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의 시네마테크
[2주의시네마테크]그림자들의 함성, 페드로 코스타 - <반다의 방> <행진하는 청춘>
페드로 코스타, 2000
페드로 코스타 감독은 영화 문법이나 장르 관습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세계를 짓는 방식에는 흐트러짐이 없이 엄격하다. 여느 극영화들처럼 유려한 서사를 펼치지도 않고 많은 다큐영화들처럼 한껏 사건을 고발하지도 않으며, 그 둘의 경계 어디쯤에 선 그의 영화는 거기에 더해 인공조명 없이 어두운 화면과 독백에 가까운 대사들과 함께 정보를 한정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역설적으로 리스본 폰타이냐스 지역 빈민가의 이야기를 매우 치열하고 가깝게 전하고 있으니 보다가 문득 미스터리를 느낄 지경이다.
<반다의 방>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반다의 방은 상당히 견고하다. 아무도 그 방을 건드리지 못할 것만 같다. 끊임없이 집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도 반다는 마약과 기침과 대화를 멈추지 않으며 그 견고한 방은 마치 중력을 가진 것처럼 우리를 폰타이냐스에 지속되는 삶으로 이끈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반다의 방이 놀랍게도 우리가 어떤 사회적 삶을 대하는 시선을 바꾸도록 요구한다. 반다의 방 이미지는 그 자체로 빈민가의 역사와 조건을 향해 열리지만 그 삶은 동정이나 사회보호대상으로 어쭙잖게 설명되기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반다와 그 이웃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종류의 감상을 향하지도 않고 말이다.
영화는 관습적 독해의 매개를 떼어내고 도달하는 하나하나의 이미지를 다시 관습적 문법에 기대지 않고 이어 붙여 우리로 하여금 도시 빈민과 그 주체 문제에 있어 해석에 앞선 실질과 마주하도록 한다. 기승전결 육하원칙에 의거한 서사나 정보를 전하지 않는 상태로 우리를 꼭 붙들고 놔주지 않는 이미지가, 나의 감정과 관념을 방해하여 삶의 형태 자체로서 리스본 폰타이냐스 빈민가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행진하는 청춘>에서는 주인공 벤투라가 여기저기 출몰하면서 삶에 강제된 역사를 그린다. 벤투라는 그의 이웃들, 즉 공공 지원 주택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나 반쯤 무너진 이전 빈민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아들과 딸의 이름으로 소환한다. <반다의 방>에서 반다의 방이 가진 중력처럼 이번에는 벤투라가 출몰하며 만드는 자장이 폰타이냐스 빈민가의 궤적을 인지하도록 열린다. 그중 벤투라와 렌토가 반복하는 일종의 세레나데는 점점 더 무수한 바람과 좌절을 기억하는데, 벤투라의 무표정한 얼굴과 읊조림을 통해 그것은 낭만이나 환상이 아니라 너무나 실질적인 소망이어서 아프고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된다.
문제는 실로 도시정책이나 복지를 넘어선다. 고향을 두고 온 이민자나 불안정한 도시 빈민의 삶에 있어 집이란 여기나 저기나 불가능하다. 그들은 그거 물리적인 주거지 차원을 넘어선 의미에서 어떤 본질로서의 집 있는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로딜데의 탈출, 렌토와 벤투라의 편지 낭독, 이주한 새 반다의 방에 함께 머무는 반다의 딸과 벤투라의 모습 등등 매 장면이 매우 정제되어 있는 만큼 영화는 그들이 꿈꾸는 관계(의 집)에 열중한다.
두 영화에서 집은 중심적인 소재인데, 그들이 기거하는 집의 가난은 물질적인 것을 넘어 그들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는 어떤 공백이다. 그 공백 전체에 집 없는 자들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다. 반다의 방과 벤투라의 출몰이 어떤 쉬운 해석이나 감상의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불가지론을 향해 있는 것은 아니다. 페드로 코스타 영화는 리스본 폰타이냐스 빈민가의 공백, 그 가난을 관조하거나 대상화하기를 넘어서 영화적 경험이 그 삶에 좀 더 직접적으로 맞닿을 수 있도록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두 영화 모두 마지막 반다의 방 장면에서 정작 반다는 일하러 나가버린다. 거기에는 반다의 여동생과 이웃 또는 딸과 이웃만이 남아 있다. 반다는 없어도 가족과 폰타이냐스가 한 방에 머무는 한 그곳은 여전히 반다의 방이자 빈민공동체의 희로애락을 지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