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판 주말의명화
[신판주말의명화]프릭스 오브 네이처
로비 픽커링, 2015
비디오테이프가 나오기 시작한 1980년대만 해도 볼만한 영화가 많지 않았다. 비디오를 빌려주는 가게에서도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는 메이저영화는 소수였다. 일주일에 서너 편 빌려 보면 고작이었다. 한창 영화에 빠져들었던 시절이라 비디오 가게를 일주일에 서너 번 갔고, 갈 때마다 두세 편은 골랐다. 금방 볼 영화가 떨어졌다. 그러면 전혀 모르는 제목과 비디오 재킷을 곰곰이 살펴보며 어디선가 들어본 감독이나 배우인지 생각했다. 짧은 줄거리를 읽으면서,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지를 상상했다. 그렇게 본 영화들은 주로 B급 영화였다.
원래 B급 영화는 동시에 2, 3편을 개봉하는 극장에서 유명 배우가 나오는 A급 영화에 끼워 파는 영화를 말했다. B급 영화는 SF, 호러, 범죄와 액션 등 소수의 팬이 존재하는 특정 장르를 표방한 영화들이 많았다. 제작비와 시간만 엄수한다면 비교적 자유로운 제작환경이었기에 독특한 영화들이 나올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제작과 배급의 독점이 금지되면서 원래의 B급 영화 제작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제작사들이 만드는 저예산 영화를 흔히 B급영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화사적으로도 B급 영화의 자유로운 정신과 기발한 표현을 평가하게 되었다.
한참 B급 영화들을 빌려볼 때의 성공 확률은 1/3에서 1/4이었다. 감독과 배우의 이름도 낯설고, 선정적인 내용이지만 조잡해 보이는 영화들 중에서 간혹 흥미로운 영화들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유명한 감독이었지만, 그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경우도 있었다. 켄 러셀의 <크라임 오브 패션>이나 조지 로메로의 <데이 오브 더 데드>도 80년대 중반에 비디오로 봤을 때는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몇 년 뒤에야 거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실 이런 영화들은 B급 영화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다. 진짜 B급 영화라고 부를 만한 영화들은 거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다. 감독도, 배우도 누군지 잘 모른다. 하지만 논리도 없고 유치한 상황들이 전개되면서도 기묘한 흥을 자아내는 영화들이 있다. 뒤죽박죽이지만 일관되게 자신의 취향이나 주장을 밀고 나가는 유희정신 같은 게 보인달까.

포스터
로비 픽커링 감독의 <프릭스 오브 네이처>를 포스터만 보고 아무런 정보 없이 선택했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아마도 주인공으로 보이는 고등학생 남녀가 밤길을 마구 달려간다. 아마도 좀비처럼 보이는 무리가 그들을 뒤쫓는다. 남자의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이유는 에이리언 때문이라고. 아니 좀비 영화가 아니라고? 그리고 영화는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딜포드는 햄버거 패티를 만드는 공장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고등학교의 평범한 아침 풍경이 보이는데 뭔가 다르다. 통학버스에서 좀비가 함께 내린다. 옆의 아이를 물어뜯으려 하자 좀비의 목걸이에서 전기충격이 일어난다. 사물함 옆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아이에게는 기다란 송곳니가 있다. 뱀파이어다. 딜포드는 인간과 뱀파이어와 좀비가 공존하는 사회다. 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좀비를 값싼 노동력으로 이용하는 것은 알겠지만 왜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뱀파이어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설정을 정교하게 만들어 관객에게 이해를 시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필요한 설정만 있으면 되니까. 싸구려 B급 영화의 흔한 경우다.
키도 크고 멀끔하게 생긴 대그는 로렐라이에게 푹 빠져 있는데, 로렐라이는 대마초를 맡기고 가끔 들러 피우는 용도로만 대그를 이용한다. 대그가 접근하면 자기는 순결을 지킨다고 말한다. 페트라는 좋아했던 뱀파이어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아 설레지만 그의 목적은 오로지 피였다. 뱀파이어가 된 것을 안 페트라는 절망한다. 공부는 잘하지만 너드인 네드는 학교에서 따돌림받고, 집에서도 외면당하자 자진해서 좀비가 된다. 좀비처럼 사는 것과 좀비가 되는 것, 어차피 뭐가 다를까. 대그와 페트라는 어렸을 때 약간의 악연이 있었고, 대그와 네드는 친구였지만 성장하면서 멀어진 사이다. 이렇게 인간인 대그와 뱀파이어인 페트라와 좀비인 네드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외계인이 침공한다. 그러니까 <프릭스 오브 네이처>를 장르로 말한다면 전통적인 유니버설 호러 영화의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하는 50년대 외계인 침공영화의 현대판이다.

외계인이 침공을 시작하자 인간과 뱀파이어와 좀비의 대립이 격화된다.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 외계인을 불러들였다고 비난한다. 좀비가 된 네드가 이끄는 좀비들도 공격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외계인이 모두를 잡아먹기 시작하자 아수라장이 된다. 대그와 페트라와 네드는 지하실에 숨는다. 대그와 페트라는 사랑에 빠지고, 천재인 네드는 외계인을 공격할 방법을 찾는다. 뇌를 먹지 않는 좀비는 인간의 지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도 뜬금없이 나온다. 외계인이 딜포드의 햄버거 패티가 필요해서 왔다는 사실도 그냥 밝혀진다. 어이없는 이야기 진행이지만 애초에 정확한 논리가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갑자기 거대해지고 영리해진 외계인이 인간에게 교훈을 늘어놓는다. 평화롭게 열심히 잘 살아라.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이 비난을 시작한다. 너나 잘해, 네가 뭔데 설교질이야 등등. 그러자 화가 난 외계인이 다시 공격을 시작한다.
이런 식이다. 어이없는 상황이 난데없이 벌어지고 그걸 발판삼아 다음 상황이 전개된다. 그런데 그런 밑도 끝도 없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제일 재미있다.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뒤죽박죽으로 모든 것을 싸안고 달려가는 것. 앞뒤를 재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 오로지 하나의 말장난이나 액션이 필요해서 만들어지는 장면들. 그야말로 전형적인 B급영화의 장난이고 책임방기다. 알게 뭐냐. 그냥 재미있으니까 이런 장면을 넣어야지.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주로 대화로 진행되는 초반이 황당하면서도 별 재미는 없는 것에 비해 중반을 넘어 액션으로 진행되면 확실히 경쾌하고 즐거워진다. 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순간의 어처구니없음이 순수한 B급 영화의 재미다. <프릭스 오브 네이처>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