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평등과 거리에 대한 상상
<있는 존재> <고요수업> 그리고 <어쩌면 더 아름다웠을>
세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부분 존 버거에게 빚을 졌다. 그중에서도 평등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사회구조에 대해 다른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계기였다. 평등을 구현할 때 ‘기회의 평등’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진다면 인간은 평등해질 수 있을까? 존 버거는 아니라고 대답하며 ‘존재의 평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존재만으로 평등한 사회는 뭘까? <있는 존재> <고요수업> <어쩌면 더 아름다웠을>은 ‘거리’라는 영화적 장치들을 통해 ‘존재가 평등’한 사회에 대한 힌트를 준다.
<있는 존재>는 제목으로 많은 것이 설명된다. 있는 존재로서의 트렌스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독 친구인 주인공은 자신이 성 소수자인 것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 커밍아웃 한 이후의 관계의 변화, 그리고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익숙하지만 감독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힌트를 준다.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의 인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만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감독은 주인공과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인 엄마, 친구, 감독까지 등장시켜 관계의 거리를 담아낸다. 한 화면에 등장하기도 하고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등장하는 사람들 간의 거리는 매우 밀접하고 평화롭다. 하지만 그 밖은 여전히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밀접한 거리는 역설적이게도 있는 존재를 없는 존재로 여기는 현실을 상상하고 인식하게 만든다. <있는 존재>는 ‘거리’를 통해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것이 평등의 시작이라고 조용히 이야기한다.
<고요수업>은 동생에게 한국 대학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이익이 안 된다는 이유로 학과를 없애는 학교에서 배제된 학생들이 있다. 길들이기 위해 교권을 빼앗는 현실에, 없는 존재가 된 강사들이 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현실에 주석을 다는 감독의 내레이션이 있다. 그리고 분할 화면이 있다. <고요수업>의 분할 화면은 다른 컷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한 컷을 잘라서 만든 것도 있다. 분할 화면은 검은 테두리로 분리되어 있다. 과거의 장면과 현재의 장면이 동시에 등장하지만 그 거리와 시간만큼의 안타까움이 존재한다. 한 컷이라도 분할해서 쓰이는 장면에서는 소통되지 못하는 현실이 담긴다. 분할 화면이 쓰이는 부분은 존재가 부정당하는 순간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감독은 나지막한 내레이션으로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사람들,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현실, 자신의 권리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는 평등한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절망적이라고 말한다.
간판도 없는 골목 모퉁이 세탁소의 주인 부부는 23년간 일하던 곳을 떠나야 한다. <어쩌면 더 아름다웠을>은 세탁소가 문을 닫기 며칠 전부터 시작된다. 감독은 멀찌감치 떨어져 오래된 골목 모퉁이에 자리 잡은 세탁소와 주인을 담는다. 세탁소는 자체로 골목이다. 화면 안에는 세 개의 선이 있다. 수평의 선과 수직의 선이 있다. 그리고 화면을 관통하는 선이 있다. <어쩌면 더 아름다웠을>은 카메라와 주인공의 ‘거리’ 속에서 관통하는 선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카메라는 멀리 떨어져 골목을 담아낸다. 동네 사람들은 느긋이 걸어와 세탁소 주인에게 사소한 부탁을 하고 20년 전 일을 엊그제 일처럼 이야기한다. 느긋한 말 사이에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빠른 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세련된 식당과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보인다. 거리를 뒀던 카메라는 조금씩 주인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주인은 골목에 몰려든 사람만큼 몰려든 돈 때문에 밀려나야 하는 현실을 들려준다. 시간만큼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 없다. 세탁소 부부는 23년의 시간만큼 그 공간의 주인이다. 증명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그러하다. <어쩌면 더 아름다웠을>은 카메라와 주인공의 거리와 시간으로 평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본주의 질서 속 평등은 단조로워 폭력적이다. 화면 속 ‘거리’와 화면 밖 ‘거리’로 다른 상상을 해 봐도 좋겠다. 세 작품 덕분에 평등에 대해 다른 상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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