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상상극장
[시나리오상상극장]지평선은 말이 없다
이신명, 1966
6, 70년대 한국 시나리오 작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중국을 무대로 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솔직히 이 좁아터진 한반도에선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가 있으니까. 만주벌판을 누비면서 싸나이의 기상을 과시하려면 일단 대륙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상상하는 건 그렇다고 쳐도 시나리오에 ‘광활한 만주벌판’이라고 나와 있는 걸 어떻게 찍는다? 걱정도 팔자지. 그들에겐 한강 고수부지가 있었다. 한강을 개발한다고 고수부지를 시멘트로 발라버렸을 때 얼마나 많은 영화쟁이들이 피눈물을 흘렸을까.
주동운이 각본을 쓰고 이신명이 감독한 <지평선은 말이 없다>의 액션도 대부분 중국에서 벌어진다. 이미자의 노래와 제목이 같은데, 둘 다 66년에 나왔으니 주제곡으로 쓰인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지금도 자주 들리는 노래와는 달리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필름도 사라져버렸지만.

영화 포스터
영화의 주인공은 윤명철이라는 싸나이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헌병 대장을 총으로 쏴 죽이고 상해행 특급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는 할 일이 참 많다. 우선 상해에 있는 임시 정부 동지와 접선해야 한다. 다음엔 외삼촌 한진산이 어렸을 때 데려간 여동생 명숙을 찾아야 한다. 아버지를 밀고해 죽게 한 원수인 엄성칠이란 악당도 상해에 갔는데 그를 찾아 복수 하려던 형 명덕도 생사를 알 수 없으니 그 역시 찾아야 한다.
명철이 탄 열차는 진영방이라는 두목이 이끄는 마적의 습격을 받는다. 마침 헌병에게 의심을 받던 터라 위기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이긴 했는데, 명철은 한 수 더 뜬다. 자기 물건을 빼앗기고 진영방을 쏘려는 일본인 상인을 쏴 죽이더니 이번엔 진영방이 강탈한 가방을 다시 훔쳐서 마적 떼의 말을 타고 달아난다. 한참 추격전을 벌이던 그들은 서로가 모두 일본에 맞서 싸우는 항일투사임을 알게 된다.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라면 ‘이것이 우리들의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이라고 말했을 장면이다. 물론 당시 한국 시나리오 작가들은 보가트식 냉소 같은 건 몰랐다.
이 영화의 각본은 72페이지 정도로, 보통 50페이지 안팎인 다른 작품에 비해 긴 편이다. 러닝타임 때문이 아니라 지문이 차지하는 분량이 많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액션이 엄청나게 많다. 읽다 보면 각본가가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가상의 영화를 보면서 필을 받아 흥분한 게 보인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열차가 전복되고 총알이 날아다니고 말 탄 사나이들이 만주벌판을 질주한다. 총알 날아가는 소리도 예사롭지 않다. 빠-- 빠-- ㅇ! 파파파--ㅇ!

시나리오 48페이지
이걸 어떻게 다 찍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말 달리는 장면에서는 마법의 고수부지가 도움을 주었을 거라 생각해본다.
만주 서부극 장면이 끝나면 명철은 상해에 와 있다. 하필이면 호텔에서 접선하려는 애꾸눈 동지는 살해당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그는 인신매매범에 쫓기던 카바레 가수 미향을 위해 맞서 싸우던 미향의 오빠 대열을 돕는다. 애꾸눈 동지의 이름을 빌려 임시 정부 동지와 접선한 그는 또 정체불명의 악당들의 습격을 받는다. 무기를 운송 중이던 독립군의 정크선과 악당이 탄 보트의 007스러운 액션이 양자강에서 펼쳐진다. 동지들은 모두 죽고 명철만이 간신히 살아남는다. 아무리 봐도 일본군은 아닌 거 같은 그 악당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진산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나? 명철의 동생 명숙을 데리고 떠났다는 외삼촌 말이다. 그도 상해에 살고 있다. 그는 각본에는 영란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젊은 여자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영란은 당연히 명숙의 다른 이름이다. 하필 영란은 미향과 같은 클럽에서 일하고 대열과 그렇고 그런 사이다. 한진산은 역시 카바레를 운영하는 마천호라는 중국인에게 조카를 천 원 받고 넘겨주는데, 그 마천호라는 사람은 바로 정크선 안에 있던 독립군 무기를 판 친한파다. 중국 대륙이 넓다고 누가 그랬는가.
한편 아편굴에서는 마천호의 경쟁자인 홍대선이라는 자가 헌병 대장 사천과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의 계획은 금괴 안에 구멍을 파 그 안에 아편을 숨겨 한국 땅으로 밀수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금덩어리로밖에 안 보입니다. 이 속에 아편이 들었다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안다, 안다! 말이 안 된다는 거. 그러나 잠시 기다리시길.

인물 관계도
한진산이 영란뿐만 아니라 미향까지 마천호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대열은 마천호의 카바레로 쳐들어가고 명철은 그를 도우러 같이 들어간다. 깽판. 그런데 위기일발의 순간에 명철을 구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그동안 명철에 미행을 붙여놨던 진영방이다. 명철은 당연히 깽판 치는 동안에도 영란이 동생인 걸 모른다. 그가 모르는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지금은 마약중독자가 된 형 명덕이 홍대선의 부하로 일하고 있었고 얼마 전에 동생을 만나러 한진산을 찾아갔다가 동생이 병으로 죽었다는 거짓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분명 목표는 미향 구출작전이었을 텐데, 그 소동 이후 얼떨결에 명철은 박철이라는 가명을 쓰며 마천호의 부하로 들어가게 된다. 금괴 안에 아편이 들었다는 말을 들은 명철은 열차 강도질을 해서 금고를 탈취한다. 누가 훔쳤는지 알아낸 홍대선은 마에게 연락해 물건을 돌려달라며 약속장소를 잡는데 그 장소에 나타나 명철의 총에 맞는 건 하필이면 명덕이다. 명덕은 명철에게 외삼촌이 있는 곳을 알려주며 죽는다. 명철이 찾아가자 한진산은 이번엔 동생을 홍대선에게 팔아넘겼다고 또 거짓말을 한다.
슬슬 속도를 내자. 알고 봤더니 홍대선이 보내려고 했던 건 독립군 군자금으로 쓰려 했던 진짜 금괴였다. 알고 봤더니 마천호는 아버지의 원수 엄성칠이었다. 명철과 영란은 아직 둘이 남매 사이란 걸 모르고 연애감정을 느낀다. 명철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간다. 진영방이 명철을 구출한다. 영란은 자기를 괴롭히던 마천호로부터 박철이 오빠임을 알게 된다. 명철은 영란을 구출하고 역시 동생임을 알게 된다. 작가가 필 받아 쓴 10페이지의 액션 신이 이어진 뒤 총에 맞은 명철은 결국 마천호를 죽여 원수를 갚고 진영방의 품에서 죽어간다. 알고 봤더니 진영방은 한국인으로 지금까지 모은 돈은 다 한국 독립군에 전달했고... 하지만 지금 독자들은 둘 사이의 브로맨스에만 신경 쓰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