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자단의 전성기는 뒤늦게 찾아왔다. 이연걸과 동년배이고, 유덕화나 양조위, 주성치보다 한두 살 정도 어린 편이니, 그들이 90년대 초부터 정상에 있었던 걸 감안해보면 그가 지금의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데뷔가 늦었던 건 아니다. 원화평 눈에 띄어 1984년 <소태극>으로 데뷔한 그는 <
특경도룡>이나 <
철마류>같은 자신만의 인지도를 쌓은 작품도 만났다. 조연이든 악역이든 마다하지 않고 출연했으며, <
황비홍 2>에서 이연걸과 마지막 액션을 장식한 것도, <
신용문객잔>의 카리스마 넘치는 악당도 바로 그였다. 무도가 집안에서 태어나 정통 무예를 익힌 배우 출신답게 자연스레 여러 격투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
노호광>, <
영춘권>의 무술감독은 물론 <
전랑전설>에선 감독 데뷔에, <
블레이드 2>, <
상하이 나이츠> 등으로 할리우드까지 진출해 착실히 자신만의 경력을 쌓아나갔다. 대중에게 그렇게 조금씩 친숙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갔을 무렵 바야흐로 시대가 변했다. 성룡과 홍금보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고, 이연걸 또한 액션보단 연기를 원했다. 지금도 쌩쌩하니 주먹과 발차기를 현란하게 구사하며 몸을 아끼지 않고 마샬아트를 시연할 배우는 견자단 말고 없었다. 그의 전성기는 그렇게 도래했다.

견자단
그 중 엽위신 감독과 함께한 2000년대 중후반 일련의 액션영화들은 전설의 핵심이었다. <
살파랑>과 <
용호문>, <
도화선> 삼부작은 견자단을 정점에 올려놓은 작품들로 스피디하고 강렬한 액션과 화려한 연출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다양한 격투기의 향연에, 뛰어난 아이디어가 결합된 이 무술백화점 같은 영화들은 단순하지만 폭발적이었고, 견자단 스타일의 완성을 만천하에 공인시켰다. 더욱 강하고 더없이 빠른 영화가 이어질 거라 예상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차기작은 조금 다른 선택이었다. 실존 인물 ‘엽문’에 관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춘권의 대가이자 이소룡의 스승이기도 했던 엽문은 생애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이미 왕가위와 양조위가 <
일대종사>라는 같은 ‘엽문’ 영화를 준비 중에 있었다.(결국 이 작품은 세 편의 엽문 영화가 나오고 나서야 개봉되었다!) 하지만 엽위신과 견자단은 그 도전과 모험을 기꺼이 감수했고, 홍콩 박스오피스와 금상장영화제을 뒤흔든 <
엽문>은 그들의 가장 성공한 영화이자 대표작이 되었다. 스피디하고 파워풀한 액션은 여전하지만 기존의 공격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의 ‘열혈’ 견자단 대신, 방어적이고 내면적인 ‘고수’ 견자단의 품격이 묻어난 작품이었다. 그 품격을 더욱 고양시키는 건 바로 웅장하고 숭고한 음악의 몫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중화민족의 색채가 강하게 묻어난 선율을 매만진 건 일본인 작곡가 카와이 켄지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이 ‘귀여운’ 이름의 작곡가 카와이 켄지는 오시이 마모루의 음악적 파트너로도 더 잘 알려져 있는데, 1957년 동경 태생으로 토카이 대학 원자력 공학부에 다니다 마즈다 대학 사운드 페스티벌에서 우승한 걸 계기로 미련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전업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밴드활동 및 CM 음악을 담당하다 유명 성우이자 배우인 마츠야 유지의 연극 음악을 맡게 된 걸 계기로 각종 사운드트랙에 참여하게 된다. 초기에 맡은 애니메이션 <메존일각>의 놀라운 성공과 <붉은 안경>으로 인연을 맺게 된 오시이 마모루와의 협업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후 <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모든 시리즈와 <란마 1/2>, <무책임함장 테일러>, <
공각기동대> 등 90년대 히트작 애니메이션 음악들을 담당하며 정상의 자리에 올라섰다. 이와 동시에 세기말 나카다 히데오와 손을 잡은
<링>의 폭발적인 히트로 상업영화로 분야를 넓혔으며, 2005년엔
임필성 감독의 <
남극일기>를 필두로 중국의 <
묵공>, 프랑스의 TV다큐 <아포칼립스, 제 2차 세계대전> 등의 음악을 맡아 무대를 세계로 확장했다. 카와이 켄지의 장점이라면 매체나 장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다각적으로 시도하고 모험하는 확장성과 놀라울 정도의 꾸준한 생산력인데, 애니, 게임, TV, 영화, 다큐멘터리, 대중음악은 물론 호러, 드라마, 코미디, SF와 판타지, 시대극에 이르기까지 편식 없이 모든 스타일을 구사할 수 있는 그의 사운드에서 사실 한계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시간과 조건만 맞으면 어떤 작품이라도 한다는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아티스트란 생각을 배제한 채 자신의 음악관을 고수하기보단 철저히 감독이 요구하는 대로 작업한다는 방식이 오히려 카와이 켄지만의 고유 스타일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다.
카와이 켄지와 그의 작품들
<엽문>은 그의 프로의식과 실력을 유감없이 접할 수 있는 사운드트랙으로, 이미 <용호문>에서 한번 호흡을 맞췄던 엽위신, 견자단 콤비와 함께 박진감 넘치는 액션 스코어의 진수를 선사한다. 빠르고 강력한 타격기를 갖춘 견자단의 액션 스타일에 맞춰 카와이 켄지는 약동하는 퍼커션을 전면에 배치해 청각적인 액션 쾌감을 노리고 있는데, 거기에 한번 들으면 쉽게 잊을 수 없는 탁월한 테마(‘一代宗师 Maestro’)를 얹어 듣는 순간 영화의 숙명적인 분위기를 짐작케 만든다. 만화를 원작으로 삼아 국적불명의 판타지스러웠던 <용호문>이 기존에 카와이 켄지가 작업했던 여타 유수의 일본 아니메 사운드트랙들을 떠올리게 했다면, 얼후와 코러스를 사용해 예의 멋스러운 중국색이 강하게 묻어나는 <엽문>의 스코어는 고전적이고, 위엄에 가득 차있다. 특히나 엽문이 구사하는 영춘권 자체가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권법인 만큼 부드럽고 우아한 품격이 느껴져야 하는데, 카와이 켄지는 얼후의 나긋나긋한 음색과 강렬한 타악의 대비로 부드러움과 강함을 동시에 잡았다. 거기에 밑받침되는 두터운 보이스와 스트링의 조화는 휴머니즘을 극대화시키는데, 액션 스코어가 놓치기 쉬운 감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 이전에 <란마 1/2>을 작업하며 의도적인(다분히 희극적인) 중화풍의 컨벤셔널한 사운드를 들려준 바 있지만, <엽문>에선 전통적인 색채에 집착하지 않고 일렉트릭 사운드를 병행하며 상처 입은 시대상의 암울한 분위기를 엄숙하고 장중하게 담아낸다. 전체적으로 곡들은 그리 길지 않다. 1분 미만의 짧은 큐도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이를 꼼꼼히 영화의 순서대로 30트랙에 걸쳐 모두 담아낸 <엽문> 사운드트랙은 그야말로 완벽하다. 보통은 빠질법한 예고편용으로 작곡된 음악까지 맨 마지막 트랙에 포함돼있다. 아쉬운 건 홍콩 워너에서 발매된 이 앨범이 너무나도 빠르게 절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호쾌하고 장렬한 사운드의 쾌감은 이전의 <용호문>에 비해 덜 할 수 있지만, 심장 박동처럼 시종일관 두근거리는 퍼커션과 일본점령하의 불안하고 참담한 기운을 간직한 스트링, 불길하고 비애감 넘치는 신디가 직조해내는 선율의 깊은 울림은 기존의 단순하고 명료한 액션 스코어와는 차별화된 질감을 가지고 있다. 료사부의 죽음에 열 받아 무도장에서 엽문이 일본군을 상대로 1:10의 싸움을 벌일 때 흐르던 ‘死而後已 Dic For It’나 마지막 일본인 장교 미우라와 대결하던 장면에 깔린 대곡 ‘仁义之战 Battle For Righteousness’이 그렇다. 개인으로선 누구보다 강하지만 총과 군대를 가진 국가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고수의 암담한 심정을 오롯이 토해내는 건 카와이 켄지의 이 두근거리는, 두 주먹 불끈 쥐게 만드는 음악 덕분이다. 이미 수많은 아니메와 영화에서 갈고닦은 실력으로 액션 큐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운드를 선사하는 장인답게 그는 액션에 감성을 실었고, 능숙하게 퍼커션의 강약과 속도를 조율하며 극의 흐름을 고조시킨다. 딱히 장면에 맞춘 미키마우징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솜씨가 놀랍다.

마지막 결투
카와이 켄지는 2010년 엽위신과 견자단이 다시 한 번 뭉친 <
엽문 2>에서도 여전히 음악을 맡아 속편의 법칙에 충실하게 더 빨라지고 더 강력하며 더욱 애잔하고 장엄한 스코어를 만들어냈다. 여전히 그 중심에는 ‘一代宗师 Maestro’ 테마가 자리 잡아 심금을 울린다. 마치 어느 인터뷰에서 예술가보단 장인이 되고 싶다고 밝힌 카와이 켄지 자신에게 바치는 사운드트랙 같기도 하다.
Track List
01. 一代宗师 Maestro
02. 融乐 Harmony
03. 切磋 Wanna To Fight
04. 嚣 Arrogance
05. 傲 Insolence
06. 泰然自若 Take Thing Easy
07. 悲城 City Of Sadness
08. 惘然 At A Loss
09. 徒然 In Vain
10. 腐 Decayed
11. 困 Stuck In A Moment
12. 代价 Pay For It
13. 战 Fight
14. 死而後已 Dic For It
15. 叶问 Ip Man
16. 涅盘 "Nirvana"
17. 亡命之徒 Desperado
18. 小念头 "Siu Lim Tau"
19. 纠缠 Entanglement
20. 无惧 Fearless
21. 赴汤蹈火 Going Under
22. 本觉 "Rigpa"
23. 危境 In Danger
24. 沉 Sinking
25. 剑拔弩张 Ready To Fight
26. 仁义之战 Battle For Righteousness
27. 岁月 Remembrance
28. 断 "Harakiri"
29. 圆 Completion
30. 一代宗师—贰 Maestro II
31. 预告 The Trai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