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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서지

에두아르도 윌리엄스, 2016

휴먼 서지  대표 이미지

아르헨티나의 청년 감독 에두아르도 윌리엄스는 모든 감독들이 일생을 들여 추구하는 예술적 야망을 데뷔작 한 편에 집약함으로써 젊은 유망주들에게 쏠리는 흔해빠진 기대를 훌쩍 넘어선다. 서너 편의 단편영화를 통해 ‘미래가 기대되는 작가’로 점쳐졌던 윌리엄스의 고대하던 장편 데뷔작 <더 휴먼 서지>는 영화 서사의 담대한 모험을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환경 아래 놓인 세계의 분리된 조각들을 한데 모은 <더 휴먼 서지>의 서사는 아르헨티나와 모잠비크, 필리핀을 횡단하면서 무정형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남미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이야기는 지구의 중심을 관통하는 경이적인 디졸브를 통해 시간을 확장하면서 로컬 공간과 경제 구역들, 들판과 숲, 지하와 통신케이블을 종횡무진 한다. 화면이 열리면 카메라는 어두컴컴하고 흐릿한 이미지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집 안을 유랑한다. 미끄러지듯 유연한 카메라의 이동을 따르는 첫 챕터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슈퍼마켓 일로 근근이 생활하는 한 소년이 웹캠 시장에서 포르노 동영상을 거래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에서 터져 나오는 짧은 충격 뒤에 카메라는 컴퓨터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두 번째 챕터의 주인공을 소개한다. 모잠비크 마푸토에 사는 그는 역시 온라인 포르노그래피 분야에 종사(?)하는 소년이다. 육체노동과 사무노동 사이에 끼어있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에 대한 가치중립적인 기록은 세 번째 챕터로 이어진다. ‘개미’를 매개로 연결되는 세 번째 챕터는 집을 찾아가기 위해 필리핀의 정글을 횡단하는 뿌리 뽑힌 젊은이들의 짧은 유랑을 따라간다. 맥락을 짐작하기 힘든 세 여행지를 통과한 뒤 도달하는 귀착지는 비(非)인간적인 컴퓨터 연구소의 냉랭한 풍경이다.

한 줄로 요약되지 않는 <더 휴먼 서지>의 서사는 동일한 중요성을 갖는 스토리 조각들이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구성을 취한다. 분절된 조각들로 이야기를 진술하는데 있어 이와 같은 플롯이 효과적인 이유는 기나긴 도입부 신과 이어지는 조각난 신들의 대조를 통해서 입증된다. 고립된 채로 보였을 때 분리되고 무관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다르지 않고 연관된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전략이다. 도막 난 스토리들이 하나의 사건에 의해 연결되는 네트워크 내러티브에서 곤란한 문제는 우리의 주의를 지배하는 네트워크의 양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각들 자체라기보다는 조각들의 밀접한 관계이다. 이러한 스토리의 연결성은 탐구의 주제에 있어서 핵심적인가? 이야기는 내러티브의 통일성이라는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의 통념에 도전하면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종속적인 요소들 주변에 사건을 배열하고 구성하는 방식으로 짜인다. 분리된 공간을 가로지르는 언어와 문화 사이의 이동은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내러티브의 명징한 중심, 고정되지 않은 것을 향한 욕망으로 충만한 이 영화의 구조는 인과율의 관념을 묵살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누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분별은 좀체 허락되지 않는다. 

 
<더 휴먼 서지>는 글로벌 자본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는 노동의 조건, 불통(不通)의 시스템, 관음의 테크놀로지, 존재의 불안한 내면을 형상화하기 위해 조각난 삶의 동시성과 우연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익명의 청년 주인공들은 직업을 찾아, 머물 장소를 찾아, 또는 놀 곳을 찾아 목적 없이 방랑하면서 부챗살처럼 연결된다. 홍수로 물에 잠긴 도시의 어두운 방으로부터 세 대륙을 가로질러, 태블릿 컴퓨터 검사실의 형광빛 조명 아래로 이동하는 여정은 흡사 마젤란의 항해처럼 새로운 지정학적 감각을 창조한다. 파편화, 낯설게 하기, 21세기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창시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조망, 이 모든 것이 영화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 국경과 언어를 혼합하는 이 영화는 경계, 네트워크, 존재의 상태를 가로지르면서 웹캠을 통한 포르노 산업, 사무직, 제조업 등 다변화된 노동이 디지털 공간에서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잉태하는가를 지도 그린다. 윌리엄스의 테마는 사회적, 경제적, 지리적 환경이 오늘날 젊은이들의 삶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가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아니다. <더 휴먼 서지>는 진부한 리얼리티의 표면을 넘어 완전히 다른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간다. 저들이 놓인 상이한 맥락과 풍경, 지역적 특수성, 사회경제적 배경은 어떤 차이와 동일성의 논리 안에서 구성되는가? 획일화된 기술자본주의, 고용 불안정, 세대의 불안, 도시화 과정에서 주변화된 공간은 아주 멀리 떨어진 이 장소들을 잇는 끈이다. 이러한 ‘연결’의 감각을 따라 <더 휴먼 서지>는 오늘날 세계를 일련의 망들로, 미디어 네트워크의 한 구성요소들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섬유공학과 모바일 네트워크처럼 떨어진 공간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맥박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인간, 동물, 물질, 환경, 기계 등 모든 주체들을 통과하면서 흐르는 이 에너지는 거역할 수 없는 완력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에두아르도 윌리엄스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넘어 고도의 비주얼 전략으로 미디어의 환경과 인간의 조건, 시공을 초월한 관계의 망을 시각적으로 기술한다. 세 챕터는 모두 다른 포맷으로 찍혔다. 첫 번째 챕터는 수퍼 16미리, 두 번째 챕터는 블랙 매직 캠코더, 세 번째 챕터는 레드 기종으로 촬영했다. 세계의 불확실성과 모호성은 시종일관 몽롱함을 유지하는 이미지의 색감과 질감으로 구축된다. 인위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픽셀과 그레인, 유연한 것과 딱딱한 것 사이를 진동하면서, 스크린은 사실적인 것에서 몽환적으로 변화한다. 불투명함과 흐릿함은 상이한 공간의 차이를 지우고 감각을 마비시키는데, 조명이 있더라도 인물들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이다. 

한편으로, <더 휴먼 서지>는 임기응변식 촬영이나 비전문 배우를 기용함으로써 얻어지는 사실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경험과 그것을 보는 경험을 이끄는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윌리엄스는 오늘날 영화가 점점 상실하고 있는 진실에 대한 감각이다. 곡예를 부리듯 흔들리는 카메라, 어둡고 입자가 거친 이미지,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풍경들 가운데에서 미묘한 균형과 리듬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기우뚱한 핸드헬드는 아주 다른 표현적인 기능을 부여한다. 이 영화에는 시각적으로 강력한 순간들이 있지만 그 순간의 진정한 힘은 누적의 효과이다. 개별적인 조각들은 더 큰 그림의 다른 양상들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이한 스토리는 우연한 만남에 의해 인위적으로 연결된다. 더욱 미묘하게 그들은 ‘테크놀로지의 숲에 갇힌 인간’이라는 테마와 주제적으로 연결된다. 글로벌 자본주의, 테크놀로지의 네트워크 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 국가, 민족, 인종과 관련한 더 큰 윤리적 문제들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더 휴먼 서지>에서 조각난 그림은 더 큰 그림의 다른 양상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리된 스토리는 우연한 만남에 의해 인위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종합적인 결론이나 엔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유사한 계열의 사건을 경험한다. 간간이 외설적인 이미지들을 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것은 일종의 수치심 또는 불쾌함이다. 이러한 감상으로부터 테크놀로지의 참화에 의해 와해된 인간의 삶에 대한 비판으로, 고립된 채 살아가는 거주자들에 대한 독해로 이 영화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불완전하고,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정돈된 언어로 표현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윌리엄스는 하나의 현상을 균질화하려는 고전적 내러티브 영화의 준칙들에 대해 저항하면서 쉽게 정의되지 않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주목할 만하다. 컴퓨터 랩에서 살균되는 기계들처럼 인간의 조건은 위태롭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사는 이 영화가 도달하려는 궁극의 목적지는 아니다. 테크놀로지에 갇힌 인간과 노동이라는 테마를 특정한 사회적 공간 또는 비판적 틀에 놓음으로써, 윌리엄스는 인간이라는 종(種)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예리하게 읽어내고 있다. 지난 1년간 일별했던 미래 작가군의 영화 중 이토록 서늘한 각성을 일으키는 ‘괴물 같은 영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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