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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의시네마테크]영화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① - <인간 사냥> <팻 시티>

프리츠 랑, 1941

[2주의시네마테크]영화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① - <인간 사냥> <팻 시티> 대표 이미지

5월 20일부터 시작하는 ‘영화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매년 이 무렵 시네마테크KOFA에서 진행하던 ‘발굴, 복원 그리고 초기영화로의 초대’에 파주보존센터 개관을 축하하는 의미를 더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이 늘 고전 영화를 다시 소개하는 성격이 있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지난 3월에 발간된 「영화천국」 48호의 시네필 안내서 특집과도 연계하고자 했던 것인지 유독 영화사에 위명 쟁쟁한 정전들이 즐비하다. 평소 아는 척했으나 실은 보지 않았던 작품이라면 이참에 챙겨보시기를, 또 이미 다른 경로를 통해 봤던 작품도 극장에서 복원판으로 볼 때 감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새삼 강조하오며,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명성이 덜하여 관객이 적을까 마음 초조한 두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화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① - <인간 사냥> <팻 시티>

미국이 중립을 선언하며 참전을 망설이던 2차 세계대전 초. 할리우드로 건너온 유럽 망명객 영화인들은 영화를 통해 유럽 상황의 심각함을 알리고 미국의 참전을 고취하고자 한다. 독일인 프리츠 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그는 독일을 떠나기 전 괴벨스에게서 독일 영화계의 총통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일화를 즐겨 말하기까지 했던 터라 자신이 나치에 반대함을 강조할 필요도 있었다. 그리하여 랑이 1941년에서 1946년까지 만든 네 편의 반(反) 나치 스릴러 중 첫 작품이 바로 히틀러 암살 미수를 소재로 한 <인간 사냥>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표면상의 의도가 아니라 실제 영화의 구성과 태도다. 랑은 무성영화 시절부터 줄곧 사건의 발단이 된 인물의 동기나 감정보다 운명/사건을 일으키는 물리적 구조에 집중했다. 구조 안에서 개인은 한 결절에 불과하다. 상황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던 주체도 정보의 방향이 바뀌면 자기가 사용하던 장치의 객체가 되고 만다. 이 주제는 랑의 수많은 영화에서 반복되는데, <인간 사냥>도 예외는 아니다. 이를 위해 랑은 주인공의 동기 속에 변명하기 어려운 결함을 심어놓는다. 물론 히틀러 암살은 인제 와서 새삼 대담한 소재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쟁 발발 전의 암살 시도라면 어떨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전운을 예감하고 히틀러를 암살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인간 사냥>의 주인공이 지닌 이 결함은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그가 애초에 암살을 의도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위선적인 언어와 모호한 의도를 걷어내고 행위만 남자, 암살미수자와 그를 사로잡은 나치 장교는 놀랄 만큼 닮은꼴로 보인다. 랑은 둘의 껍질을 차근차근 걷어내어 기어이 원시상태로 발가벗겨놓고 마주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인간 사냥>은 정말 반 나치 선전 스릴러인가?
 
영화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① - <인간 사냥> <팻 시티>

영화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① - <인간 사냥> <팻 시티>

‘권투 영화? 난 관심 없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잠시만 참아주시길. <팻 시티>는 어쩌면 그런 분들을 위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설정은 매우 간단하다. 전직 권투선수인 빌리는 복귀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오랜만에 체육관을 찾는다. 그는 거기에서 권투를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는 청년 어니를 만나고, 그에게 재능이 있으니 선수가 되라고 권유한다. 자, 이 설정에서 예상함 직한 모든 일이 <팻 시티>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격렬한 상승과 몰락, 우정과 질투의 드라마는 없다. <록키> 같은 무명 선수의 인간 승리도, <성난 황소> 같은 자기 증명과 파멸과 속죄도 없다. 이것은 인생이 걸린 건곤일척의 승부를 다룬 스포츠 영화가 아니라 너무 이른 나이에 이미 좌절에 익숙해진 인생에 관한 영화다. 빌리와 어니는 작고 즉흥적인 소망에 기대어 행동하며, 또 소망이 스러져도 발광하지 않은 채 다음날을 살아간다. 놀라운 것은 그들에게 자기 연민이나 좌절, 남 탓하기, 방향 잃은 분노조차 없다는 것이다. 거울 보며 자기 다짐하는 대목조차 없을 정도로 자의식과 거리가 먼 그 소탈함에는 인간다운 예의와 긍지가 어려 있다.

혹은 이런 식으로 말해보자. 충동적으로 술에 의지하고, 자주 패배를 맛보고, 이룬 것 없이 나이를 먹어가고,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미래에 대한 비전도 보이지 않는 남자 권투선수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술집에서 역시 이룬 것도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이 중증의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여자와 만나 동거하게 된다. 하루는 남자가 없는 사이 여자의 옛 애인이 집에 들렀다 가고, 이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식사 시간에 다툰다. 남자는 피곤하고, 여자는 술이 깨지 않은 상태다. 남자는 다툼 끝에 결국 집을 나간다.

두 사람이 다투는 장면 내내, 남자는 단 한 번도 여자를 때리거나, 때리려고 손을 치켜들거나, 성질을 못 이겨 집기를 던지고 부수거나, 소리를 질러 상대의 말을 막거나, 욕설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fuck”은 말할 것도 없고 “damn”조차 없다. 이것이 이런 설정의 영화에서 얼마나 보기 드문 결단인지 생각해 주시길. <팻 시티>에 등장하는 모두는 망가져 있으며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는 존중할 만한 인간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영화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상영작 중 이보다 더 고귀한 영화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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