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의 시네마테크
[2주의시네마테크]화룡음정: 클래식과 영화를 위한 이중주 - <밀회> <지옥의 묵시록>
데이빗 린, 1945
2015년 ‘화룡음정 1: 데이빗 보위를 사랑한 영화들’에 이어 다시 한 번 ‘화룡음정’ 기획이 찾아왔다. 시네마테크의 다양한 기획 중에서도 이런 유형의 기획을 특히 반기는 편이다. 특정 감독이나 사조, 시대를 중심으로 한 기획이 은연중에 관객에게 학습과 존경을 요구한다면, 두루뭉술한 주제로 느슨히 묶인 잡다한 영화들의 모음은 소풍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찾아 성격이 완전히 다른 영화들의 관계를 나름대로 재배치해보는 (재)발견과 모험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의 영화를 모으느라 수급에 어려움이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만 제외한다면 프로그래밍하는 입장에서도 이쪽이 조금 더 흥겹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데, 영상자료원의 프로그래머님들께서는 어떠실지.
우선 언급하고 싶은 영화는 데이빗 린 감독의 <밀회>다. 1년 전이었다면 이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만든 데이빗 린’과 ‘극작가 겸 연출가 겸 작곡가 겸 배우 겸 가수 노엘 코워드’를 내세우며 ‘추억의 명화’ 운운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캐롤>이 나왔기 때문이지! 연말연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토드 헤인즈 감독의 정통파 로맨스 영화에 영감을 준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밀회>임은 <캐롤>의 팬이라면 다들 아실 테다. 모르셨다면 <캐롤>과 <밀회>의 결정적인 한 대목을 비교한 이 영상(클라이맥스이니 조심! : Carol X Brief Encounter)을 보시는 것도 좋겠고. 불타는 열정에 휘말리면서도 차마 눈멀지는 못하여 스쳐 지나가는 두 남녀의 ‘짧은 조우’를 시선과 몸짓과 공간으로 세밀하고 은근하게 포착해내는 연출을 보노라면 헤인즈가 무엇을 배우고자 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한국 관객을 위한 한 가지 팁. <밀회>는 주인공 로라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서사를 이끌고 가는 영화인데, 이 내레이션을 ‘읽는’ 데에 너무 몰두하지 않는 편이 좋다. 한국어 자막으로 <밀회>를 보고 있노라면 영상과 소리가 충분히 전달하고 있는 바를 내레이션이 굳이 언어로 풀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실제로 내레이션이 다소 거추장스러운 대목도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소리’라는 청각 기호로 들어야 할 내레이션을 ‘문자’라는 시각 기호로 읽어야 하는 외국인 관객의 관람 조건 때문이다. 로라의 내레이션은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새겨 읽기보다는 열망과 좌절에 휩싸여 끝없이 내뱉는 비탄의 한숨처럼 어조를 따라가며 흘려들을 때 더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특히 로라의 내레이션이 나올 때는 자막은 잽싸게 한 번 훑기만 하고 눈과 귀를 한껏 열어두는 편을 권하고 싶다.
참, <밀회>는 한국영상자료원 기관지 「영화천국」 48호에 영화평론가, 감독 정성일이 쓴 시네필 입문을 위한 100편의 영화에도 들어있다. 해당 목록을 지워나가기로 맹세하신 분들은 놓치지 마시길.

<대부>를 만들었던 사나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창작력을 소진시키고 만 괴물 같은 역작 <지옥의 묵시록>을 소개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일까? 하지만 이번 상영이 의외로 드문 기회라는 걸 강조해야만 하겠다. 2001년 코폴라가 극장판에다 49분을 추가하여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라는 감독판을 만든 이래, 한국의 여러 시네마테크나 재개봉 행사에서는 <지옥의 묵시록>을 상영할 때마다 줄곧 <리덕스>만을 상영해 왔다. 그놈의 감독판이라는 환상. 감독판에 더러 재미있는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기나긴 추가 장면들은 너무 ‘의미심장’하고 지지부진하여 영화의 리듬과 톤을 망친다. 무엇보다도 영화 속의 전쟁을 지나치게 베트남전으로만 구체화하면서 섣부른 자아비판에 빠져든 탓에 도리어 의미가 축소되고 만다. 단언컨대 <지옥의 묵시록>은 202분짜리 베트남전 비판 영화일 때보다는 혼란스럽고 광기 어린 153분짜리 부조리극일 때가 훨씬 더 크고 풍성하고 재미있다. 저 유명한 ‘발퀴레의 기행’ 장면 외에도 과연 내가 관객으로서 이런 막돼먹은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 옳은 일일까 자문케 하는, 어안이 벙벙하고 불편하면서도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매혹적인 스펙터클이 시종일관 펼쳐진다. 물론 그 스펙터클을 마냥 소비하는 영화가 아니라 매혹과 공포 속에 함께 방황하기를 청하는 영화이고. 혹시 이 기회에 문학적 교양까지 챙기고 싶으시다면 비공식적인 원작인 조셉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도 챙겨두시길.
아아, 이 밖에도 위대한 소설가 스티븐 킹의 그에 못지않게 빼어난 소설가 아들 조 힐이 디즈니 사상 최고 걸작 <판타지아>에 바친 오마주랄지,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로만 너무 유명하지 않나 싶어 아쉬운 루이 말 감독의 우울한 걸작 <도깨비불>이랄지, 구스타프 레온하르트가 바흐로 출연하여 실제 바흐가 활동했던 공간에서 고(古)악기로 바흐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클래식 애호가들의 가슴을 뛰게 할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랄지, 우디 앨런이 만든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매정한 스릴러 <매치 포인트> 등등 수다 떨고 싶은 작품이 많으나 이미 쓰기로 한 지면을 넘어서고 말았으니, 귀 밝은 관객 여러분들께서 직접 영화와 조우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엮어주시기를 바라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