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상상극장
[시나리오상상극장]남자는 안팔려
임권택. 1963
임권택 감독의 <화장> 개봉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반세기 전에 만든 초기작 한 편을 소개한다. 이대엽(얼마 전에 사망한 전 성남시장 말이다)과 구봉서가 주연한 <남자는 안팔려>. 그렇다고 이 1963년 작 영화와 <화장>을 연결하는 예술적인 일관성 따위를 찾을 생각은 말기 바란다. 60년대 초 임권택은 말 그대로 아무 거나 닥치는 대로 만들었다. 그가 이 영화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도 낮다. 무엇보다 지금 소개할 시나리오 요약에서 임권택을 찾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이 시나리오의 각본가는 곽일로. 아직 임권택은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고 나중에 일을 해서 만든 작품을 우린 볼 수 없다. 상상이야 할 수 있지만 그 상상의 결과물과 실제 임권택의 영화는 아무 관계도 없다.
제목과 캐스팅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여장 남자가 소재인 코미디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당장 IMDb로 달려가 빌리 와일더의 <뜨거운 것이 좋아>가 언제 영화인지 검색하고 싶을 것이다. 거기까지 갈 필요 없다. <뜨거운 것이 좋아>는 1959년 작이다. 뻔뻔스러운 모방작이고 그건 보는 사람, 만드는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긴 <뜨거운 것이 좋아> 역시 프랑스 코미디 <사랑의 팡파레Fanfaren der Liebe>(1951)와 그 영화의 독일판 리메이크를 모방한 영화이니 이 모방의 사슬은 더 길어질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남자는 안 팔려>와는 달리 빌리 와일더는 판권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이대엽은 병칠이고 구봉서는 칠복이다. 병칠은 배우가 되고 싶고, 칠복은 무용수가 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서울에서 백수로 놀면서 직장을 찾으러 다니는 중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들은 응모하려던 회사에서 딱지를 맞는데, 알고 봤더니 여자 직원을 뽑고 있었던 것이다. 순전히 자기네의 바보 같은 실수 때문인데도 그들은 세상이 여자판이라고 자기네는 희생자라고 우기고 다닌다.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그래도 그들은 취직이 된다. 간판을 걷어차려다 날아간 칠복의 신발이 달리는 삼륜차에 떨어지고 그들은 그걸 찾으러 대소동을 벌이는데, 그들을 눈여겨 본 자칭 사장이란 사람이 그들을 운전사와 조수로 고용한 것이다. 그 소동 중 칠복은 악보를 들고 걷던 남옥이라는 여자와 충돌하게 되고 첫눈에 반한다. 아, 그리고 병칠은 이미 영애라는 여자 친구가 있다. 그건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입 큰 백만장자와 연애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부터는 두 남자 주인공에게 여장을 시키려는 준비과정이다. 알고 봤더니 사장은 수상쩍은 범죄자였고, 사장을 노리던 다른 범죄자들에 의해 칠복과 병칠은 사장의 돈을 털리고 만다. 둘은 경찰에 신고하지만 사장은 사라졌고 아무도 그들이 취직했다는 말을 안 믿는다. 우연히 둘과 마주친 사장은 여성국극단 속으로 숨었다가 변장해 빠져나가고 사장을 찾아 들어온 둘은 거기 취직하려다 남자라는 이유로 쫓겨난다. 남자라서 안 팔린다는 핑계가 또 생겼다.

둘은 여자로 변장한다. 그 모습이 어땠는지는 포스터가 있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림만 보면 꿈에 나올까봐 두렵다. 하지만 구봉서의 여자 연기는 꽤 그럴싸했을 가능성이 높고 어떤 스타일이었을지 상상도 간다. 구봉서가 여장연기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70년 작인 <남자와 기생>에서 그는 여장을 하고 기생일을 하는 실직자로 나온다.
이 영화에서 <뜨거운 것이 좋아>보다 설득력 있는 부분이 있다면 여성국극단의 설정이다. <뜨거운 것이 좋아>의 여성악단은 그냥 무난한 핑계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여성국극단 설정은 거의 완벽하다. 여자들만이 있어야 할 핑계로도 좋지만 구봉서처럼 생긴 여자가 바로 그런 외모와 목소리 때문에 발탁될 수 있는 핑계로는 그냥 완벽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시나리오는 이 국극단 설정을 그리 깊이 다루지는 않는다.
이 뒤로도 영화는 <뜨거운 것이 좋아>의 길을 따른다. 예상했겠지만 남옥은 이 극단의 단원이라 칠복은 여장한 미쓰리와 남자인 칠복의 이중생활을 하면서 남옥과 만난다. 한참의 소동 끝에 사장과 강도는 모두 체포되고 둘의 여장은 폭로된다. 사장은 위폐범임이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파격적이었던 원본, <뜨거운 것이 좋아>와는 달리 <남자는 안팔려>의 결말은 심심할 정도로 교훈적이고 무난하다. 너무 무난해서 신기할 지경이다. 두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그들을 주연으로 삼겠다는 영화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과수원을 하겠다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결말이 스스로의 내용뿐만 아니라 배우들까지 부정하는 것이다. 이 결말을 읽고 있으면 여장만 해도 방송금지를 먹었던 옛날을 회상하며 ‘창작의 자유’가 있는 <개그 콘서트>의 후배들을 부러워하던 구봉서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