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판 주말의명화
[신판주말의명화]5월 1일
주격태, 2015
<시간을 달리는 소녀> <하나와 앨리스> <클래식> <건축학개론>....익히 보아 온 그 무수한 첫사랑의 멜로들을 대입시키고, 떠올린다 해도 좋다. <5월 1일>은 너무도 명백히 그 혐의를 지울 수가 없는 영화다. 그리하여 지레짐작으로 이 영화를 그렇게/진부한/클리셰/덩어리 코너로 제쳐놓고 안 본다면 조금 손해다. 그러기엔 좀 아까운 구석이 많다. <5월 1일>을 제대로 보려면 그래서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 영화는 어떻게 무수한 첫사랑 영화를 ‘제 맘대로’ 마구 가져와서 온전히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냈을까. <5월 1일>은 멋진 주연배우와 촬영, 음악,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교차 편집, 편지와 레코드라는 소품이라는 뻔한 요소가 기념할 만한 멜로의 장면으로 구현되는 작은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영화다.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2세대에 걸친 사랑의 이야기라 헷갈리지 않도록 멜로가 향하는 화살표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작 부분에서 1차 혼돈이 온다. 피아노 연주회에서 연주를 듣다 눈물을 흘리는 여자, 그리고 그 앞에 마찬가지 감상에 빠진 남자, 그리고 그 옆의 여자가 등장한다. 공연이 끝난 후 로비로 나온 여자는 남자를 알아보고 부르려 하지만, 예의 그 여자가 팔짱을 껴서 포기하고 돌아선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교복을 입은 소녀 둘과, 이들을 지켜보는 남학생이 있는 지상철 장면이 나온다. 싱그러운 여름, 짧은 교복 치마. 단짝 친구, 등하굣길에 늘 만나는 남학생. 벚꽃이 푸른 수목으로 바뀐 걸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와 앨리스>의 도입부와 꼭 같아 걸리지만,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공연 장면에 등장했던 남녀의 과거 속으로 온 것 같은 플래시백 장면처럼 연결되지만, 이 소녀는 공연장에서 눈물 흘리던 여자의 딸 바이(정여희)다.
하지만 영화는 이때부터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게 되는데, 현재의 중심축은 바이다. 그녀는 자꾸 관심을 보이고 쫓아오는 숫기 없지만 잘생긴 소년 예쫑수가 싫지 않은 눈치다. 바이의 단짝 친구의 생각은 좀 다르다. 실은 자신도 예쫑수에게 관심이 있으니, 바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예쫑수에게만 잔뜩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바이의 하루도 바쁘다. 친구랑 놀기도 바쁘고, 바람피운 아빠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 상담도 들어줘야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던 중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던 엄마 왕레이(가정문)가 그만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다. 평탄했던 바이의 학창시절도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뇌사상태에 빠진 엄마의 과거. 17살 소녀 왕레이(정여희)의 일상을 소환해 낸다. 교복 치마 길이는 딸 바이의 것보다 길어졌고, 발랄한 바이보다 수줍음도 많고 얌전한 소녀 왕레이. 그녀는 자꾸 못살게 구는 또래 남학생 린커밍(석지전)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다. 경쟁심이 센 린커밍은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도, 자전거 질주에서도 자꾸 자신을 앞지르는 왕레이를 향해 “다음엔 이기게 안 둬”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관심과 사랑을 그렇게 괴롭힘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연애. 린커밍과 왕레이가 펼치는 티격태격하고 풋풋한 과거를 회상하는 건 물론 식물인간이 된 왕레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그녀가 연주회에서 스쳐 지나갔던, 어른이 된 린커밍(임현제)이 본격적으로 등장해 그 과거를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건축설계사가 된 린커밍은 그 사이, 동거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사랑을 믿지 못해 헤어졌으며, 친구와는 나날이 늘어가는 나이에 대한 상념을 늘어놓을 정도로 어른이 돼 버렸다.(이건 또 변명이 불가능할 만큼 너무 <건축학개론>과 닮았다.) 어쨌든 식물인간이 된 여자와 무료하고 허한 중년의 남자를 과거 햇빛 찬란했던 첫사랑의 한때로 착지시켜줄 ‘교통수단’은 여자의 딸 바이다. 엄마의 컴퓨터를 정리하던 소녀는 ‘보내지 않은 이메일’ 함에서 (연주회에서 그녀가 린커밍을 만난 후 쓴) 메일을 발견하고, 엄마 대신 그걸 전달하기로 한다. 마치 자신이 엄마인 냥.(엄마의 사랑을 구제해 주려는 노력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클래식>마저도 연상케 하니, 원 이거 참...) 5월 1일이 <러브 어페어>에서처럼 사고를 당한 날이라거나, 혹은 만나기로, 또 헤어진 날 같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대신 이 날짜는 이들 사랑의 복선이 되는 비지스의 곡 ‘First of May''''에 해답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트리는 내 키보다 컸었고, 다른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는 동안 우리는 사랑에 빠져 있었’던 그 둘 사이의 사랑을 설명해주는 것 같은 가사를 가진 비지스의 곡은 1990년대 초, 타이베이라는 배경과 함께 어우러진다. 그리고 린커밍과 왕레이 사이에서 오가는 레코드판으로 전달되거나, 또 전달되지 않는다.(<러브 레터>와 <건축학개론>의 사이 어디쯤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같은 설정) 어른이 된 린커밍은 갑자기 떠오른 왕레이를 향해 “5월의 공기는 그때와 같아. 사람은 다시 그 자리에 갈 수 있지만, 그때로 다시 갈 수는 없다”라고 읊조리며, 고등학교 때 농구를 하며 뛰어놀던 농구장에 가서 농구를 하고 비를 흠뻑 맞고 돌아온다. 린커밍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는 그때 갑자기 잊고 지냈던 과거와 도킹을 시도한다.
<5월 1일>은 플래시백이 무수히 등장할 뿐 실제 과거로 들어가는 일은 없으니, 명백히 판타지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정신없이 오가는 과거와 현재를 마치 하나의 시간대처럼 이어줄 여러 장치들을 고민해 내고 적용시킨다. 린커밍과 왕레이, 그리고 딸 바이가 전개하는 사랑의 기억과 공유는, 각각의 내레이션과 편지를 읽는 동안 오버랩 되는 음성 등으로 효과적으로 전개된다. 이 복잡한 오감 때문인지, 왕레이와 바이를 연기하는 1인 2역의 배우 때문인지, 관객은 이 과정에서 현재 시점의 17살 소녀 바이와 엄마 왕레이의 17살 시절이 오롯이 겹쳐지는 ‘판타지’에 빠져든다. 세대는 변했지만, 사랑 때문에 감정이 ‘접질러지는’ 지점은 어쩜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을 수가 없다. 린커밍과 왕레이가 비극적 사건에 휘말리고 그 연애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엔 바이가 친구와의 삼각관계로 예쫑수를 오해하고 힘들어한다. 십 대의 첫사랑은 ‘좋아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미숙하고 낯설고 새롭다. 그래서 풋풋하고 좋기도 하지만, 또 그래서 두렵기도 하며, 실패할 경우 방어벽도 너무 낮은 위험한 도전일지니.

그렇게 조심스러운 접근 탓에 첫사랑의 신화는 스크린으로는 도저히 깨지지 않을 무한한 소재다. 자국 대만에서 보자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 시대> 등 대만표 청춘물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된 영화로,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아시아의 성공적인 첫사랑 소재의 영화를 모두 짜깁기한다. 그럼에도 뮤직비디오를 연출해 온 주격태 감독의 영상만큼은 그 중 독보적이다. 뭔가 일일연속극 같은 조악함이 엿보이는 시작 부분의 피아노 연주회 장면만 잘 넘기면 된다. 지상철 밖으로 우거진 푸른 초록, 교복을 입은 소녀들의 발랄한 움직임이 시작부터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아, 이때부터는 절대 정지 버튼을 누르기 힘들다. 도심이지만 초록이 유독 많은 타이베이의 정경과 십대들의 어우러짐은 눈에 담아둘 만큼 아름답다. 막 폭우가 걷히고 난 후, 물웅덩이를 따라 걷던 린커밍이 왕레이에게 마음을 고백하던 순간, 혹은 소년들이 레코드판을 훔쳐내 커버를 벗겨 옥상에 올라가 모두 하늘로 날려버리는 장면은 특히 압도적이다. 90년대지만 우리 기준으로는 더 오래전 과거처럼 보이는 낯선 90년대가 선사하는 정서도 독특하다. 왕레이의 소녀 시절과 딸 바이 1인 2역을 소화한 배우 정여희는 아마 이 영화를 보면 모두가 사랑에 빠질 만큼 매력적이다. (좀 문제적 장면일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된 린커밍이 그래서 순간 바이를 왕레이로 착각하는 장면에서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