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상상극장
[시나리오상상극장]산아제한
엄심호, 1960
바로 20년 전까지만 해도 산아제한을 주제로 한 특집극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는지? 옛날에 나도 한 편 본 적이 있다. 어떤 내용인지는 다 잊어버렸지만 후반부에 감옥에 갇힌 아들이 징징 짜면서 엄마를 욕하던 장면은 기억난다. “책임도 지지 못할 거면서 왜 저를 낳았어요!” 보면서 “작가가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 때문에 고생이 상당했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임희재가 <마부>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각본을 쓰기 1년 전에 쓴 <산아제한>을 읽으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도 저것과 비슷한 주제의 공익영화였다.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었지. 이 나라에서 1960년이 얼마나 옛날인지 깜빡했던 것이다.
최남현이 연기하는 주인공 고철민은 30년 경력의 여고 교사이다. 아들이 셋이다. 허장강이 연기하는 첫째는 방구석에서 돌덩이만 끌어안고 사는 광산 엔지니어다. 김진규가 연기하는 둘째는 ‘원고지 허구 승갱이만 하’는 각본가다. 이대엽이 연기하는 셋째는 건축학도다. 아들 둘은 모두 유부남이다. 첫째는 애가 셋. 둘째는 애가 둘인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아기를 낳아 역시 셋이 된다. 아들 둘은 직장이 없고, 막 취직한 막내는 아직 회사에서 봉급을 못 받는다. 계산해보라. 고철민이 버는 교사 봉급으로 13명이 먹고 살아야 한다.

인물 관계도
물론 이 영화는 코미디다. 약간의 과장은 허용이 된다. 그리고 5, 60년대에는 정말 저런 대가족이 그렇게까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대부분 이런 대가족이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는 세계 자체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나 역시 그렇다. 어떻게 경제적으로 저게 가능한가?
고철민은 산아제한의 지지자다. 학교에서도 자기주장을 설파하는데 그 때문에 교장에게 불려가 “신성한 교단에서 사춘기 여학생을 상대로 산아제한에 대한 강의를 한다는 것만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꾸중을 듣는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는가. 엄청나게 옛날이라고. 당시 사람들에겐 산아제한은 학교에서 다루어서는 안 되는 음란한 주제였던 거다. 참, 이 영화가 얼마나 괴상한 옛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증명하기 위해 고철민 선생이 가르치는 여학생들은 대부분 산아제한에 반대였음을 밝히는 바다.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이렇게 반박한다.
| “선생님,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말하자면... 휴머니즘의 반역자가 되시겠습니까?” |
당시 여자아이들이 정말 그랬는지, 이게 1919년생 아저씨가 50년대 후반 여자아이들의 대사와 사고방식을 상상한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난 후자라고 믿고 싶다. (제발 후자라고 해달라.)
학생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고철민은 절박하다. 집에 들어가 보면 허장강, 김진규, 이대엽이 아들이라고 버티고 있는 꼴을 상상해보라. 게다가 며느리가 둘이고 손주가 각각 셋이다. 광산과를 나와 돌멩이에 미친 허장강 아들은 그래도 아버지가 모르는 계획과 비전이라는 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애가 셋인 김진규 아들의 경제관념과 가치관은 대략 이 문장 하나로 요약될 수 있다.
|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는 것은 정신이 틀린 일입니다!” |
그리고 드디어 아들이 생겼다고 “생산은 하늘의 섭리야! 뭐, 걱정할 거 없어!” 이러고 앉았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 뭔가 해야 한다. 드디어 고철민은 가족을 모두 모아놓고 선언한다. “각자의 자립경제의 토대가 설 때까진 무책임한 산아를 방지해야 할 것이란 말이야. 그 길만이 우리 집안의 경제적 위기를 모면해 나갈 수 있는 길이란 말이야.” 옳은 말이다. 이 상황에서 애를 또 낳는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지. 하지만 그의 해결책은 과학적인 피임이 아니라 집안의 남자들과 여자들을 분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린 고철민에게 산아제한이란 철저하게 추상적인 개념으로, 피임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사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각본이라면 당연히 고철민의 명령이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상상하고 이를 통해 코미디를 연출해야 할 텐데, 정작 임희재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 대신 그가 그 뒤로 (고철민의 명령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아들들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첫째는 엄청난 노다지가 될 광석을 찾아내 현장 엔지니어로 취직이 된다. 둘째는 아버지와 가족을 모델로 한 <산아제한>이라는 극본을 써서 당선된다. 셋째는 아버지가 뭐라건 그냥 결혼을 해버린다.
쓰다 보니 “어 내가 쓰던 건 이 이야기가 아닌데?”란 생각이 들었는지, 임희재는 산아제한과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개 추가한다. 부부생활을 안 하다 보니 집안 분위기가 나빠졌고 결국 아내들은 다들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는 동안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고철민의 아내 오 여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을 배경음악처럼 읊고 있다.
원각사에서 <산아제한> 연극이 공연된다. 당연하지만 연극 이야기는 고철민과 가족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단지 연극 속 둘째는 더 가차 없어서, 아버지를 미치광이로 몰며 청량리 정신병원에 집어넣겠다고 악을 쓴다. 당연히 고철민은 애비 욕을 썼다고 화를 내지만 분위기 때문에 제대로 성질을 부리지도 못한다. 연극이 끝나고 둘째가 나와 아버지에게 모든 영광을 바친다는 말도 안 되는 인사를 한 뒤로는 더더욱. 결국 그는 연극이 끝나고 졸도하고 만다. 각본에는 미안함과 흥분 때문이라고 나와 있지만 설마 그러려고.
막내며느리가 쌍둥이를 출산한 날에 고철민은 죽는다. 암만 봐도 아버지의 약한 심장을 겨냥한 둘째의 완전살인인데 아무도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죽으면서 고철민은 “왜 이 방에 가득 차게 아이들을 못 두었을까”라고 한탄하는데, 이 말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당연히 죽어가는 영감의 한탄보다 멀쩡할 때의 생각이 더 중요하지.
하지만 영화가 주제로 내세우고 싶은 건 전자이다. 결국 이 영화는 처음부터 산아제한에 반대하는 영화였던 거다. 산아제한은 생명에 반하고, 본성에 반한다. 그러니 그냥 그대로 두라. 물론 이 각본을 쓰던 임희재는 경제적, 사회적 압박 때문에 스스로 출산을 포기하는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콘돔 없이 섹스하며 애를 순풍순풍 낳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