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상상극장
[시나리오상상극장]나
박노식, 1971
언젠가 박노식의 사라진 영화를 한 편 정도 다룰 생각이었다. 그래서 고른 영화가 그의 두 번째 감독 작인 <나>인데, 물론 사라진 영화이니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은 윤삼육의 각본뿐이다. 윤삼육은 이전에도 박노식 주연의 액션물 몇 편의 각본을 썼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살짝 미친 것 같은 박노식 액션 영화의 틀 안에서 그의 역할 얼마나 컸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의 도입부는 리처드 스타크의 「헌터 The Hunter」와 비슷하다. 죽은 줄 알았던 사나이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 귀는 좀 먹은 모양이지만 아직 쌩쌩한 그는 오프닝 크레디트가 올라가기도 전에 그의 원수 둘을 해치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복수로 배고프다. 사나이 이름은 동근. 그리고 그가 친절하게 대사 중간에 날짜까지 말해주기 때문에 우린 그 날이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 4일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에게 윤희란 여자친구와 경아라는 동생이 있다는 정보도 이때 나온다.
하여간 동근의 진짜 원수는 강유진이란 남자로 상록원이라는 수목원의 원장이며 거대한 저택을 소유한 부자이고 동근의 여자친구로 소개된 윤희와 살고 있다. 강유진은 막 장애물 달리기 시합을 통해 새 여자 특급비서를 뽑았는데, 그건 오빠의 복수를 꿈꾸고 있던 경아다. 윤희와 경아가 재회하면서 의무적인 과거 회상이 시작된다.
해방 전 세 사람은 당연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동근은 현금 호송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 정도면 당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은 벌써부터 그에게 닥칠 비극을 예언할 수 있을 것이다. 6, 70년대 한국에서 액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소재 중 하나가 일본인들이 남긴 보물이기 때문이다. 강유진 일당은 임신한 윤희를 납치해 동근에게 현금을 빼돌리라고 명령하고 돈을 챙기자 그를 탄광에 생매장한다.

요새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은 동근이 머리를 굴려 치밀하게 강유진을 파멸로 몰고 가는 과정의 쾌감을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6, 70년대 한국 액션 영화들은 그런 치밀함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관심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다. 이런 영화 속 주인공들은 불나방처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영화 속 악당이 끝까지 기고만장한 건 당연한 일이다.
동근이 제대로 된 복수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재앙이 찾아온다. 경아가 오빠의 복수를 하겠다고 강유진의 차에 독을 탔다가 그만 들통이 난 것이다. 경아는 강유진의 부하 도식에게 나쁜 일을 당하고 미쳐버린다.
그러는 동안 동근은 성민이라는 남자를 만나는데 그 역시 강유진에게 복수를 하려 하는 중이다. 둘은 힘을 합치기로 하는데, 안 해도 될 걸 그랬다. 다음 장면에서 성민은 강유진을 죽이려고 덤비다가 시시하게 살해당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그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동근과 미쳐버린 경아와의 재회로 한국 멜로드라마 신파성의 끝을 달린다. 몇십 분 동안 절절하게 이어지는 광기의 장면은 한 번 영화로 직접 봐야 할 거 같은데, 그래도 어땠을지 상상은 간다. 간단하게 요약 정리를 한다면 경아는 오빠를 만난 뒤 잠시 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미쳐서 죽어버린다. 당시 한국 시나리오 작가들은, 아니, 그러니까 대부분 한국 작가들은 ‘나쁜 일을 당한’ 여자들에게 다른 길이 열려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전에 동근과 재회한 윤희는 강유진이 수상별장에서 생일파티를 한다고 알려온다. 동근은 새로 생긴 공범자인 윤 노인이란 사람과 함께 강유진을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릴 계획을 세운다. 그와 동시에 강유진은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는 맹독으로 파티에 온 사람들을 모두 독살하려 하는데 나쁜 놈처럼 보이는 것 이외의 현실적인 동기는 없는 것 같다. 어차피 그 음모는 현실화되지 못하니 조용히 다이너마이트만 장치하고 나오면 될 걸, 동근은 파티장에 떡 하고 나타나 복수자의 허세 가득한 연설을 늘어놓는다. 동근과 강유진 일당과의 전투가 벌어지고 막판엔 두 사람의 칼싸움이 벌어지는데 동근은 계속 찔리기만 한다. 그러다가 동근은 강유진에게 한 방을 먹인 뒤 물에 뛰어들고 윤 노인은 스위치를 재껴 수상별장을 폭파한다. 불쌍한 부하들은 어차피 다 죽을 팔자였나 보다.

인물관계도
폭발의 충격으로 청각이 돌아온 동근에게 끔찍한 일이 닥친다. 알고 봤더니 윤희는 강유진과 한패로 일부러 동근을 유혹했고 강유진도 죽여 재산을 독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어차피 동근은 강유진의 재산과 아무 상관 없는데 굳이 왜 죽이려 하는지 몰라도 윤희는 앞에선 목소리만 나왔던 난쟁이 살인마에게 살인을 지시한다. 영화로 보면 꽤 그로테스크한 장면일 텐데, 결과만 말한다면 난쟁이 살인마는 동근에게 죽고 윤희도 죽는다. 동근 역시 경찰서 앞까지 차를 몰고 가서 자수를 하고 죽는다.
이게 뭐냐고. 그러게 말이다. 말이 복수이지 <나>는 영화 한 편 길이의 자학극이다. 하지만 당시에 나온 동아시아 액션물의 상당수가 이랬다. 악당과 싸워 이기는 대신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함 속에서 내파되어 가는 남자들을 구경하면서 당시 동아시아 남성 관객들이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들은 그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제대로 된 복수를 상상하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렸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