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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상상극장]위기 113

편거영, 1966

[시나리오상상극장]위기 113 대표 이미지

오늘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종종 들었던 질문 하나를 소개하기로 한다. “도대체 선정 기준이 뭔가요?”

답은 ‘랜덤’이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뽑는다는 것은 아니다. 장르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된다. 물론 랜덤으로 고른 영화라도 그중에서 누락되는 작품들이 있다. 너무 심심해서 지적하는 것 자체가 맥 빠지는 작품도 있고, 아무리 노려봐도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대사가 너무 이상해서 해독이 불가능한 작품도 있다. 내가 소개하는 작품들 대부분은 그 중간에 속해있다. 

그렇다면 걸작들은? 물론 한국영화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소실된 영화들이 있다. 하지만 이를 재구성하는 건 이 시리즈에서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지금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세월과 함께 자연스럽게 소멸된 과거의 관습들이다. 걸작은 그런 관습에 얽혀 있더라도 결국 그를 극복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기 마련이니 굳이 내가 대신 읽어줄 필요는 없다.
 
위기 113

본론으로 들어가자. 오늘 소개할 영화는 편거영이 감독, 각본을 맡은 영화 <위기 113>(1966) 이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지만 간첩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가 만들어졌던 60년대 후반에 간첩은 사실성을 포기한 어떤 종류의 과장도 허용할 수 있게 하는 핑계였고, 간첩 영화는 그 핑계를 알리바이 삼아 뭐든지 할 수 있는 놀이터였다. 

영화는 익명의 신고인이 113에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은 어마어마한 경고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3시 30분 도착 외항기 편으로 미본토불 50만딸라가 암반입됩니다. 이 밀수딸라를 적발해내지 못하면 잔인무도한 공산간첩들은 전체국민의 생명을 위협할 것이며 그 심장에 겨눠진 방아쇠를 땡길것입니다.
이 뒤에 공항의 액션이 벌어진다. 황대성이라는 남자가 ‘백색씽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남자를 미행하다가 화장실에서 그를 마취시킨다. 황대성은 백색씽글의 단장에서 지령문을 꺼내 사진을 찍고 유유히 빠져나간다. 휘동이라는 남자가 그 뒤에 화장실에 들어오는데 정신을 차린 백색씽글은 독이 묻은 살인 반지로 그를 살해한다. 

이 액션 장면은 정신이 없으면서도 무의미하다. 정리하면 백색씽글과 휘동은 간첩이고 황대성은 간첩 사냥꾼이며 백색씽글은 실수로 휘동을 죽인 모양인데, 일단 단장 속 지령문을 몰래 찍는다면서 그렇게 대놓고 마취제를 쓰면 들통이 날 수밖에 없지 않나? 게다가 백색씽글과 황대성은 단역이다. 특히 백색씽글은 몇 페이지 뒤 동료들에게 고문당하는 장면 이후로는 나오지 않는다. 뒤에 소문을 들어보면 시체는 청계천 밑에 버려졌단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 뒤에 나오는 간첩단이다. 윤 박사, 박 목사... 다들 그럴싸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비행기에서 발견되지 않은 50만 달러의 행방도 밝혀지는데, 그건 알고 봤더니 비행기 타이어 속에 숨겨 가져왔던 모양이다. 당연히 “그 50만 달러를 어떻게 넣었는가”라는 질문이 따라오는 게 정상이겠지만 영화는 그런 소소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50만 달러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영화는 역시 그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은 원자력과 관련된 정보를 빼내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 굳이 50만 달러라는 돈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인물 관계도
인물 관계도

여러분은 지금 앞에서 영문도 모른 채 개고생만 하다 죽은 백색씽글을 위해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불쌍한 인간은 백색씽글이 아니라 동료들에게 407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김두식이란 간첩이다. 보고 있으면 ‘봉’이라는 단어가 김두식을 위해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든다. 겉보기는 그럴싸하다. 잘 나가는 사업가에 결혼도 해서 아들이 하나 있고 여동생도 있다. 하지만 아내는 악독하기 그지없고, 아들은 병 때문에 아프며, 여동생이라는 양희도 진짜 동생이 아니라 불쌍하다고 데려와 같이 사는 고아다. 

무엇보다 동료들이 그를 싫어한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중간까지 이게 원자력 정보를 빼내 북으로 튀려는 북한 공작원 이야기인지 직장 내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에 대한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중반 이후로는 확신이 선다. 이 영화는 간첩 영화인 척하는 집단 따돌림 영화다. 어느 정도냐고? 초중반에 윤 박사는 두식의 아들을 독살한다. 순전히 아빠가 하는 짓이 맘에 안 든다는 이유로. 윤 박사는 심지어 두식의 아내 양순과 불륜 중인데, 귀찮아지니까 그 사람도 죽여버린다. 이 이야기를 듣고서도 심장이 찢어지지 않는다면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아차린 두식의 독백을 들어보라. 
 
우리집 사람이 정숙치 못한것은 내가 간첩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아니야, 모를꺼야! 그렇다면? 철환이를 잃은 충격에서? 그전부터 그랬어... 차라리 양희가 우리 가정의 주부가 된다면? ...그것은 안돼! 난 간첩인걸... 난 행복한 가정을 가질수 없어... 난 간첩이란 말야!

아까 한 말 취소다. 징징거리는 걸 보니 사람들이 왜 그를 싫어하는지 알겠다. 척 봐도 순진무구한 척하면서 눈치 없이 사고치고 다니는 스타일이다. 양희만 봐도, 새파랗게 젊은 술집 아르바이트 생을 데려와 여동생으로 삼겠다고 우기고는 툭하면 눈길을 주었을 상황이 눈에 보인다. 당연히 아내 입장에서는 열불이 나지. 심지어 양희 엄마의 장례식 비용과 등록금을 대주느라고 공작금 15만 원을 유용했다고? 물론 두식의 이런 태도가 집단 괴롭힘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두식이 답이 없는 인간이라도 이를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테니까. 

두식은 북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듣는다. 이미 아내는 북으로 올라갔다는 거짓말과 함께. 양순은 두식의 정체를 모르는 게 설정이 아니었나? 상관없다. 두식은 이미 양희에게 작업을 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양희 역을 맡은 배우는 태현실이다. 당시 한국 여자배우들은 봉급을 받기 위해 이런 대사를 읊어야 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오빠! 전 오빠의 은혜를 잊지 못해요. 불쌍한 저를 구원해 주셔서 오늘의 삶을 영위케 해주신 높으신 은공을... 그런데 요즈음은 저보다 오빠가 더 쓸쓸해 보여요. 제 힘으로 오빠의 고독을 풀어 드릴 수 없을까요? 아이 나좀 봐... 오빠 그만 주무세요. 우린 서로 참아야 하지 않아요?

그래놓고 각본가는 ‘하고 침대로 가서 벌렁 눕는다’라는 지문을 덧붙인다. 

그 뒤에 무슨 일에 일어났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고, 결말로 건너뛰자. 두식은 공작금 1,400만 원을 빼서 양희와 함께 부산으로 달아난다. 일본으로 밀항을 준비하던 도중 간첩단이 양희를 납치한다. 앞 페이지에 등장했던 황대성이 등장해 두식을 돕고 간첩단은 일망타진된다. 두식이 그 뒤에 무슨 일을 겪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되지만 아마 내 상상은 각본가의 상상과 전혀 다를 것이다. 물론 내가 더 정확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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