 쫑이에요”라며 지원이 필용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물론 그런 다음에 다시 만나기는 하지만...) 임권택은 그녀가 만들고 있는 다큐멘터리를 끌어들여 과도하게 어떤 미학적인 게임을 벌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지원이 등장하면서 <달빛 길어 올리기>는 그녀의 다큐멘터리와 함께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에 매달린 전주시청 공무원과 그 사업에 관련된 사업자들 사이의 이야기처럼 진행되던 이 영화를 갑자기 여기서부터 방향을 틀어서 한지 이야기로 옮겨간다. <달빛 길어 올리기>는 처음 시작과 마지막 끝이 이상할 정도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영화이다. 한 가지 더. 의미심장하게도 그 자리에 모두가 목청을 높이며 서로 사업을 따내기 위해 싸우고 있을 때 진정한 한지 장인은 구석에 앉아 술에 취해 졸고 있지만, 그렇게 슬그머니, 이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달빛 길어 올리기>의 유일한 장인. 오직 그만이 천년을 견딜 수 있는 한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는 세계 속에서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현실 속의 환상. 그런 인물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혹은 적어도 (이 영화의 자막에 따르면) “공무원들의 실화를 토대로 한 이야기” 바깥에 있는 인물이다. 실재 안의 증후. 그러나 그런 인물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실망스러운 실재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동시에 등장한 두 인물. 그 둘은 서로 반대 반향에서 나타나서 이 자리에서 마치 교차하듯이 동시에 공존한다. 이때 지원은 영화와 세계 사이에서 영화 쪽을 향해서 우리에게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난 영화의 자리를 계속해서 일깨워주고 있다. 그녀는 영화와 세계 사이의 공백을 채워주기는커녕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거리를 영화 속에서 보여주고 전시하고 있다. 반대로 이 한지 장인은 천년을 가는 종이라는 한지에 대해 품고 있는 내밀한 의심을 역설적으로 긍정하는 표상이다. 세계 속의 조건과 관계로부터 초월적 인물이라는 설정. 그 안에서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것의 긍정. 사실상 <달빛 길어 올리기>가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에 관한 영화라면 이 한지 장인은 매우 불합리한 잉여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으로부터 한지에로 전회하면서 갑자기 이야기는 한지에 대한 존재론적 보증과 함께 세계와 이야기 사이의 부조화 사이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교환가치가 필요해진 것이다. 다소 서둘러 이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을 먼저 생각해보자. 이제는 이름조차 사라진 산속 깊은 월곡 마을 폭포를 마주보며 한밤중에 보름달 아래서 한지를 뜰 때 그들 중 누구도 이 종이로 조선왕조실록을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 사업이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차라리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다시 한 번 당신을 환기시키자면 <달빛 길어 올리기>는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이 진행 중에 (그것도 거의 초기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이 영화는 이 세 명을 놓고 한필용이 이들 사이를 오가면서 영화가 진행된다. 이때 이 영화는 무언가 자꾸 이야기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자꾸만 중단된다. 그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가? 세계. 그저 놓여진 세계. 아무 것도 더 이상 손 써볼 수 없고, 거기서 어떤 것도 손대서는 안 되는 세계. 사실의 집합. 존재의 현상들. 그 사이에 선 영화라는 기록의 매체. 그러나 임권택은 눈앞에 있는 존재들과 현상의 특징들을 찍었다고 해서 그것이 세계를 담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사태를 단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달빛 길어 올리기>에는 어떤 곤궁에 처한 입장 같은 것이 반복적으로 느껴진다. 그것이 이상한 것은 영화 전체에서 문제가 생겼다기보다는 매번 새로운 씬과 만날 때마다 그것을 느껴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시적이기는 하지만 세계 속에서 존재론적으로 허약해보이고, 세계는 자명해보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에 그 안에 머물고 있는 인물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는 거리감을 끝내 좁히지 않으면서 서로가 서로의 유기적 관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한 대의 카메라처럼 한필용은 계속해서 이야기와 세계 사이를 오가면서 그들 사이의 동선이 되려고 한다. 

<달빛 길어 올리기>는 그 안에서 거의 기복을 느껴볼 수 없는 영화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내내 대부분의 모든 것들이 그냥 거기 그 상태 그대로 멈춰 서서 자기의 반경을 넘어서지 않는 정도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다. 이제까지 자기가 해온 삶에 대한 반복. 그 반복 안의 일상. 종종 그 삶을 전시하고 있는 듯한 인물들. 그런 다음 그 상태를 영화가 살짝 건드려보는 방법을 취한다. 지원은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선생님에게 한지란 무엇인가요. 작은 반응들.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씬들의 연속. 여기에는 어떤 결정적 행동이나 태도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혹은 그 무언가를 설득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영화와 세계 사이의 거리.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필용은 한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고, 그러므로 한지에 다가가기 위해서 그는 한지에 관한 정보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 다음 그 세계를 돌아다닌다. 한지라는 기호. 그를 둘러싼 수 없는 정보들. 반복적인 설명. 




그때 임권택이 발견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상한 대답. 그는 달빛을 바라본 다음 밤하늘에 휘영청 뜬 보름달을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두 번째 밤 장면. 서울에서 막 사업을 승인받고 집에 돌아온 필용은 기분이 좋아서 아내를 마루에 나와 앉힌 다음 한 가득 물을 담은 세수 대야를 들고 오면서 “달 따왔다”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아내의 발을 씻겨주면서 고등학교 시절 불국사 수학여행을 갔을 때 효경이 써서 필용에게 건네준 이규보의 시를 낭송한다. “산속에 사는 스님, 달빛이 너무 탐나 물을 길러 갔다가 달도 함께 담았네, 절에 돌아와서야 응당 깨달았네, 물을 비우면 달빛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 영화 속의 네 명의 등장인물, 필용과 효경, 지원, 그리고 한지 장인의 유일한 공통점은 그들이 달빛에 민감하다는 점이다. 달빛에 관한 시를 읽은 다음 그걸 건네 준 효경. 이 시를 읽고 “뽕 간 다음” 임신한 그녀와 결혼한 필용. 둘이 함께 차를 타고 갈 때 “달빛도 좋은 데 불을 끄죠” 라고 말하는 사람은 필용이 아니라 지원이다. 그리고 달빛 아래서만 천년 가는 종이를 뜰 수 있다고 배우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 한지 장인. 그 네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달빛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달은 저 하늘에 뜬 것이며, 달빛은 세계의 구석구석을 비출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그들만이 그것을 바라보고 그런 다음 느껴본다. 그 말뜻은 달빛은 세계가 아니라 이야기의 구석구석만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가장 신기한 것은 필용을 매개로 한 효경과 지원 사이의 공명 현상이다. 이규보의 시를 쓴 사람은, 아주 오래 전, 고등학교 시절, 효경이다. 필용은 지금 그걸 다시 효경 앞에서 낭송한다. 그러나 그 시로부터 영감을 얻어서 한지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달빛 길어 올리기’로 정한 사람은 지원이다. 지원은 그 시를 낭송할 때 (영화 안에서조차) 아직 알지도 못한 사람이다. 정확하게는 이 시를 낭송한 씬 바로 다음에 지원과 한지 장인이 등장하는 씬과 우리는 만난다. 그래서 이야기 속의 이 두 사람은 이 시가 불러낸 등장인물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것이 이 두 인물에게 이상하게도 시적인 감흥을 감돌게 만든다.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단어는 월곡(月谷)이다. 나는 이 지명이 전라북도 전주에 실존하는 마을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영화를 위해서 만들어낸 이름인지를 알지 못한다. (실제로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월곡리가 있다) 그러나 영화 속의 필용의 말에 따르면 “대구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데 거기는 아닌 것 같고”라고 효경에게 말한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아내의 잃어버린 고향 월곡을 찾아다녔고 이 장소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지명이 이 영화를 자석처럼 이끄는 것은 이 이름이 ‘달빛이 떨어지는 계곡’이라는 뜻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이 장소는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과 아무 상관이 없는 아내 효경의 개인적인 기억의 지명이었을 뿐이었다. 필용은 이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의 고향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고 말한)다. (하지만 이 고향을 찾으러 다니는 장면이 나오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월곡은 이야기의 외곽에 자리한 호명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규보의 시를 낭송한 다음 이야기 안으로 두 인물을 불러내고, 그런 다음 느린 속도로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에서 한지에로 전회하면서 갑자기 월곡은 이 모든 인물들을 한 자리로 모으는 그 어떤 매개의 공간으로 조금씩 좌표를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이 장소는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라 오로지 한지의 세계 내 존재의 보증을 온당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해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장소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세계를 버리고 오로지 영화 내의 이야기의 세계 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장소. 현존재의 세계라는 현상을 버려야만 들어올 수 있는 잃어버린 고향. 말하자면 종종 마술처럼 작동하는 그 어떤 비밀이 담겨있는 말. 자기가 태어난 곳, 장인이었던 효경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살았던 곳. 아주 오래 전 한지 장인에게 종이 뜨는 법을 가르쳤던 사람이 효경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그 장소에 이르러서야 듣게 된다. 월곡은 <달빛 길어 올리기>가 세계라는 현상과 이야기라는 구조 사이에서 끈질기게 두 개의 씬을 오가면서 반복적으로 겪는 불안 속에서의 영화적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갑자기 물러나는 장소처럼 보인다. 하여튼 일상적 흐름 바깥으로 나와야만 구할 수 있는 대답. 진정한 한지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나요. 그건 지금 세계 안에서 불가능하답니다. 왜냐하면 천년을 가는 한지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헛된 것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그걸 얻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를 버리고 과거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거에요. 필용과 지원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거의 같은 말을 반복한다. 네, 맞아요, 그것이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럼 어디에 있나요. 과거의 유산 속에 있습니다. 그저 남겨진 것만 남았을 뿐입니다. 동어반복. 필용은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다. 지원은 여기서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실패했음을 느낀다. 다시 우리는 정신적인 대답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때 임권택은 자신이 쫓아낸 것을 여기서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 정보의 세계. 존재의 표면들. 세계는 한지에 대한 질문 앞에서 자기의 수행적 차원이 종료되었음을 알린다. 그리고 거기엔 (천년을 가는) 한지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이야기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 바깥으로 나올 필요를 느끼게 된다. 필요라는 요청. 그 무언가에게 해야 할 상징적 위임. 세계 속의 누구도 그 위임장을 받을 생각이 없다. 이때 절대적으로 필요해지는 것은 세계와 이야기 사이의 절대적인 분리이다. 그 사이에 생겨난 틈새. 월곡은 정확하게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런 다음 영화는 월곡으로 들어온다. 이때 당신은 이 영화가 다시 월곡에서 나가는 장면이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 장면 전체는 두 가지 모두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이 영화 전체의 에필로그로 읽는 방법이다. 사실상 이 장면은 어떤 목표를 가지지 않은 행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의 행위는 이 영화 전체의 이야기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1시간 38분 지점에서, 필용과 한지 장인, 그리고 그의 아들과, 금둔사 주지스님이 ‘사라진’ 월곡 마을 깊은 계곡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갈 때 화면 가득히 가로 질러 걸려있는 ‘출입금지’라는 플랫카드는, 물론 여기가 사람들의 손이 잘 미치지 않게 잘 보존된 장소라는 정보의 기능을 하지만, 오히려 더 나아가 세계로부터 떨어져나간, 현재의 시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불가능의 장소에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미 ‘출입금지’의 영화적 표지판의 신호를 잘 알고 있다. 가장 유명한 예.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의 첫 장면. 혹은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 그들은 여기서 세계로부터의 어떤 간섭도 없이 ‘천년을 가는’ 한지를 만들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런 다음 이 자리에 필용은 차례로 초대한다. 처음에는 아내 효경을, 그런 다음 한지에 대한 다큐멘터리 <달빛 길어 올리기>를 만든 지원을 부른다. 지원은 카메라를 들고 이 장소를 찾아온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모두 끝났고, 이미 시사를 마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녀는 “선을 본다”면서 시사를 마치고 필용에게 인사를 한 다음 서둘러 전주를 떠났고, 그런 다음 그녀는 영화에서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을 찍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일까. 물론 가장 따분한 대답은 보충 촬영을 위해서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이 장면 전체는 세계 안에서 마주친 그 모든 한지에 대한 불만족에 대한 대답처럼 진행된다. 필용은 끊임없이 한지 장인에게 질문한다. “정말 여기서 천년가는 종이를 뜰 수 있을까요?” 한지 장인은 대답한다. “여기가 선녀님들이 내려와서 춤을 추었다는 전설의 폭포 계곡이여,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도원경이나 마찬가지여, 이런 데서 천년 종이를 뜨지 어디 가서 천년 종이를 떠”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도원경. 불가능한 장소. 말하자면 환상의 공간. 그냥 단 한 마디로 월곡. 효경은 여기서 잃어버린 자기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가 한지를 만들던 모습을 재현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지원은 진정한 한지를 만드는 장인의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자리에 온다. (세계 안의) 불만족에 대한 (이야기의) 만족스러운 대답. 이때 이 장면 전체를 읽는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이 장면을 모두 하나의 꿈으로 읽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꿈이 도피가 아니라 욕망의 실재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좀 더 시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꿈을 유지하기 위해서 꿈 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내부라는 잉여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세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여기서 화면 가득히 보여주는, ‘출입금지’는 얼마나 적절한 보호막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달빛 길어 올리기>의 마지막 장면을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다음 이야기 안으로 들어갔을 때 과도하게 초월적인 정신에 몰두함으로써 사로잡히게 된 지나치게 시적인 대답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장면은 어쩌면 세계 바깥에서 실현된 저승의 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낮에 그들은 잠들고 밤에만 일어나서 그들은 천년을 가는 종이를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잠들어버린 낮의 시간. 깨어난 밤의 시간. 여기에는 과거의 시간에서만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슬픔이 감돈다. 지나가버린 시간. 잃어버린 시간. 그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때 어쩔 수 없이 이 장면에서 바로크적인 슬픔을 느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상실한 것은 무엇일까. 거기서 느껴보는 멜랑꼴리.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이 어떤 행동도 완료되지 않은 것이지만(우리는 이 장면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장의 종이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그냥 거기서 영화가 끝난다) 그들의 행위가 완수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그들의 행위가 충만했음을 알게 된다. 밤은 끝나지 않았고, 또 끝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떨어지는 보름달 달빛을 보면서 효경은 이렇게 말한다. 천천히 한 글자씩, 한 문장씩, 마치 시를 읽는 것처럼, 소리 내어 읽으면서 당신께서도 음미하시길. 

“달빛은 아무리 바라 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아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는 친근한 빛으로 조용히 어둠을 밝혀요. 그 고요하고 은근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한지의 품성이 달빛과 너무 닮았어요.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고 담담하고 조용해졌을 때 한지와 같은 달빛은 한가득 길어 올려질 거예요. 달빛은 길어 올린다고 해서 길어 올려지는 게 아니에요. 달빛은 그대로 두고 마음으로 그 빛을 보듬을 때 비로소 한가득 길어 올려지는 거예요” (계속) 



2010년 118분 칼라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전주영화제
각본  임권택
각색  송길한, 김미영
촬영  김훈광
음악  김수철
미술  주병도
편집  박순덕

박중훈  필용
예지원  효경
강수연  지원
안병경  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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