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피의 연대기
김보람, 2017
“생리는 여성의 미덕을 강화한다. 구약 잠언에서도 생리하는 여성을 “그녀는 강인함과 위엄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 씨씨 존스 데이비스 가수, 액티비스트.
피를 흘리는 행위는 대부분 끔찍한 것들로부터 비롯된다. 특히 영화에 나오는 피의 재현은 더더욱 그러하다. 갱스터 영화의 피 튀기는 총격전, 연쇄살인마의 창고에 널려 있는 피 칠갑의 시신들, 전쟁이 지나간 후 길목 마다 흘러 넘치는 군인들의 피 등. 그러나 <피의 연대기>는 그동안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적어도 국내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피를 흘리는 행위,’ 즉 생리에 관한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러닝 타임 73분 동안 인종과 세대 그리고 계급을 초월하는 그녀들의 유쾌하고 고귀한 피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는 한 할머니(여경주, 감독 김보람의 외할머니)가 천 생리대를 만들고 있는 장면을 필두로 그녀의 딸들, 즉 감독의 어머니와 이모들이 각자의 ‘피의 역사’를 나누는 것으로 전개된다. 과거의 여성들은 어떻게 생리대를 만들어 썼는지, 그녀들에게 생리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였는지. 그들의 고백은 저 멀리 네덜란드 젊은이들의 저녁 테이블로 이어진다. 국적이 다른 남녀가 그들의 피 흘리는 경험에 대해, 혹은 그것에 대한 환상에 대해 유쾌한 갑론을박을 교환한다.
<피의 연대기>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다. 한 고등학교 소녀가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담요 위에 앉아 일주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목도하고 나면 뉴욕 주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생리대가 공공장소에서 무상공급 될 것이라는 발표가 이어진다. 영화가 생리의 행위를 사적인 영역(private sphere)에서 공적인 영역(public sphere)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영화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의도로 보인다. 즉, <피의 연대기>는 여성들의 인터뷰들과 각 나라, 혹은 기관에서 진행되는 생리 관련 법안 및 정책을 통해 ‘생리’라는 행위가 더 이상 화장실에 종속되어야 하는 은밀한 행위가 아닌, 사회적 자장 안에서 지지되고 존중받아야 할 권리라는 과제를 제시한다.
영화가 이루어내는 가장 큰 성취는 여성들이 생리에 관하여 얼마나 많은 선택으로부터 배제됐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영화 속에서 소개되는 ‘생리컵 (의료용 실리콘 소재의 물체로, 인체에 삽입해 생리혈을 받아낼 수 있는 생리대 대안 제품)’ 의 출현뿐 만은 아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생리컵의 “참신함”이 강조된다는 것이 영화가 드러내는 약점이기도 하나, 다른 맥락에서 이는 곧 여성의 선택권에 대한 이슈화이자 논의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여성은 ‘생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선택들과 혹은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자체의 원론적 선택까지 먼저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가 포함하는 이 모든 정치, 사회적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피의 연대기>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즐겁다. 영화의 각 시퀀스들을 맺고 있는 오색찬란한 애니메이션은 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영화적(映畵的) 성취가 아닌가 싶다. 또한 감독 포함 모든 스태프들이 여성이고 출연자들의 상당수가 김보람 감독 본인의 가족이나 측근들로 구성된다. 본인들의 이야기인 만큼, 인터뷰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각자의 ‘피의 역사’와 생식기에 대한 이야기 등 다소 민망한 화제들을 환희와 공감이 넘치는 연대적 주제로 환기한다. 앞서 언급한 데이비스의 인용문처럼, <피의 연대기>에서는 세대를 걸쳐 가려져 온 옷이 강인함과 위엄의 갑옷으로 빛난다. <피의 연대기>는 연대(年代)의 이야기이자 사회 구성원 모두의 연대(連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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