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판 주말의명화
[신판주말의명화]베를린의 연인
도리스 되리, 2012
죽은 아내가 “늘 가고 싶었다”던 일본에 가서 그녀가 생전 보고 싶었던 후지산과 벚꽃을 ‘대신’ 눈에 담은 남편 루디.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2008)을 보며 그 여정이 사뭇 쓸쓸하지만, 벚꽃(이 영화의 원제가 Cherry Blossoms이기도 하다)이 만개하듯 애틋한 감정으로 충만해 짐을 느낀다. 비록 사랑하는 아내 없이 저 혼자만의 여행이었지만 남자는 그녀의 기억과 함께 평생 최초의 일본여행을 끝마친다. 지상에서의 사랑은 이미 끝났지만, 사랑은 그 크기만큼 고스란히 남겨지는 사랑질량보존의 법칙 아래서.
<베를린의 연인Gluck>(2012)은 도리스 되리가 믿고 있는 그 ‘사랑''''이 과연 얼마나, 어디까지 유효한지, 두 남녀의 사랑을 통해 돌아보는 또 하나의 실험이다. 이번은 좀 극한의 상황에 기반하는데, 여자 이리나(알바 로르와처)는 고국에서 내전으로 부모님을 잃고 집단 강간당한 채 베를린으로 와 불법체류자로 살고 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매춘을 택한 그녀는, 어느 날 거리에서 개와 함께 사는 펑크족 칼리(빈젠즈 키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상처를 가진 여자와, 자신이 상처를 가진지도 미처 몰랐던 남자는 서로를 의지하며 이제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리나의 주요 고객이었던 남자가 애꿎게도 이리나와 섹스 도중 죽게 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칼리는 이 순간 위기에 처한 이리나를 위해 ‘무엇이든’하는데, 그건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끔찍한 행동을 동반하는 결정이다. 이리나의 변호를 자처한 변호사 노아(매티아스 브랜트)의 아내는 독일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듣고 “당신도 그런 상황이라면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줄 수 있겠냐”고 질문한다. 그 질문에 대해서 우리 역시 마찬가지 답변을 요구하게 된다.
사실 이 과정에서 영화의 톤이 다소 불균질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또 화면으로 제시된 사건의 충격적 비주얼 재현에 비해, 결말이 도출되는 과정이 상당히 쉽고, 더군다나 기대 이상으로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다. 도리스 되리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 우리가 보았던 그 먹먹함이 남겨질 틈을 주지 않고, 대신 경쾌한 음악으로 이들의 사랑에 힘을 보태준다. 동화같은 분위기에 일조하는 건 영화의 관찰자로 개입하는 변호사 노아의 탓이 크다. 그는 이리나와 딱 한 번, 운전하는 도중 그녀를 칠 뻔했던 ‘교차로에서의 인연’을 빌미로, 위기에 처한 그녀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나선다. 변호사마다 각자 전공분야가 있다면 노아의 핵심 소송 분야는 특이하게도 “행복을 추구하는 형사소송 변호사”다. 그는 “행복이 우릴 버리는 순간, 즉 인생이 영원히 바뀌는 사고나 재난의 순간엔 내가 전문가다”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까다롭고 돈 안 되고 변호하기 힘든 의뢰인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스타일의 변호사다. 이리나 커플에게도 그는 마치 ‘수호천사’처럼 등장하는데,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는 실화에 바탕한다. 독일의 형법 전문 변호사 페르난디트 본 쉬락크는 자신이 변호한 사건 중 희귀한 사건을 골라 기록한 「살인자를 어떻게 변호할 수 있을까」를 집필한다. 으레 그럴법한 범인의 얼굴을 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극악무도한 살인에 이르기까지, 숙명의 작용, 그리고 아이러니한 인생의 단면을 표현한 책으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으로, 도리스 되리는 처음으로 원작을 가지고 각색 작업을 한다.
<베를린의 연인>은 도리스 되리의 작품을 돌아볼 때 데뷔작 <남자들>(1985) 부터 <파니 핑크>(1994), <헤어드레서>(2010) 등을 거치며 면면히 이어져 온 도리스 되리 특유의 유머러스함을 한껏 배양한 작품이다. 부모의 시체 옆에서 강간을 당했던, 감당하지 못할 비극을 지니고 있는 이리나는, 내전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면 다시 그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고, 자신의 생살에 옷핀을 꽂아 피를 내면서 그 고통을 참아야 할 정도로 마음을 다쳤지만, 끝까지 자신의 삶을 놓치지 않는 여자다. 불법체류자로, 매춘부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지만 베를린에서 이리나의 생활은 상당히 활기차다. 그녀는 칼리를 만나고 처음으로 ‘사랑해서’ 섹스를 하는 행복함을 얻게 되고, 싸구려 호텔에서 벗어나 자기가 데코레이션 할 수 있는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그와의 미래를 꿈꾼다. 도리스 되리 감독은 이리나가 집을 인테리어 하는데 저 혼자 들이는 수고를 보여주는데 꽤 긴 장면에 할애하는데, 하트 모양으로 설치한 벽면 라이트, 인조잔디처럼 깔아놓은 초록색 카펫, 장미 모양이 새겨진 발 매트, 싱크서랍에 넣은 아기자기한 식기 등 이리나의 취향을 반영한 것 같은 소품들은 하나같이 밝고 예쁘다.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헤매는 29살 외로운 여성 파니 핑크의 강렬한 색감으로 치장된 집(<파니 핑크>)이나 바람피운 남편과 결별하고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카티가 꾸민 베를린 빈티지 색감이 총동원된 미용실((<헤어드레서>)처럼, 이리나의 공간 역시 자신에게 닥친 힘겨운 운명을 헤쳐 나가려는 여성 이리나의 의지, 칼라 테라피에 가까운 치유의 기능이 더해진다. 캡처하고 싶은 화면들이 가득한 도리스 되리의 영화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들이다.
작업의 동반자였던 카메라맨과 프로듀서를 몇 년 사이에 죽음으로 잃게 된 도리스 되리 감독은 이후 불교에 심취하게 됐고, 작품의 곳곳에 인연과 운명의 기운들이 함께한다.(<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 루디가 공원에서 만난 춤추는 소녀 같은 존재가 대표적이다) “오예, 너는 내 처음 오예야”라는 둘만의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이리나에게, 칼리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놓치고 싶지 않은 절박한 존재이자 그녀의 운명이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불행을 도려낼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여서이자, 그녀 역시 칼리를 보호하고 돌봐줄 수 있고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베를린의 연인>은 신파를 바탕으로 하되, 특유의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은 소소한 드라마다. 도리스 되리의 필모그래피 중 수작의 반열에 오르긴 힘들지만, 감독의 특징적 요소들은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