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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상상극장]기수를 남쪽으로 돌려라

임원직, 1964

[시나리오상상극장]기수를 남쪽으로 돌려라 대표 이미지

지금까지 소실된 옛날 영화들을 다루면서 SF, 호러, 코미디, 추리, 중국 무대 에픽 멜로드라마까지 언급했지만 정작 반공물은 다루지 않았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반공 홍보물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고려해본다면 이건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직무 유기다. 반성한다. 

연속해서 반공물을 두 편 다룰 생각인데, 먼저 소개할 1964년 작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라>는 그 중 비교적 심각한 쪽에 속한다. 일단 실화이다.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영화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도 연도와 제목만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과 소재를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1960년에 정낙현 소위라는 북한 장교가 미그15 전투기를 타고 남한에 귀순했는데 이 사건을 각색한 반공홍보물이다.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라

정낙현의 수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영화에 얼마나 반영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멜로드라마는 허구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북한 묘사의 상당 부분은 정낙현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와서 확인하긴 어려운 내용이므로 사실과 허구를 특별히 구별하지는 않으려 한다. 

영화는 공중전으로 시작한다. ‘1958년 원산 ‘괴뢰’ 공군기지’. 두 주인공 낙현과 화영은 YAK-18을 타고 남으로 귀순하려는 반역자를 미그기로 격추한다. 이 장면이 8페이지까지 상당히 자세한 세부묘사와 함께 이어지는데, 어떻게 찍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만 해도 기존 뉴스 화면을 이용하는 일이 많았지만 당시엔 최소한 두 대 이상의 미그15기를 확보하고 있었을 테니 이를 활용했을 수도 있다. 하여간 각본에서만 보면 굉장히 야심 찬 장면인데 이를 확인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이다음에는 공을 세운 조종사들이 술 마시고 깽판 치는, 그러니까 이런 전쟁 영화에서는 거의 클리셰에 가까운 장면이 등장하는데, 내용은 뻔하지만 언어나 시스템과 관련된 디테일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물론 이것이 얼마나 당시 북한 묘사에 가까운지, 이것이 실제 영화에 얼마나 투영되었는지는 상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의 무대가 후반 몇 분을 제외하면 북한을 무대로 하고 있고 이 정도의 디테일이 그때까지 계속 이어지므로 적어도 야심이 상당히 큰 작업이었음은 분명하다. 

다음 장면에서 낙현과 화영은 4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낙현은 전형적인 반공 멜로드라마식 삼각관계에 빠진다. 그는 효숙이라는 여자를 좋아하는데, 둘 사이를 정갑이라는 ‘위원장 동무’가 질투한다. 효숙은 아버지가 부르주아 의사라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데, 정갑은 이를 협박 도구로 이용해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 물론 우리의 정의로운 주인공 낙현은 ‘지상낙원’인 북조선에서 당 간부들이 부어라, 마셔라 하는 동안 가족들이 굶주리고 있는 것에 분노한다.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라

또 다른 주인공 화영 역시 사정이 좋지 않으니, 월남한 친척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군관 자리에서 쫓겨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화영은 남한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그에게는 롤 모델이 있다. 1953년 귀순해서 지금은 미국 유학 중인 노금석 조종사다. 하지만 그때까지 월남에 성공한 사람이 그 하나밖에 없었다는 걸 고려해보면 화영의 계획은 지나치게 낙천적으로 보인다. 더구나 남으로 내려간 뒤 남한 특공대와 함께 미리 해주로 가 있는 여자친구 선경을 구하겠다는 계획은 반세기 전 천진난만했던 관객들도 안 믿었을 것이다. 화영의 계획은 당연히 성공하지 못한다. 그가 실존인물이고 성공했다면 그의 이름도 역사에 남았을 테니까. 해주로 가려던 선경이 체포되고 두 사람이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장면을 길게 묘사할 필요는 없다. 단지 형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친구를 낙현이 권총으로 쏴 죽이는, 어떻게 봐도 있을 수 없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는 점은 알려두는 게 좋겠다. 

그다음에야 낙현이 남한으로 망명하는 동기가 되는 결정적인 장면이 나온다. 3.15 부정선거로 시위가 시작되자 북한에서는 이를 선전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하는데 대충 사람들 반응이 이런 것이다. 
 
박소위: 거 알 수 없군. 남반부가 독재정치를 감행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반정부 데모를 한 달씩이나 계속할 수 있을까?
최소위: 글쎄 말야 데모를 할 정도면 어디 독재정치인가? 안 그래? 정 동무!
전소위: 아무튼 저쪽은 독재는 독재지만 좀 빈틈이 있는 독잰가봐!
이소위: 으흠! 흠!
박소위: 말이 났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경찰에게 돌이라도 던질 수 있는 아! 남반부는 얼마나 자유스러우냐 말야. 
이소위: (힘없이 들어와 앉는다)

망명하기 전에 멜로드라마가 마무리 지어져야 한다. 영화는 절반쯤 권선징악을 택한다. 영화에서 악역으로 등장한 정갑은 효숙의 아버지 강 의사를 폭행하다가 그만 죽이고 만다. 그는 살인죄로 체포되지만 이 시스템 밑에서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아직 알 수 없다. 화영과는 달리 현실적인 낙현은 효숙과 애처로운 작별을 한 뒤 고향을 떠난다. 

이 뒤에 이어지는 건 즉 이 영화의 본론, 낙현의 귀순 과정이다. 이 역시 첫 장면으로 묘사된 공중전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온갖 상상력을 다 발휘하고 있다. 얼마나 영화에 반영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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