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나리오상상극장]흑장미성의 미녀

김기덕, 1969

[시나리오상상극장]흑장미성의 미녀 대표 이미지

소실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는 최대한 이들의 원래 모습 그대로를 상상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김기덕의 1969년 작 <흑장미성의 미녀>에 대한 글을 쓸 때는 그게 잘 안 된다. 김기덕 자신도 그게 쉽지 않을 것이다. 강조원이 쓴 이 영화의 오리지널 각본은 척 봐도 해머 호러 영화나 로저 코먼의 에드거 앨런 포 영화에 나올 법한 장엄한 유럽의 대저택이나 고성을 요구한다. 제목부터 보라. <흑장미성의 미녀>! 빰, 빰! 빠! 5, 60년대 해머 영화의 컬러풀한 세트가 떠오르지 않는가? 오프닝 크레디트에 깔리는 음악으로는 이런 걸 상상하시면 되겠다. 

 

James Bernard - Vampire Rhapsody


아쉬워라. 이 영화엔 흑장미성이 안 나온다. 대신 나오는 건 흑장미관이라는 시골집이다. 야심 차게 제목에 성이라고 박아놨는데 조국의 현실이 못 따라준다.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가지고 있는 걸 모아 대신 쓸 수밖에. 물론 피터 쿠싱이나 잉그리드 피트 대신 김희라와 남정임, 윤소라를 캐스팅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기영욱과 한지숙이라는 20대 청춘이 주인공이다. 영욱은 신문사 사회부 ‘민완’ 기자이고 지숙의 남자친구이다. 척 봐도 지숙은 영욱보다 몇 단계 위인 부잣집 딸이다. (이런 커플링에 대해서는 저번 연재분을 참고하시길.) 지숙은 다음과 같은 애절한 편지를 받고 여학교 때 단짝친구였던 민혜련을 방문하려는 중이다. 
 
“지숙아 지숙이밖에는 아무도 호소할 데가 없기에 이 편지를 써! 

지숙이 나를 구해 줘! 나는 지금 어떤 생명의 위협 앞에 벌벌 떨고 있어! 

자세한 얘기는 밝힐 수 없지만 너무나 무서운 사실이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어. 

지숙이 나를 도와 줘! 아 불쌍한 혜련이를 구해 줘! 

아 무서워! 

흑장미관 혜련이로부터”

옛 단짝친구에게 이런 편지가 왔다면 귀찮은 남자친구 없이 혼자 가야 하는 건데 말이다. 하지만 당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리가 없다. 당연히 영욱은 지숙을 따라나선다. 

지문은 흑장미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두 사람의 시야에 석양의 역광을 받아 검게 우뚝 솟는 삼 층 건물. 지붕은 화재로 내려앉고 기둥만이 솟아 있다. 어떤 귀기마저 감돈다.”

김기덕과 그의 미술팀이 작가의 야심을 얼마나 만족시켰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해머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하련다. 계속 이어지는 장면도 마찬가지. ‘어둠 속에 백발 흑의의 노인이 서 있지 않은가. 마치 중세기 서양의 고성에 사는 사람과 같은 풍모다’같은 지문을 보라. 감독을 대신해서 작가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지만이란 이름의 그 노인의 안내를 받아 흑장미관으로 들어간 두 주인공은 ‘하얀 까운에 긴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돌아서 있는 여인’이며 ‘창백한 얼굴에 가끔 경련이 스치고 우수 깃든 눈에 어떤 슬픔이 잠겨져 있는’ 민혜련을 만난다. 편집자가 밑에 윤소라의 사진이라도 한 장 박아주었으면 좋겠다. 잉그리드 피트 이름을 들먹이며 투덜거리긴 했지만 이국적이고 선이 굵은 미인이었던 윤소라는 지숙 역의 동글동글 남정임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임팩트가 있었을 것이다. 
 
혜련의 사연은 무엇일까. 집에 귀신이 나온다는 것이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나타나는 머리를 푼 여인. 이 정도면 같은 학교를 다닌 단짝 친구가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저택엔 막 교도소에서 나왔다는 혜련의 먼 친척인 달수가 산다. 평판 나쁜 남자랑 같이 사는 외딴 집에 단짝 친구를 불러들인다? 

한밤중. 지숙과 영욱이 ‘드라큐라 엄마 같은 심부름하는 할멈’, 하얀 유령처럼 생긴 빨래, 사람 다리처럼 생긴 나무떼기의 습격을 받으며 저택을 수색하는 동안, 고고하게 혼자 피아노를 치고 있던 혜련은 귀신과 마주친다. 바람에 꺼진 촛불을 다시 켜는 동안 뒤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피아노가 혼자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비명 소리를 듣고 두 주인공이 달려왔을 때는 피아노는 멀쩡하다. 

아침에 수상쩍은 남자 달수는 의외로 여기서 정보전달자 역할을 한다. 달수 어머니가 이 저택에 살았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해 독약을 먹고 죽은 여자의 유령이 나왔고 그 유령을 본 혜련의 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미쳐 죽었고... 

그날 밤은 더 파란만장하다. 드디어 같이 자다가 없어진 혜련을 찾아 나섰던 지숙은 영욱과 함께 혜련이 말한 산발한 여자 귀신을 목격한다. 귀신을 쫓아가던 둘은 기절한 혜련을 안고 나오는 노인과 마주친다. 잠시 뒤 검은 복면을 쓰고 지하실을 털러 내려간 달수가 커다란 검은 상자를 낑낑거리면서 여는데, 아까 본 여자 귀신이 그 안에서 튀어나와 달수를 덮친다. 달수 퇴장. 하지만 그리워하지 마시길. 달수가 남긴 빈자리가 그렇게 아쉬웠던지 작가는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곧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 혜련의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데려와 키웠다는 벙어리 꼽추이다. 
 
포스터
포스터

다시 밤.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여자 유령 때문에 지숙과 혜련이 기절하고 비명 지르고 달아나는 동안, 일 때문에 돌아간다 거짓말을 하고 혼자 떠났다가 몰래 흑장미관으로 돌아온 영욱은 지만 노인이 지하실에서 달수의 시체를 꺼내 땅에 묻는 걸 발견한다. 지만 노인은 혜련을 놀라게 해서 죽이면 전 재산이 자기 것이 될 거라고 믿고 귀신 흉내를 냈으며, 그 사실을 눈치챈 달수도 죽였다고 자백한다. 지숙은 아무래도 그 귀신은 여자 같았다며 영욱의 설명을 믿지 못하지만 영화가 사라져버렸으니 정말 그런지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이 점점 지겨워진다. 이야기가 재미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반대로 필름이 발견되어 영상자료원에서 8월쯤에 호러 특집으로 튼다면 관객들 반응이 썩 좋을 거 같다. 호러 효과는 별 게 아니겠지만 뻔뻔스러운 유원지 스타일의 재미는 상당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직접 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다고 해도 귀신 나타났다, 여자들 비명을 지른다, 귀신 사라진다...를 끝도 없이 반복하다 보면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지치기 마련이다. 이런 이야기는 글로 요약하는 것보다 이 유튜브 클립을 소개하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르다. 

 

Scooby Doo Openings


내가 불평하는 동안 각본가는 서양 공포 영화와 추리 소설을 보고 읽으면서 품었던 마지막 판타지를 현실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아까 달수가 끙끙대며 열었던 상자를 기억하는가? 그 밑에 비밀통로가 있었다. 수색하러 들어갔던 지숙과 영욱은 그만 꼽추가 입구를 막아서 갇히고 마는데, 다행히도 다른 출구가 있어서 빠져나온다. 알고 봤더니 그 꼽추는 꼽추도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밤이다. 이번엔 짧게 끝난다. 영욱의 방에 꼽추가 칼을 들고 들어온다. 기다리고 있던 영욱이 반격한다. 혜련의 방에는 귀신이 칼을 들고 들어온다. 지숙을 찌르려는 귀신을 영욱이 막는다. 귀신은 달아나다가 떨어져 죽는다. 가면을 벗겨보니 혜련이다. 그러고 보니 혜련과 귀신이 같은 화면에 나왔던 적이 없긴 했다. 이 줄거리 요약을 읽은 독자들은 몰랐겠지만. 

영욱은 혜련이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화재도 혜련이 친척들을 내쫓기 위해 낸 것이고, 꼽추는 계속 혜련을 돕고 있었던 것이고, 귀신소동도 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며 녹음기에서부터 피아노 줄에 이르는 온갖 장치들을 동원해 설명하는데, 그런다고 이 이야기가 설명이 될까? 성도 안 나오면서 <흑장미성의 미녀>란 제목을 씩씩하게 달고 나온 영화에게서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정신병을 앓던 단짝 친구가 자기를 죽이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된 여자가 “노 노 천만에 이제 모험하군 담을 쌓기로 했어요. 그저 겁많은 주부가 될래요” 따위의 대사나 읊으면서 남자친구에게 까르르거리는 걸 보면 이 여자, 신경이 좀 이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