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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붉은 거북

미카엘 두독 데 비트, 2016

[초이스]붉은 거북 대표 이미지

그저 보는 것만으로 경이로움을 안기는 체험이 있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았을 때 시간이 빨려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아직 사진으로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핀란드의 청록색 오로라나 남태평양 어딘가의 투명한 바다를 접한다면 그때와 같은 황홀경에 빠질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산다. 압도적인 이미지는 때론 그것만으로 세계를 완성한다. 미카엘 두독 데 비트의 <붉은 거북>은 아마도 그와 유사한 체험을 지향하는 애니메이션일 것이다. 

우리는 대개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즐긴다. 반면 숫자가 많진 않지만 움직임과 이미지라는 본질에 좀 더 몰두하는 작품들도 있다. 시적이고 서정적인 움직임에 집중하는 애니메이터 중 한 사람인 미카엘 두독 데 비트는 이미 여러 차례 대사 없는 단편을 선보이며 평단을 놀라게 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2000년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아버지와 딸>은 한 편의 영상시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충분한 여백과 온화한 조형미, 움직임의 마술을 통해 언어가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그려’나간다. 미카엘 감독의 스타일은 단순 명확하다. 목소리와 대사를 지우고 확보된 여백을 관객의 상상력과 공감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미지로 표현한다’는 애니메이션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상시인 마이클 두독 데 비트의 첫 번째 장편 <붉은 거북>은 지브리 스튜디오와의 협업으로 사람들의 기대를 한껏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평단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단편의 성취엔 미치지 못했고 흥행 면에서는 참패했다. 이유야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대사 없이 진행되는 만큼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단편의 뛰어난 영상미학과 시적인 운율도 8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진행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홍보에 지브리 스튜디오의 이름을 끌어들인 것도 패착 중 하나인데 명백한 미카엘 두독 데 비트의 연장에 있는 작품임에도 지브리라는 거대한 기대치가 도리어 이질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실제로 타카하타 이사오가 프로듀서를 맡은 걸 제외하면 대부분 프랑스 애니메이터들이 작업을 했으며 수채화 풍이라곤 하지만 CG를 적극 활용한 만큼 지브리의 색감, 질감과는 거리가 있다.

<붉은 거북>은 놀랄만한 역작이라고 말하기엔 분명 약점이 꽤 많은 작품이다. 미카엘 두독 데 비트의 시적인 감각이 장편의 호흡으로 거듭나는 걸 기대했지만 새로운 영감보다는 늘어지는 쪽에 가깝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적극적으로 변명하고 옹호하고 싶다. 단지 미카엘 감독이 추구하는 애니메이션의 방향성, 움직임 조형, 압축과 상징을 통한 표현에 찬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극장을 나선 이후로도 가슴 속에 꽤 오래 남는 어떤 것을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무인도에 표류하고 번번이 탈출에 실패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섬에 나타난 신비한 여인을 만나 변화를 겪게 되는 이야기 자체는 별다를 것 없다. 아마도 누군가 이 작품의 교훈과 메시지를 묻는다면 거대한 자연 속에서 순환하는 삶의 흐름, 고요함 가운데 빛바래지 않는 삶의 의지 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 맞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남자의 모습과 그런 남자를 아랑곳하지 않는 듯 펼쳐져는 섬의 영롱한 풍광은 둘 다 아름답다. 대사 한마디 없이 남자의 행동을 원경으로 잡아낸 화면들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 자연과 인간, 양쪽 모두라는 점을 새삼 상기시킨다. 사실 이와 같은 이야기나 주제의식은 이미 익숙하고 식상하다. 중요한 건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인데, 말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의 감흥을 그려내는 빼어난 이미지와 음악이야말로 <붉은 거북>의 핵심이자 모든 것이다. 

<붉은 거북>은 단 한 장면으로 마음을 뺏기는 순간들로 충만하다. 대나무 숲의 푸른 빛깔, 수면 아래까지 맑게 비치는 드넓은 바닷속 풍경, 해 질 무렵의 구름떼, 적막한 밤하늘 등등 어느 순간 어떤 화면에 마음을 빼앗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나의 부족한 어휘력이 안타까울 만큼 마음을 흔드는 순간과 이미지들로 빼곡하다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듯, 아니 멈춘 채 계속 머물고 싶은 풍광들. 때론 아름다운 건 그저 아름다운 거로 충분하다. 물론 장편의 이야기와 호흡을 생각하면 마이클 두독 데 비트의 시도가 실패로 기록될 수도 있다. 하지만 80분간 어떤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들어간 극장에서 이야기를 넘어선 이미지를 접했을 때 당신은 또 다른 가능성의 목격자가 될 것이다. <붉은 거북>이 아쉬운 실패가 아닌 의미 있는 도전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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