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 로사

브릴얀테 멘도사, 2015

마 로사  대표 이미지

1.
올해 초 만났던 한 해외평론가는 필리핀영화의 황금기가 끝났다고 단언한 적이 있다. 왜냐고 물어보진 않았지만, 대체로 지난 몇 년 사이 인상적인 영화가 별로 없었다는 점, 이미 해외에 알려진 감독들이 주도해온 필리핀영화계에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작가들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 자국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지원하는 기관이나 프로그램이 부족하다는 점 등이 근거이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했다. 70년대 등장한 필리핀 뉴웨이브 이후, 오랜만에 부흥의 조짐을 보여온 필리핀 영화계가 최근 몇 년 사이 주춤한 모습을 보여온 건 사실이다. 브릴얀테 멘도사, 라브 디아즈, 에릭 마티 등 주요 작가들의 자국 내 흥행성적은 미흡했고, 제작비 마련을 위해서 해외로 눈을 돌리거나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어 제작비를 충당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얼마 전, 에릭 마티 감독은 <온 더 잡>의 초라한 자국개봉성적에 대해 넋두리를 한 적이 있다. 2013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상영 이후, 11개국에 판권을 팔았고 유니버설 픽처스에 리메이크 판권까지 팔았지만, 막상 자국개봉성적은 제작비의 절반 정도에 그쳤다는 냉혹한 현실은 나름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필리핀을 대표하는 장르영화의 대가이고 해외에서 주목을 받아온 감독이지만, 매번 초라한 개봉성적표를 받아 들고, 차기작 제작비 마련에 전전반측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익숙한 풍경 아닌가.

2.
그 평론가의 단언이 무색하게도, 2016년은 여러 면에서 필리핀영화의 해로 기록될 듯하다. 무엇보다 필리핀영화계를 대표하는 브릴얀테 멘도사와 라브 디아즈의 활약이 주목할만하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라브 디아즈의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를 비롯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브릴얀테 멘도사의 <마’ 로사>, 그리고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라브 디아즈의 <떠나간 여인>이 있었고, 에드아르도 로이 주니어의 <오디너리 피플 Ordinary People>,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필리핀에서 활동 중인 브래들리 리우의 장편 데뷔작 <묘지의 노래> 등 젊은 작가들의 약진이 어우러지며 필리핀영화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필리핀영화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기대와 우려가 혼재되어 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이후, 라브 디아즈는 영화제를 올림픽에 비유하며 정부지원정책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제기했고, 단편을 통해 재능을 선보인 다수의 젊은 작가들은 흥행을 목표로 기획된 영화제작에 참여하며 재능을 소진하고 있다.

3.
올해 필리핀 영화 중에서 가장 주목 받은 작가는 라브 디아즈지만, 따로 언급하고 싶은 감독은 브릴얀테 멘도사다. 극단적인 표현과 자극적인 내용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감독이지만, 필리핀 영화계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역할이 점점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비스>(2008 칸영화제 경쟁부문), <도살>(2009 칸영화제 감독상), <덫>(2015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으로 칸영화제와 오랜 친분(?)을 이어온 멘도사 감독의 <마’ 로사>는 필리핀 사회에 만연한 부패와 관료주의,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곤궁한 삶과 생존을 위한 분투를 사실적인 화면으로 담아내는 감독의 장기가 잘 드러난 영화다. <서비스>와 <도살>의 각본을 담당했던 아만도 라오가 원안을 쓰고 트로이 에스피리투가 시나리오를 맡은 영화는 뒷골목 어귀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억척스런 로사가 자식들과 마켓에서 장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편의 생일을 하루 앞둔 밤, 가게를 급습한 경찰들은 숨겨둔 마약을 찾아내고 로사와 남편을 경찰서로 연행한 후, 20만 페소를 내면 풀어주겠다는 노골적인 제안을 하면서, 턱없이 부족한 현금을 구하기 위한 부부와 세 아이들의 고군분투가 이어진다. <도살>만큼의 폭력과 잔인함은 아니지만, <마’ 로사>의 경찰들 역시 보석금을 두고 흥정을 하고 공급책을 대가로 요구하는 등 충분히 부패했고 악랄하다. 쉴새 없이 달려가던 영화의 마지막. 가쁜 숨을 잠시 쉬어가는 로사가 거리에서 어묵 하나를 집어 들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장면은 영화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고, 그 장면 하나로 재클린 호세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것이다. 범작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마’ 로사>는 감독이 늘 주창하는 ‘트루’ 시네마와 영화의 교육적 가치에 충실한 영화이기도 하다. 특정한 공간을 설정해 인물들에게 지옥 같은 상황을 제시한 후, 최소한의 대사와 연출을 통해 배우들로부터 우연적이면서 날 것의 감정을 뽑아내는 감독의 스타일은 여전하고, 그 과정을 통해 만연한 부패와 절망, 그리고 민중들의 현실을 담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마’ 로사>뿐만 아니라 멘도사 감독의 영화 세계를 응축적으로 담아낸 단편영화가 있다. 멘도사 감독은 싱가포르국립박물관이 기획한 단편옴니버스 <우리 시대의 예술>에 참여했는데, 박물관이 소장한 그림 중에서 하나를 골라 그것을 소재로 5분 남짓 단편으로 제작하는 기획으로, 멘도사 감독은 필리핀 대표 화가 페르난도 아르모솔로의 <점령기의 시장>을 골랐다. 1942년 작품으로, 일본식민지시대를 배경으로 농촌시장의 목가적이고 이상화된 풍경을 담고 있는 그림을 비추는 카메라는 시장에서 좌판을 펼친 인물에게 점점 다가가고, 그림 속 인물은 자연스럽게 지금 필리핀 시장 구석에서 좌판을 펼치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로 디졸브 된다. 곧 들이닥치는 단속원으로 시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단속을 피해 도망치는 할머니를 카메라는 숨 가쁘게 따라간다. 낭만과 예술 뒤에 숨겨진 진실의 민낯을 드러내는 멘도사 감독의 영화 세계를 이 단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필리핀의 독립영화나 단편을 보면 멘도사 감독의 영향이 아주 크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라브 디아즈의 스타일과 유사한 영화들도 다수이다. 특히 촬영이나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나 소재의 유사함 때문에, 내부에서도 상당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때 다수의 대학 졸업작품이 홍상수 아류라는 비난을 받았던 한국의 경우와 유사하지만, 멘도사 감독을 중심으로 모인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건 긍정적인 지점이 있다. 특히 멘도사 감독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레이먼드 쿠티에레즈의 단편 <이마고>가 올해 칸영화제 단편경쟁에 초청되었는데, 멘도사 감독의 워크숍 출신인 레이먼드는 멘도사 감독과 상당한 형식적, 내용적 유사함을 보여준다. 불법시체처리로 살아가는 중년여성의 하루를 통해, 도덕과 윤리, 생명의 가치를 생각하기엔 너무도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 필리핀 민중의 현실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멘도사 감독의 영화 세계와 맞닿아 있다. 

4. 
필리핀 영화사에서 아주 특별한 한 해이지만, 여전히 자국 내 개봉과 영화산업의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한가지 다행인 건, 정책과 지원을 담당하는 기관의 의지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필리핀 영화의 지원과 정책을 담당하는 FDCP(필리핀영화개발위원회) 주최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처음으로 필리핀 영화의 밤이 개최되었다. 올해 9편이라는 많은 편수의 필리핀 영화가 초청되기도 했지만, 초청 편수보다는 FDCP의 의지가 컸는데, 서울에서 주한 필리핀대사가 내려와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다. 배우로 활동하던 리자 디노-세구에라는 디렉터로 임명되자마자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필리핀 영화인들과의 소통에 나서고 있는데, 특히 제한적인 지원에 그치던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 중소 규모 영화에 대한 지원과 배급에 큰 관심을 보이며 지역 영화의 스크린 쿼터제도 도입과 대안상영공간 마련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영화계의 지원시스템에도 큰 관심을 보이던 그녀의 도전이 좋은 결과를 내길 기대한다.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