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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비디오모험기]아무도 없었던 여름

정인엽, 1974

[한국영화비디오모험기]아무도 없었던 여름 대표 이미지

정인엽 감독이 있었다. 그는 80년대 대표적인 흥행감독중의 한명으로 통했다. 또한 에로티시즘 영화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바로 우리 모두의 뇌리에 가장 야한 영화로 두고두고 기억되고 있는 <애마부인>을 탄생시킨 바로 그 감독이다. 그렇다고 추운 겨울 애마부인을 감상하며 몸을 뜨겁게 덥힐 생각은 마시라. 그녀는 愛馬부인이 아닌 愛麻부인이기 때문이다. 더 추워질 뿐이다. 어쨌거나 정인엽 감독은 80년대 내내 애마와 함께 건재했다. 그리고 90년대가 시작되면서 X세대라 불렸던 관객들의 새로운 감각을 따라잡지 못하고 한국영화계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정인엽 감독은 1965년 감독으로 데뷔했다. 작품성 있는 영화보다는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 할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다. 불세출의 트로이카였던 문희, 윤정희, 남정임의 공연을 처음으로 성사시켜 화제를 뿌린 <결혼교실>을 만든 사람이 바로 그다. 하이틴 영화가 인기를 얻자 발빠르게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를 만든다. 호스티스 영화가 붐을 이루자 <꽃순이를 아시나요>를 만든다. 이렇듯 그때그때의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영화를 만드는 정인엽 감독이 70년대 당시의 청년문화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1974년에 발표한 <명동에서 첫사랑을>과 <아무도 없었던 여름>은 바로 당대 젊은이들의 풍속도와 감각을 수용한 영화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아무도 없었던 여름>은 감각적인 화면을 만들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다소 퇴행적인 주제가 영화의 장점을 가리고 있어 아쉬운 작품이기도 하다.

부잣집 딸 유미(고은님)는 돈만 밝히는 아버지를 거부하며 반항적으로 살고 있다. 다방DJ인 동석(정인하)은 유미의 돈을 노리고 그녀와 동거하고 있다. 문득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 유미는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린다. 그녀를 찾아 나선 동석은 인천 송도 바닷가로 가는 버스에서 스케치 여행을 가는 미대생 진숙(나하영)을 만난다. 바닷가에서 진숙은 동석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는 동안 유미는 원양어선을 타는 건장한 뱃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동석을 찾아온 유미. 동석은 아무 말 없이 유미와 함께 떠난다. 진숙은 하룻밤 사랑의 상처만 안고 백사장에 홀로 남는다.
 

<아무도 없었던 여름>의 주인공들은 지나치리만큼 자신들의 감정에 충실하고 행동은 충동적이다. 그들에게선 한국영화 특유의 신파라고 할 감정의 과잉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쳇말로 쿨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인엽 감독은 자신이 만든 주인공에게 애정이 없다. 아마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당시의 젊은이들의 모습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보니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공허하고 속이 비어있다. 즉 미성숙한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의 불균질적인 면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홍동혁 기사의 촬영은 유려한 화면을 만든다. 정인엽 감독은 영상을 통해 순결이라는 강박관념에 얽매여 있지 않고 섹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젊고 매력적인 인물을 창조한다. 사운드의 사용에도 모험을 해본다. 더불어 상당한 수위의 노출을 과감하게 감행한다. 이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져 꽤 감각적인 영상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영화의 주제와 감독의 세계관이 영화의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젊은이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상정하고 있다 보니 청춘영화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방황과 고민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다. 대신 아버지로 상징되는 기성세대의 노고를 인정하라는 강요만 지나치게 난무한다. 고민하는 유미에게 난데없이 나타나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뱃사람들의 모습은 원양어선을 타고 돈 벌러 나갔던 노동하는 아버지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신동헌 화백의 그림으로 유명했던 옛날 소주광고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면들은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는 중요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몰입을 방해한다. 아무래도 그 장면이 아버지 세대가 지독한 노동으로 일궈놓은 풍요에 기생하는 젊음이라는 잔소리를 하고 있는 장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유미는 뱃사람들과의 만남 이후 완강하게 거부하던 아버지를 갑자기 인정해 버린다. 그리고 동석과 함께 떠나버린다. 왜 진숙만 바닷가에 홀로 남아야 하는가? 감독이 너무 차갑게 진숙을 내다버리기 때문에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는 결말부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유미는 아버지를 인정함으로서 아버지의 질서를 내면화하기로 한다. 그리고 유미의 다음 임무는 그 질서를 이어받을 남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바로 순응하며 노동하는 남자. 그러므로 동석이 진숙이 아닌 유미를 택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또한 그것이 정인엽 감독이 이 영화에서 바라는 단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숙은 당시의 젊은이일 뿐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녀의 배경에 대해 어떤 설명도 들을 수 없다. 결국 그녀는 무존재 그 자체다. 정인엽 감독이 바라보는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1970년대의 청년은 결국 이런 아버지세대의 노동이 만든 풍요를 갉아먹는 세대일 뿐이다. 결국 기존 질서의 내면화를 거부하는 그들의 존재의의는 가차 없이 거부당한다. 그래서 감독은 진숙을 그렇게 냉정하게 팽개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가장 냉정한 결말이 이 영화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기만이기도 하다..

나하영 진숙
정인하 동석
고은님 유미

감독 정인엽
각본 유동훈, 김원두
촬영 홍동혁

1974년 75분 칼라
판매원 (주)일진프로덕션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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