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판 주말의명화
[신판주말의명화]사부: 영춘권 마스터
서호봉, 2015
영화를 보기 전, 정보는 전혀 없었다. 감독 서호봉은 낯설었다. <무사: 4대문파와의 혈투>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왜구의 무기>라는 제목으로 영화제에서 상영한 기억이 났다. <왜구의 무기>라는 제목으로는 무슨 영화인지 잘 알 수 없었고, <무사: 4대문파와의 혈투>라는 제목은 70년대 무협영화보다도 촌스러웠다. 아니 그 시절의 무협영화 제목은 오히려 멋졌다.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서호봉의 영화 두 편의 제목은 참 밋밋했고, 포스터 이미지는 너무나 구닥다리였다. 보고 싶은 맘이 안 들 정도로.
하지만 <사부: 영춘권 마스터>의 ‘금마장 최우수 액션상 수상’이라는 문구에 끌렸다. <엽문>과 <일대종사> 등 근대 이후 무술 고수들의 행로를 그린 영화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란 생각을 했다. 액션 장면만 뛰어나다면 다른 것이 허술해도 참을 수 있다. 무협영화의 핵심은 일단 ‘무’에 있는 것이니까.
1912년 중국 최초로 천진에 무도관이 탄생했고, 전국 각지의 고수들이 찾는 무도계의 성지가 되었다. 1932년의 천진, 영춘권의 계승자인 천스가 광동에서 올라온다. 도장을 격파하고 자신의 도장을 세우려는 천스에게 천진의 고수인 정산아오가 조언을 한다. “직접 도장을 깨고 다니면 결국 미움을 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제자를 키워서 그가 8개의 도장을 격파하면, 천진의 고수가 나와서 그를 쫓아낸다. 대신 스승이 천진에서 도장을 낼 수 있게 된다.” 새로운 고수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천진 무술계의 권위를 지키는 방법인 것이다. 천스는 천진의 미녀인 자오와 결혼하여 빈민촌에 살면서, 인력거꾼이었던 겅량천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당시의 천진은 복잡한 정세에 놓여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위협이 극심한 가운데 군벌들의 세력다툼이 치열했다.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었던 무림은 이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군벌의 비호 아래 권력의 일부로서 남든가, 일종의 스포츠로서 전락하든가. 군벌인 린시원이 무림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음모를 꾸미고, 천진 무술인의 중심인 쩌우 관장은 권모술수를 이용해서라도 무림의 명예를 지켜내려 한다. 치열한 권력다툼의 와중에 천스와 겅량천은 하나의 말로써만 이용될 뿐이다.
첫 장면에서 겅량천의 대결이 보인다. 무술 장면이 박력 있다. <사부: 영춘권 마스터>는 무술인의 액션을 심플하게 보여준다. 필요한 동작만을 골라내 강조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고수의 싸움이다. 복싱이나 종합격투기 시합에서도 고수들의 싸움은 일단 빙빙 돌면서 기회를 잡는다. 풋워크를 이용해서 치고 빠진다. 상대의 구역 안으로 들어가면 과감하게 치고받는다. 이소룡의 절권도가 근본 없이 나온 게 아니란 생각도 든다. 감독인 서호봉은 홍콩이나 대만이 아니라 중국인이다. 무협 소설 작가로도 유명하고, <일대종사>의 무술자문을 맡기도 하는 등 다방면에 능하다. 직접 무술을 하면서 무협소설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동안 중국에서 만든 무협영화는 무엇이 있었는지 떠올려봤다. 장이머우의 <영웅>과 <연인>? 하지만 무술감독인 정소동은 홍콩 출신이다. 풍덕륜의 <타이치>도 적당히 재미있기는 하지만 오락물 정도였다. 과거 중국에서는 무협소설을 금지한 적도 있었다. 제대로 무협물이 성장할 여건이 갖춰지지 못했다. 대신 홍콩에서 무협영화는 빛을 발했고, 김용의 무협소설은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고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오락물로써 무협영화를 만든다면 홍콩영화계의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빠르고 확실한 길이었다. 아쉽기는 했다. 뭔가 대륙의 기상을 담은 무협영화를 보고 싶었다. 과장과 허세로 그려내는 무협이 아니라 진정한 무와 협의 정신을 보여주는 영화를. 그건 이제 홍콩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무협영화가 되었다.
그런데 <사부: 영춘권 마스터>에서 발견했다. 처음에는 너무 절제하고 냉정하여 어색함도 느꼈지만, 초반을 넘어서면 담담한 매력에 흠씬 빠지게 된다. 일단 무술 장면이 너무나 좋다. 동네 깡패들과 싸우는 장면을 비롯하여 모든 장면이 좋지만 최고는 클라이막스에서 벌어지는 고수들과의 대결이다. 중국에는 골목길의 담벼락이 대단히 높다. 웬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도저히 담을 넘을 수가 없다. 미로 같은 공간에서 고수들이 차례로 대기하고 있다. 천스는 한 명씩 대결을 하며 나아간다. 좁은 골목길인데 결코 좁지가 않다. 높은 담 위로 뻗은 하늘 위에서 싸우는 것만 같다. 팔참도, 육점반곤, 팔쾌쌍월 등 다양한 병기를 이용하여 대결을 벌이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절로 숨이 막힌다. 다행히도 각각의 대결이, 성룡의 아크로바틱 액션처럼 오래 가지 않는다. 이건 진정한 고수들의 결투니까.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사부: 영춘권 마스터>는 걸작이라 부를 수 있다. 이 무술 장면이야말로, 홍콩의 무협영화와는 다른 중국만의 새로운 무협영화의 길을 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무협의 또 하나의 기둥은 ‘협’이다. <사부: 영춘권 마스터>의 ‘협’은 ‘무’ 이상으로 범상치 않다. 천스는 가문과 무술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다. 제자를 이용할 수 있고, 아내를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천스는 강직한 인물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잠시 눈을 감을 수도 있다고 합리화했지만 결국은 돌아선다. 자신의 의리를 지킨다. 정산아오도, 쩌우 관장도 명분이나 이익을 위해서는 음모를 꾸미고,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자신도 속아가면서.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무림의 인간이다. 그들이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협’이 그들에게는 존재한다. 그렇게 쩌우는 천진을 지켜내고, 정산아오는 브라질로 떠난다. 천스는 모든 것을 버린 채 광동으로 향하고.
<사부: 영춘권 마스터>는 그야말로 하드보일드하다. 알고 있으면서도 속는다. 당신을 이용하지만, 다른 부분에서만은 최선을 다하겠다. 진심을 결코 구걸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한 걸음씩 나아가기만 한다. 그래서 한순간에 감동이 확 밀려든다. 멀리 가면 자신의 기도가 닿지 않을 것이기에 도장 바로 앞 가게에 자리 잡은 자오를 보고 있으면, 너무나도 아름답다. 자신의 할 일을 결코 비굴하지 않게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들의 기개가 너무 멋지다. <사부: 영춘권 마스터>는 무와 협, 모두 절정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PS: <사부: 영춘권 마스터>를 보고 전작인 <무사: 사대문파와의 결투>를 봤다. <무사>도 무협의 정신을 제대로 보여주는 뛰어난 수작이다. 하지만 <사부>에는 미치지 못한다. <사부>는 <무사>에서 몇 걸음을 더 나아간 걸작이다. 그래서 서호봉의 다음 영화가 더 기대된다. <사부>에서 보여주지 못한 것이 훨씬 더 있다는 예감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