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영화를 보고 출판사를 차린 이야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극장에 불이 켜질 때까지도 미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영화를 만날 때면 나는 가까운 서점으로 향하곤 한다. 원작을 읽으며 영화를 다른 결에서 곱씹어 보거나 오리지널 스코어를 들으며 영화의 분위기를 일상의 배경으로 훔쳐오길 좋아한다. 작품이나 연출자에 대한 비평집이 출간되어 있다면 특히 운이 좋은 날이다. 다음은 가까운 카페로 자리를 옮기거나 집으로 돌아가 노트북을 켤 차례다. 검색 엔진과 아카이브의 은총으로 영화 제작과정과 뒷이야기는 물론이고 개봉 당시의 비평과 기사까지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일렬로 꼬리를 물며 늘어서는 브라우저 탭 사이를 헤매다 보면 하룻밤을 꼬박 새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1986)을 보고 영화에서 언급된 동명의 소설이 궁금했다. “녹색 광선을 보면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로맨틱한 말이 마음에 남았고 다름 아닌 쥘 베른의 작품이라는 점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녹색 광선』은 국내에 출간된 책이 없었다. 세상에. SNS에 “출판사 여러분, 이 책을 번역해주세요!”라고 여러 번 외쳐보았지만….

『녹색 광선』
나는 몇 년 전부터 ‘딴짓의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좋아하는 영화나 영화제에 대한 독립출판물을 만들고 있다. 책이라고 부르기에 어딘가 쑥스러운 책들은 독립출판물을 판매하는 서점을 통해 특정한 독자와 만나기도 했다. 해가 거듭되면서 ‘언젠가 『녹색 광선』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이상하게도 ‘언젠가 나라도 만들어야 한다’라는 혼자만의 다짐으로 바뀌었다. 한 권의 번역서가 출간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용과 시간, 그리고 전문가의 노력이 필요한지 미처 짐작하지 못해서 가능한 결심이었다. 번역가와 교정가를 섭외하고 좋아하는 디자이너에게 표지 디자인을 의뢰했다. 천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비용은 그때그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충당했다. 더 많은 독자와 만나기 위해서는 ISBN을 받을 수 있는 출판 사업자가 되어야 했다. 자본금 0원에 향후 출간 계획은 없는 이상한 출판사를 세우고, 필름이 영사되는 속도(f/s)에서 따온 ‘frame/page’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결과, 이제 누군가 영화 <녹색 광선>을 보고 모티브가 된 쥘 베른의 소설이 궁금하다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2016년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의 ‘아재와 이모를 위한 여름방학 특선’ 프로그램에서 리처드 도너의 <구니스>(1985)를 처음 보았다. 겪어본 적 없는 유년기를 추억하게 만드는 왁자지껄하고 귀여운 이 영화는 클래식이 된 작품답게 제작 비화와 후일담을 포함한 정보가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늘 그렇듯 인터넷을 헤매던 중에 우연히 『Three Weeks with the Goonies: on Location in Astoria, Oregon』이라는 제목의 특이한 책을 발견했다. 저자가 열아홉 살 당시 살던 동네가 <구니스>의 로케이션지로 결정되자 제작진의 허락을 받아 촬영 현장을 관찰한 경험을 회고한 에세이였다. 영화 연출을 공부했고 중년이 된 지금도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믹 올더먼(Mick Alderman)이 직접 쓰고 스스로 출판한 미국 내의 독립출판물이었다. 감독도 제작진도 배우도 아닌 사람이 남긴 영화 현장의 독특한 관찰기에서 영화라는 세계에 속하고 싶었던 지망생의 동경과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실패담으로 가득한 투박한 글이었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보았기에 깊이 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구니스>를 보고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당신의 책을 발견했다"는 인사를 시작으로 저자와 이메일을 주고받다가 『구니스와 함께한 3주』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하기로 했다. 나는 다시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했고….
영화와 관련된 책과 작업을 좋아한다. 영화가 극장에 앉아있는 두시간에 그치지 않고 삶에 여러 방식으로 스며들 때, 영화는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되고 나도 한동안 영화를 살아본다.
아무 계획 없이 만든 출판사지만 사실은 만들고 싶은 영화 관련 책의 리스트가 조금 있다. 그중에 몇 권을 만들 수 있다면 기쁠 것 같다. 그 책들을 두 손에 쥐고, 사랑하는 영화의 흔적을 좇아 얼마나 많은 밤을 충혈된 눈으로 보냈는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PS. 영화와 관련된 좋은 책을 꾸준히 출간하는 출판사가 있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먹구구식 책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고민했다. 좋은 영화, 영화인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계시는 영화 분야 출판사와 편집자분들께 깊은 감사과 응원을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