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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역사

김보람, 2017

개의 역사 대표 이미지

<개의 역사>(김보람)는 2017년 다수의 국내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감독이 거주하는 서울 후암동 일대의 풍경 및 주민들과‘백구’라는 이름의 늙은 개, 감독 자신의 일상적 삶과 문제들, 감독의 새로운 주거지가 된 홍은동 주민들 등을 중심으로 촬영한 사적 다큐다. 관련하여 좋은 글들이 이미 있다. 개인적으로는 차한비, 설경숙, 변성찬이 쓴 세 편의 글을 읽었는데, 경청하고 공감할 부분이 많았다. 이들의 글보다 <개의 역사>에 관하여 더 사려 깊게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개의 역사>를 인상 깊게 관람한 이들과 나의 경험을 짧게나마 나누는 동시에 약간의 다른 의견을 보태려는 마음 정도다.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영화의 초반부에 감독이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수업 내용에서 일찌감치 드러난다. 우리의 삶 안에는 공공연하게 중요한 것으로 지정되는 몇 개의 사건과 사물들 외에도 눈을 돌려야 할 다수의 존재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령 동네의 늙은 개 백구가 그러한 존재일 것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감독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이 점을 시적으로 요약해 낸다. “쫓겨나고 밀려나는 것들, 신경 쓰지 못했을 때 사라져 버린 것들, 다시는 찾지 못할 그리운 것들. 이름 없는 것들의 찾지 못한 이름들, 사라져가는 것들의 지워져 가는 시간들.” 하지만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시적 표현이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얼마간의 억측을 동원해서라도 그 안에 자리 잡은 민얼굴 그러니까 어쩌면 감독 스스로 드러내기를 주저한 것인지도 모를 적나라한 사적 항목들을 추론해보고 싶어진다.

첫째는 외로움이다. 영화 속에서 이 낱말은 감독의 가족사를 말할 때 한 번 등장할 뿐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힘이 세며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 은연중 배어 있다. 외로움이 이 영화의 기초적인 감정이라고 말하면 이 영화는 유치하거나 나약해 보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 외로움의 정서가 주변의 무명한 것들에 관한 호기심을 자극한 동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외로움은 영화 만들기라는 실천적 차원을 자극한 생산적 외로움이다. 

둘째는 가난함이다. 이 가난함은 두 층위로 다시 나뉜다. 먼저 물질적 가난함이다. 감독은 영화 안에서만 두 번의 이사를 한다. 옥탑방에서 옥탑방으로 건너가는 열네 번째, 열다섯 번째 이사다. 부유하다면 그렇게 이사를 다녀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며 그걸 강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개의 역사>는 전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에의 비판성을 담고 있는 사회학적 영화라기보다는 자신의 물질적 가난함을 쫓겨나고 밀려나는 것들 중 하나의 수세적 예제로 인식하여 이 영화의 환경으로 포함시킨 뒤에 그걸 영화 속 주변의 환경들과 접속하고 연계해가며 만든 영화다. 이 물질적 가난함이라는 측면에만 한정한다면, 2017년에 나온 영화들 중 <개의 역사>와 유사한 동기를 보유한 영화는 <소공녀>(전고운)다. 두 영화는 양식적 범주도 다르고, 성찰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유사한 물질적 환경에 처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가난함이 있다면, 그건 관계의 가난함이다. 물론 이 관계의 가난함의 다른 이름은 앞서 지적한 외로움이므로 더 첨언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니 두 층위, 물질적 가난함과 관계의 가난함 모두 영화 만들기라는 생산성에 일조한다. 

셋째는 불가피함이다. 부모의 이혼, 백구의 죽음, 오래 키워온 개 못난이의 죽음, 애인과의 연애사적 역경 등은 감독에게 불가피하다. 부모의 이혼은 설명되진 않지만 피할 수 없었고, 죽음은 사람이나 개나 그 종의 구분을 떠나 피할 수 없다. 이유를 알 순 없으나 전화상으로만 등장하는 애인과의 연애 혹은 동거 혹은 결혼에의 실패라는 불행도 감독에게는 불가피한 역경인 것으로 묘사된다. 이 비운의 불가피함도 감독에게는 카메라를 들게 하는 역설적인 생산적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일부러 같은 말을 반복했다. 외로움, 가난함, 불가피함이 오히려 <개의 역사>의 생산적 관심을 촉구한 것이라고 거듭 썼다. 감독이 그 정서적, 물질적, 운명적 환경에 처한 자신을 자기 위로하거나 자기비하하며 지쳐가는 대신 영화 만들기라는 구체적 활동으로 관찰하고 성찰해 본 것임을 가리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감독의 말 중에 가장 감동적인 것은 다듬고 세공한 끝에 찾아낸, 우리가 인용하여 옮겨 온, 저 시적 표현들이 아니다. 그 표현들은 오히려 너무 수사적으로 정식화되고 공론화되어 있는 느낌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중요하게 다룬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다름 아니라 이 짧은 말, “삶을 사랑하는 법을 찾고 싶었다”이다. 그리고 이 문장에 생략되어 있으므로 추가되어야 할 말은 다시 두 가지다. 하나는‘외로움과 가난함과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라는 조건절이고 또 하나는‘나는’이라는 주어다. 말뿐이지 않다. <개의 역사>는 삶을 사랑하는 법, 이라고 할 때의 그 ‘법’, 즉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고 싶은 자의 탐색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가능한 한 삶을 사랑 하고 싶어 할 것이다. 따라서 일반화에 가까운 이 소망의 피력만으로는 <개의 역사>의 특별함을 말할 수 없다. 때문에 관점을 옮겨, 이 영화가 삶을 사랑하는 법을 찾기 위해 시도하는, 아니 이 영화가 삶을 사랑하는 방법 그 자체인 그 탐색의 형식에 방점을 찍어야만 하겠다. 이 경우에 우리는 먼저 <개의 역사>가 어딘지 모르게 단번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해야만 한다. 복잡한 사건도 파악 불가능한 인물도 없는 이 영화는 그러나 결국 잘 잡히지 않는다. <개의 역사>는 떨어져서 보면 명료하고 싱거운 이야기인 것 같지만 들어가서 보면 애매한 경험이다. 

화법의 문제가 우선 있다. 감독이 백구를 찍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암동의 주민 한 사람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감독에게 충고한다. 충고라기보다는 비난이다. 이 비난은 갑작스럽게 함부로 건네진 것이고 게다가 워낙 거센 강도여서 <개의 역사>를 인상 깊게 본 관객들 사이에서는 종종 못 잊을 대목으로 회자되는데, 사실 주목할 만한 것은 발언의 그 내용이나 수위 자체가 아니라 감독이 그 발언의 자리를 편집해내는 방식이다.

발언자의 목소리는 들려오지만 화면에는 목소리의 주인 대신 백구가 잡힌다. 감독은 생산적으로 살라는 비난의 말을 힘없이 오줌 누는 백구의 이미지 위에 겹쳐 편집한다. 발언자를 자기 영화의 화면에 담기 싫어 내린 판단일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연유에서건 그를 카메라에 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효과는 분명하다. 생산적으로 살라는 비난의 말은 저 비생산적인 대상의 가장 비생산적인 행위와 겹쳐지며 괴이한 분위기 속에서 의미를 잃고 튕겨져 나간다. 발언자는 개를 찍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말이 흐를 때 그가 중요하지 않다고 지적한 그 대상이 무심하게 겹쳐지면서 오히려 이 위악적 논평의 권위는 은밀하게 추락하고 무화된다. 

다만 그 발언자에게 반격하려는 공격성이 이 영화에는 없다. 기습해 온 저 말의 권력에 일직선으로 되받아치며 대항하는 대신, 영화는 그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 말의 핵심을 흩트리는 기술을 발휘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 말이 미치려 했던 권능에서 결국 갈라져 나와 다른 영역에 닿게 된다.

이것은 <개의 역사>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된 화법의 일부 사례에 속한다. 그것을, 중첩-분산-수렴의 화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지속적으로 겹쳐 놓는 동시에(중첩) 가르고 흩트리는(분산) 과정을 거쳐 일부가 재차 돌아오거나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것(수렴)을 가능케 하는 것이 <개의 역사>의 화법이다. <개의 역사>는 그렇게 지속적으로 들고 나며 중첩과 분산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수렴해 간다. 말과 시선, 사운드와 이미지, 주체와 대상, 원인과 결과, 위와 아래, 중심과 변두리, 안과 바깥을 바꿔서 옮겨 다니며 기존의 중심성을 붕괴시킨다. 그렇게 배열되어 가는 영화적 흐름의 과감함 혹은 섬세함으로 이 영화의 감동할 만한 정조가 형성된다.

<개의 역사>의 들고 나는 이 중첩-분산-수렴의 화법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가 전제하는 시간의 혼재성 때문이기도 하다. <개의 역사>가 시간을 담지 하는 태도는 영화의 초반부에 놓인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압축된다. 영화는 대관령 슈퍼가 철거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뒤이어 카메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거리에서 언덕으로 오르는 중이다. 그 카메라의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대관령 슈퍼가 있던 자리, 백구네 집 등의 바깥 풍경이 언뜻 보인다. 하지만 보이기 시작한 그 풍경은 이제 보이지 않고 구성된다. 과거와 현재의 서로 다른 시간대에 찍힌 풍경들이 뒤섞여 편집된다. 백구는 그때 그 자리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 장면은 마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몇 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무작위의 상념 내지는 기억의 이미지인 것처럼 구성된다. 그 상념 내지는 기억의 장면 끝에는, 대관령 슈퍼 자리에 새로 생긴, 말끔하게 차려진 편의점을 보여주는 정면 쇼트가 놓여 있다.

그러니까 <개의 역사>는 사건의 발생 순서로 시간을 따지거나 느끼지 않는다. 그건 시간에 관한 일반론일 뿐, 이 영화의 것은 아니다. 물론 많은 영화가 시간을 재구성하지만 <개의 역사>는 시간의 재구성에 필요한 논리조차도 따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오히려 시간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고 오해시킨다. 아니 시간에 대한 현기증을 일으킨다고 표현해야 더 맞을 것인가. 영화는 크게 보면, 후암동에서 홍은동으로라는, 감독의 주거지 이전이라는 평범한 연속성을 전제하고는 있지만, 그 사이에는 실제 벌어진 사건의 순차나 재구성의 논리와 무관한 무언가의 흐름이 자주 출몰하게 된다. 이때 이것들이 따르는 바는 오직 한 가지다. 사건에 대한 감독의 감정적 연상의 순서와 중요도다.

처음부터 그러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등장하는, 가령 이 영화의 중대한 사건들을 제시하는, 다음 네 개의 문장을 유심히 보자. “백구가 죽었다. 백구를 돌봐주던 대관령 슈퍼는 29년 만에 문을 닫았다. 백구가 살던 창고 옆 계단에 엘리베이터가 세워졌다”는 문장이 자막으로 제시된다. 감독의 일상생활이 잠시 흐른 뒤, “열세 번째 이사를 했다”는 감독 자신의 근황도 자막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네 개의 자막 사용법은 굉장히 의아하다. 왜 그런 것일까. 

이 자막은 먼저 이런 사건의 순서로 이해될 것이다. 백구가 죽고 난 뒤, 대관령 슈퍼도 문을 닫고, 백구가 살던 창고 옆 계단에 엘리베이터가 세워졌으며, 그 음 감독은 열세 번째 이사를 한 것이라고.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렇지 않다. 이 자막들은 실제 사건의 발생순서와 완전히 무관한 질서로 구성된다(이하 괄호 안의 숫자는 자막이 기술된 순서). 사건 발생 순서로 보면, “열세 번째 이사를 했다”(4)가 첫 번째인 것 같다. 맥락상 이때의 이사가 감독이 후암동으로 들어온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때 백구와 대관령 슈퍼는 이미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백구를 돌봐주던 대관령 슈퍼는 29년 만에 문을 닫았다”(2)와“백구가 살던 창고 옆 계단에 엘리베이터가 세워졌다(3)중 어느 것이 두 번째와 세 번째인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3). 하지만 적어도 이 두 사건은 백구의 죽음 이전에 존재했다. 슈퍼가 문 닫은 뒤에도 백구는 그 자리에 살고 있었으며, 영화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백구를 내려다보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백구는 얼마 뒤에 죽는다. 그러니“백구가 죽었다”(1)가 마지막이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한 논평을 접해보진 못했지만, 상상컨대 누군가는 단순한 실수라고 지적할 것이다. 혹은 누군가는 더 강도 높은 차원에서, 사건들을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문장구조로 기술하려다 생긴 왜곡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단순한 실수이건 지나친 왜곡이건 이것을 사실적 시간의 질서에 연연하지 않고 구속받지 않으려는 이 영화의 첫 번째 증상이자 중대한 대목으로 받아들인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연상적 배열의 핵은, 무엇보다 백구, 백구의 죽음이다. 이 영화는 거의 아무도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 백구의 삶과 죽음에 관한 언급을 절대적으로 중요한 첫머리에 위치시킨 뒤 그 밖의 사건과 시간을 연상적으로 재배열 해 나간다. 그리고 그 재배열을 주관하는 것은 치밀한 논리가 아니라 어떤 직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많은 이미지들은 일차적으로 가공하며 시작한 그 자막의 주요 네 가지 사건들을, 다시 본격적으로 중첩, 분산, 수렴해나가며 만드는, 혼재된 시간화이자 연상화의 결과물일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정작 백구의 죽음과 매장의 장면은 간결하게 다섯 개의 쇼트로 처리한다. 반면에 백구의 빈집을 보여주며 생전에 백구의 하루 일과를 되돌아보는 장면은 세심하게 기술한다. 영화는 죽은 백구의 생전의 삶을 그 자리에서 회고하며 일종의 주술을 읊는다. 그러자 그즈음 새로운 백구가 출현한다. 대관령 슈퍼의 백구는 죽었지만 아직 이름 없는 또 다른 흰 개가 전철역 인근을 배회하고 다니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렇다면 그 개도 백구일 것이다. “촬영을 시작하자 백구가 돌아왔다. 백구는 사라지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고 감독은 말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감독 자신을 포함하여, 백구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어디에나 있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지켜온 거짓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고 감독은 백구가 살던 그 계단 앞을 보여주며 영화의 후반부에 말했는데, 관객인 나는 <개의 역사>의 무엇이 나를 매혹한 것인가 영화가 끝난 뒤 잠시 생각했다. 주변의 낡은 것들, 힘없는 것들, 오래된 것들, 무명한 것들, 죽음에 가까운 것들을 둘러보는, 중첩-분산-수렴에 관하여, 시간의 혼재성에 관하여, 연상의 힘에 관하여 말했다. 이것들이 바로 <개의 역사>가 삶을 사랑하는 특별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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