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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판주말의명화]내 남자

쿠마키리 카즈요시, 2014

[신판주말의명화]내 남자 대표 이미지

2008년 나오키상을 수상한 사쿠라바 카즈키의 소설 「내 남자」를 먼저 읽었고, 작년 부산영화제에 쿠마키리 카즈요시가 감독한 <내 남자>가 상영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 남자>의 이미지가 기억 속에 떠올랐다. 예고편은 봤으니, 아마도 그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홋카이도에서도 북쪽 지역, 바다에 유빙이 떠다니는 그 풍경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비명을 지르는 듯한 유빙의 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이미 영화를 본 것처럼, 소설 속 이미지 몇 개가 영상으로 머릿속에 흐르고 있었다.

<내 남자>는 아버지와 딸의 금지된 사랑을 그린 영화다. 홋카이도 남서쪽에 들이닥친 해일로 풍비박산이 난 섬. 일가족을 잃은 10살의 하나는, 먼 친척뻘인 26살의 준고를 만난다. 혼자 살아가던 준고는 하나를 입양하여 키운다. 나이 차가 별로 안 나지만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준고와 사귀던 여인, 친척인 오시오 할아버지 등 주변 사람들은 뭔가를 느낀다. 준고와 하나는 너무 가깝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는 어색할 스킨십도 태연하게 자연스럽게 한다. 하나와 준고는 점점 그들만의 세계로 들어간다.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금단의 사랑 속으로.
 
내 남자

홀로 살아남은 하나는, 혼자 섬으로 들어온 준고를 만난다. 그를 본 순간 직감했다. 준고와 자신은 하나의 운명이라고. 하나를 살리고, 죽은 아버지는 말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아는 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피난처에서 하나는 물병 하나만 들고 떠돌아다닌다. 가족을 잃고 울부짖던 여인은 하나를 보고 말한다. 돈 없냐고. 거대한 재난은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어떤 악의도 없이, 아무 책임도 없이. 살아남은 하나는 운명이 된 준고를 사랑한다. 그를 사랑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렇게 한다.

준고와 하나가 살아가는 항구 마을 몸베쓰의 앞바다에는 유빙이 가득하다. 완전히 얼어붙어 있다가 날이 풀리면서 조금씩 녹고 흐르게 되면 소리가 들린다. 거대한 자연의 소리. 인간 따위는 범접할 수 없는, 인간의 어떤 노력도 허사로 만들어버릴 자연의 움직임. 그곳에서 하나는, 준고를 사랑한다. 하나는 당돌하게도 준고의 연인을 위협한다.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냐고 묻는다. 거리낌이 없다. 그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니까. 해일처럼, 운명처럼 하나는 준고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그건 무엇도 막을 수 없고, 도덕이나 당위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유빙이었다. 너도 힘들었을 것이라며, 준고에게서 떠나가라는 오시오 할아버지를 피해 하나는 유빙 위를 달린다. 하늘 위에서 카메라가 바라본다. 그들은 너무나도 작다. 온통 하얀색의 얼음이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다.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한순간에 바다 저쪽으로 떠내려간다. 하나는 오시오에게서 도망치고, 그를 죽이고 싶다. 준고와의 사랑을 방해하는 그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니까. 소설을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유빙은 거대하고 생생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박혀 들었다.

오시오 할아버지가 죽고, 그들은 도쿄로 간다. 준고는 택시를 몰고 하나는 학교를 다닌다. 그들이 사는 집은, 홋카이도의 화사하고 따뜻한 집과는 다르다. 이곳은 칙칙하고, 공기가 무겁다. 고등학생인 딸의 옷을 사기 위해 가불을 한다는 말을 들은 동료는 야비하게 웃는다. 뭔지 알겠다며. 홋카이도에는 거대한 자연이 있었다. 모든 것이 허락된 원초적인 세계 안에서 하나와 준고는 보호받았다. 섣부른 인간이 그들의 사랑을 떼어놓으려 하기 전까지는. 

도쿄는 다르다. 거대한 도시에서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만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다. 자연처럼 그저 품 안에 들여놓지 않는다. 자신을 팔던가, 교활해지든가, 강해지던가 하여튼 뭔가가 있어야 한다. 준고는 그러지 못한다. 태어난 가족 안에서도 자기 자리를 만들지 못했고, 긴밀한 관계도 맺지 못했던 준고는 도시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다. 준고를 위해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내뱉는 하나와는 격이 다르다. 그래서 준고는 무너진다. 하나를 위해 사람을 죽이고, 그 대가로 무너져 내린다. 이제는 하나가, 준고를 부양한다.
 
「내 남자 私の男」
「내 남자 私の男」

「내 남자」는 나오키상을 받을 때에도 심사위원에게서 ‘반사회적, 반도덕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서 이 소설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했다고 했다. 하나의 결혼에서 역순으로 과거를 보여줬던 소설과 달리 영화 <내 남자>는 준고와 하나가 처음 만난 시점부터 시작된다. 질감이 약간 달라진다. 파격적인 이야기는 동일하지만, 서서히 그들이 고립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니 하나가 어떻게 금단의 사랑을 지켜내고, 어떻게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내 남자>의 주인공은 명백하게 준고가 아니라 하나다.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녀의 의지로 ‘함께’ 살아남는다.

소설 「내 남자」가 나온 것은 2008년, 동일본 대지진은 2011년, 영화 <내 남자>는 2013년이다. 소설을 읽을 때 쓰나미는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배치되어 있는, 일종의 배경으로 그려졌으니까. 하지만 영화에서는 막 쓰나미를 당한 직후의 풍경이 그려진다. 바닷가에서,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깨어나는 하나가 보인다. 후쿠시마의 풍경이 겹쳐진다. 상상의 재난이 아니라 현실의 재난 이후, 살아남은 그들을 보게 된다. 그래서 하나의 욕망이 또한 이해가 된다. 그렇게 살아남았다면, 소설에서처럼 그녀만이 가족에서 내 처져 혼자 남았다면 본능으로 남았을 것이다. 혼자 살아남는 법. 지켜야만 하는 것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지켜내는 것. 가족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고 지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양복을 입었으면서도 맨발에 샌들을 신고 딸과 결혼할 남자를 만나러 온 준고. 여전히 준고는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소설의 표현처럼 ‘영락한 귀족처럼 매끄럽고 우아하다.’ 하나는 다르다. 재난을 겪었고, 스스로 살아남기를 선택하며 야수가 되었다. 여전히 준고를 사랑하면서도 생활을 위해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악녀 같은데, 악녀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식탁 아래로 준고를 유혹하는 발을 보면서도 비난할 수가 없다. 그런 하나를 연기하는 니카이도 후미가 너무나도 당당하고, 인상적이다. 준고 역의 아사노 타다노부 역시 그가 아니었으면 전혀 다른 준고였을 것이다.
 
내 남자

홋카이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쿠마키리 카즈요시 감독은 몸베쓰에서 살아가는 하나와 준고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려낸다. 눈 덮인 거리에서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의 풍경은 아름답다. 슬프다. <내 남자>를 보지 않고서도 본 것처럼 이미지가 떠오른 것은, 소설의 묘사와 풍경이 너무나도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비로소, 그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이미 보았던, 이제 구체적으로 여백이 메워진 이미지들. 영화 <내 남자>를 보고 나니, 소설의 장면들이 다시 영화 속 이미지로 대체가 된다. 둘 다 좋은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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