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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상상극장]섹스폰 부는 처녀

김봉환, 1965

[시나리오상상극장]섹스폰 부는 처녀 대표 이미지

<섹스폰 부는 처녀>의 심의 대본은 제목부터 난감하다. 여기서 ‘섹스폰’은 당연히 악기 색소폰이다. 민망한 표기지만 지금도 구글에서 ‘섹스폰’을 치면 엄청나게 많은 게시물들이 걸린다는 걸 잊지 말자. 

색소폰의 무엇이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을까? 자칫 잘못 쓰면 야릇한 의미가 될 수 있는 악기 이름? 아니면 말 그대로 색소폰을 부는 젊은 여자의 쉽게 접할 수 없는 낯선 모습? 

이유가 무엇이건 영화는 여자주인공 보경이 사람들 사이에서 색소폰을 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무슨 곡을 부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각본가는 음악 자체엔 별 관심이 없었나 보다. 심지어 악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확신이 없는 거 같은데, 종종 지문을 보면 보경이 연주하는 악기가 나팔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종 ‘나팔쟁이’라는 욕도 듣는다. 어쩌다가 보경이 색소폰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집 안에서도 그렇게 좋아했던 것 같지 않다. 후반에 보면 어머니가 시끄럽다고 구박한 것을 후회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제곡이 끝나면 우린 ‘말을 타고 달려오는 마장현’이라는 생뚱맞은 지문과 상대하게 된다. 60년대가 무대인 현대물이니 진짜로 마장현이란 남자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장면일 리는 없다. 뒤를 보면 작명가가 이 이름을 가지고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당사자에게 곤경을 당하니 설명적인 판타지인가 보다. 이름 농담이기도 하겠고.

마장현은 누군가. 얼마 전 총무부 장관이었다가 물러난 정치가 양반이다. 딸 둘에 아들 하나가 있는데, 그 준 보경이라는 딸이 바로 ‘섹스폰 부는 처녀’다. 왜 전직 장관의 딸이 수상쩍은 곳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는가? 

한마디로 마장현은 망했다. 어떻게 망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보통 전직 장관급이 되면 장관 자리에서 밀려난다고 경제적으로 빈궁해지지는 않는 법이다. 하지만 <섹스폰 부는 처녀>에서 마장현은 마치 장관 월급이 유일한 수익이었던 것처럼 그냥 망했다. 이제 전화도 끊겼다. 전화가 다시 연결된 건 보경이 색소폰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즉시 요금을 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마장현은 집안의 경제적 위기에 대한 감이 전혀 없으며 집의 도자기만 어루만지면서 다시 입각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

마장현은 교화가 필요한 불편하고 혐오스러운 인물이다. 그는 우리가 한국의 ‘무능력한 꼰대 가부장’에 대해 들을 때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거의 모든 것들을 갖고 있다.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가족을 개떡같이 알고, 오만방자하고, 무능력하고, 과대망상증에 빠져 있고, 무엇보다 돈을 못 번다. 그가 어떻게 장관 자리까지 올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마 처음부터 잠시 쓰다 버릴 카드였는지도 모른다. 

마장현의 입장은 비현실적이고 캐릭터는 과장되었지만, 정치가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영화가, 그의 정치적 성향이 어떤지, 정치가로서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사실적이다. 각본을 읽어보면 그에게 정계로 돌아간다는 건 오로지 자기 체면을 차리고, 자기에게 못되게 굴었던 인간들에게 보복할 수 있는 자리를 되찾는다는 의미밖에 없다. (“음. 내가 입각만 되면 첫쨋날 이 마장현이를 괄시한 놈들을 모조리 다 싹둑 싹둑 해버려야지! 암!”) 어이없지만 흔해빠진 인물이다. 영화가 비난하고 있는 것도 이런 나이 지긋한 남자들의 ‘양반스러운’ 사고방식이다. 이런 태도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왕년에 집안의 운전사였지만 지금은 운송회사를 운영하는 재준이 회사 사장을 맡아달라고 하자 불같이 화를 내며 거절하는 장면이다. (“이놈, 네 이놈! 돈냥이나 벌어서 회사를 꾸몄다고 그래 날더러 고용사리를 하라고?”)

영화의 내용은 이런 마장현이 불가능한 꿈을 품고 거들먹거리는 게 반, 타이틀롤인 ‘섹소폰 부는 처녀’인 보경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그런 그 때문에 하는 개고생의 묘사 반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만 하면 관객들 절반이 울화통이 터져 극장에서 죽어 나가기 때문에 영화는 로맨스를 첨가한다. 보경은 옛날 언니인 은경의 정략결혼 대상인 진원과 사랑에 빠진다. 은경은 대신 재준과 사랑에 빠진다. 작가가 이 자매들만큼 외동아들 필구도 보살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그냥 노름판에서 사람을 패고 경찰서에 끌려가고 만다. 제목이 <섹스폰 부는 처녀>인데 왜 색소폰 이야기가 이렇게 적게 나오냐고? 그러게 말이다. 아무래도 제목을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추어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결국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 같다. 

결국 마장현은 영화가 끝날 무렵에 교화된다. 가족들이 고생하는 걸 보고 정계에 대한 꿈을 접은 뒤 재준의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대가가 너무 크다. 보경이 가족을 벌어 먹이기 위해 색소폰을 들고 뛰어다니며 겪는 고난이야 ‘젊었을 때 사서 하는 고생’이라 친다고 하더라도 그 와중에 발작을 일으켜 쓰러진 뒤 결국 애절한 유언을 남기고 죽어버린 마장현의 아내는 뭔가? 무엇보다 사람 다루는 능력은 쥐뿔만큼도 없고 계급편견 쩌는 데다가 현실감각은 티끌만큼도 없는 그가 과연 얼굴마담 노릇이나 할 수 있을까? 사람은 변한다고 하지만 그 나이에 그런 성격은 사람은 아내가 죽고 아이들이 개고생을 하는 걸 보더라도 안 변한다. 여러분도 잘 알지 않는가. 그러니 얼굴 마담 사장 때문에 고생문이 열린 재준 씨와 가족의 끈 때문에 아버지한테서 끝까지 벗어날 수 없을 남매들에게 미리 위로의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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