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상상극장
[시나리오상상극장]검은 장갑의 여인
심우섭, 1962
이번 원고를 위해 <검은 장갑의 여인>이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해독하려 시도하는 중이다. 심우섭 감독, 이경재 원작, 박옥상 각색의 이 1962년 영화가 특별히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연배우가 최무룡, 황해, 김혜정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주인공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세부로 들어가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은근히 해독이 어렵다. 이유는 계속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교통사고(지문에는 ‘부레키 소리, 황인성 차에 치운다’라고 나와 있다.)로 시작하는 영화다. 차에 치인 황인성이란 사람은 한명건설 영업부장으로, 죽기 전에 목격자인 사진기자 윤덕호에게 “서류, 서류... 검은 장갑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말 그대로 검은 장갑을 낀 누군가가 그 서류를 훔쳐갔다는 말로, 지문에도 그 장면이 나온다.
겨우 페이지를 한 장 넘겼을 뿐인데 벌써부터 이상하다. 일단 경찰에 따르면 피해자는 사고 직전에 어떤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단다. 그 여자가 우리의 타이틀 롤인 ‘검은 장갑의 여인’일 텐데, 왜 얼굴과 이름을 알면서 ‘검은 장갑’이라고 했을까? 장갑이란 벗어버리면 그 뿐, 어떤 단서도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암만 봐도 교통사고를 위장한 계획 살인인데 그렇다면 운전사는 왜 브레이크를 밟았을까? 여기에 대한 어떤 논리적인 답변 같은 건 기대하지 마시기 바란다.
호기심이 당긴 덕호는 독자적인 수사에 나선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이미 그가 그 검은 장갑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장갑은 미스 추라는 사람의 것인데, 덕호는 이미 미스 추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 사람은 그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연실이라는 모델과 룸메이트인 모양이다. 그리고 은주란 여자도 같은 방을 쓰는 모양이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도대체 장갑을 어떻게 손에 넣은 건데? 그게 여자친구 룸메이트 것이란 건 어떻게 안 건데?
사라진 서류는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설계도이기 때문에 한명건설의 주 사장은 난리가 났다. 엉뚱하게도 덕호는 이 회사의 긴급회의 안에 버젓하게 들어간다. 주 사장이 고용한 이 변호사는 덕호를 믿을 수 있는 부하라고 소개하는데, 왜 그런 사람이 지금 잡지사에서 사진기자를 하고 있을까?
죽은 남자가 남긴 수첩이 단서다. 박미라와 서장석이라는 이름이 있고 장효숙이란 여자 이름도 있다. 덕호가 장효숙을 찾아서 물어보니 죽은 남자는 사실 송 마담이라는 여자에게 빠져 있었단다. 송 마담을 찾아낸 덕호는 그 사람과 대충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 덕호: 나같은 돈판이 지나치기에는 과거의 경력이 용서를 해야지. 송마담: 문제의 미인을 미행했군. 덕호: 그런데 그 미인이 지금 막 이빠 안으로 들어왔거든. 송마담: 지금? 응... 아무도 안 왔는데? 박원식: .... |
‘나같은 돈판이...’가 어떻게 ‘문제의 미인을 미행했군’으로 연결되는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덕호는 송 마담이 검은 장갑의 여인이라고 우기다가 바에서 쫓겨나고 정체불명의 악당에게 얻어맞는다.
알고 봤더니 주 사장은 과거가 있다. 옛날엔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였고 죽은 황 부장은 그의 앞잡이였다고 한다. 하긴 60년대 초. 일제시대 친일파들이 아직 팔팔한 장년층이던 때다. 이건 내가 이 시나리오에서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실이다.
송 마담은 여전히 자기가 검은 장갑의 여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신 주 사장의 오른팔인 박 상무의 여자친구란다. 그리고 덕호가 입원한 병원엔 아까 ‘...’로 첫 등장을 했고 잠시 뒤 그를 두들겨 팬 박원식이 전화를 걸어와 검은 장갑을 찾지 말라고 협박한다. 그리고 잠시 뒤 검은 장갑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누군가가 자기를 찾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가 담긴 꽃다발을 보내온다.
덕호는 꽃집을 찾아내 그 꽃을 사간 사람이 박미라라는 여자라는 걸 알아낸다. 하지만 이틀 동안 땡땡이를 치느라 잡지에 낼 화보를 찍는 걸 잊었다. 연실은 더 이상 모델을 안 해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시퀀스부터 덕호는 어디서 만났는지 은주를 찍고 있다. 은주에게 자기가 맡은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당연.
덕호가 서장석을 찾으러 대구로 내려간 동안 황인성을 죽인 운전사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그는 바텐더인 박원식과 아는 사이다. 경찰은 박원식을 체포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다. 엉뚱하게도 그의 알리바이를 대주는 사람은 덕호이다. 이유는 그냥 안 나오고. 물론 둘이 같은 차를 타고 있는 장면도 안 나온다.
여기서 갑자기 영화는 진상의 일부를 공개한다. 알고 봤다니 주 사장의 오른팔인 박 상무와 박원식은 형제이고 둘은 모두 주 사장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 이름이 혜린이라는 송 마담은 박 상무의 연인이기도 하지만 검은 장갑의 여자이기도 하고 그들과 한패이다. 그리고 그들은 막 주 사장의 아들을 유괴해 몸값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이 뒤부터는 그나마 말이 되기 시작한다. 주 사장은 고등계 형사였던 때에 은인이었던 친구를 배반했다. 그의 세 남매는 서장석이 키웠는데 그게 박 상무, 박원식, 은주다. 물론 은주는 박미라이기도 하다. 덕호에게 설득된 은주는 경찰 편이 된다. 박 상무는 주 사장의 재산을 정리한 뒤 그를 살해하고 자살한다. 박원식은 주 사장의 아들을 데리고 인질극을 벌이다 갑자기 안 나오는데, 마지막 대사가 ‘앗’인 걸 보면 떨어져 죽거나 뭐 그랬나 보다. 송 마담도 자살했나 보다.

인물 관계도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앞에 벌여놓은 이상한 난장판은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몇십 년 전 한국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우리에겐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태평스럽게 늘어놓았고 나 역시 여기엔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각본은 그렇게 이해되는 수준의 무책임함을 넘어선다. 분명 여기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상자료원으로 각본이 넘어가는 동안 잘려나간 장면이 있거나, 없어진 지문에 설명이 있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 시시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진짜 보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읽은 각본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졌을 리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