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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나무를 심은 사람

프레데릭 백, 1987

[초이스]나무를 심은 사람 대표 이미지

시각 예술의 소명이 문학의 재현에서 탈피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예술의 자율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것이 추상 회화였고, 애니메이션계에서 궤를 같이한 것이 오스카 피싱거의 작품을 비롯한 추상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애니메이션은 서사에 종속적인 매체로 여겨졌다. 상당수 작가들이 그에 동의하지 않았고 새로운 창작방법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예컨대 캐나다의 노먼 맥라렌이 제창한 ‘메타모포시스’는 NFBC 소속의 많은 작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란 한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혹은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마치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지는 연출법으로, 영화의 디졸브 등과 달리 애니메이션만이 가능한 프레임 단위에서 조절되는 창작 방법론이었다. 메타모포시스는 애니메이션의 기본 문법으로 장착되기에 이른다.

프레데릭 백의 <나무를 심은 사람> 역시 그 흐름의 한 가운데서 창작된 작품으로, 그 분석과 평가에서 메타모포시스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문학을 재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가장 고전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지만, 동시에 당대 첨단의 창작 이론을 수용했다.
 
장 지오노 원작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고전이지만, 동시에 프레데릭 백이 제작한 동명의 단편 애니메이션 역시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작품은 화자이자 관찰자인 여행자가 발견한 엘제아르 부피에의 이야기다. 고독한 노인 엘제아르는 황량한 땅에 꿋꿋이 참나무를 심었고, 결국 결실을 맺어 그 지역을 풍요로운 마을로 되살린 것이다.

프레데릭 백은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환경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은 자연히 원작에 대한 존경으로 이어졌으리라 짐작된다. 실제로 <나무를 심은 사람>의 애니메이션화는 그의 오랜 염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각적 재해석보다는 충실한 재현이 주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메타모포시스가 심오한 의식의 흐름 혹은 자유로운 이미지의 연쇄로 연출되는 반면,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는 문학 서술의 직접적인 반영에 그친다. 흥미로운 재해석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노련한 장인의 솜씨다. 보기 드문 장인 정신과 원작의 엘제아르 부피에가 보이는 헌신적인 노력이 맞물려 절묘한 감동을 자아낸다.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감회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특히 잘 살아난다. 노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데, 카메라의 줌인을 쓰지 않고 한 장 한 장 새로 그려 더 세세하게 묘사한 얼굴이 다가온다. 부피에의 눈까지 이어지는 이 클로즈업은 우리가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카메라 렌즈의 줌인 방식과 카메라 자체를 이동하는 방식 두 가지로 나뉜다.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영화감독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방법론의 차이로 언급된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그려놓은 그림을 카메라 줌인하느냐,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새로 그리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그 차이는 극명하다.

한 프레임 단위로 다가오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얼굴은 그의 존재를 물적으로 존재하게끔 하고 그의 정신까지 엿보게 만든다. 주름진 얼굴에서 오버랩되며 이어지는 장대한 숲은 그의 인간적 위대함을 환기한다. 한 인간의 깊이를 포착해낸 뛰어난 연출로서 개인적으로 손꼽는다.

끈기와 인내라는 미덕을 충실히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애니메이션 창작에 임한 프레데릭 백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작품이 감동적인 것은 단지 작품 속 주인공이 거둔 위업과 그 내용에 국한되지 않고, 프레데릭 백의 헌신적인 창작 태도가 겹치며 작품의 주제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삶과 작품의 일치, 그것이 필수 불가결한 미덕은 아니지만 선량한 가치를 추구하는 작가가 이룬 드문 성취이기에 더욱 뜻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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