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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상상극장]아스팔트

김기영, 1964

[시나리오상상극장]아스팔트 대표 이미지

이번 충무로뮤지컬영화제 프리페스티벌(ChungmCHIMFF 2015)의 폐막작은 영화가 아니라 시나리오 리딩 공연이었던 ‘<만추>를 읽다’였다. 혹시 보셨는지? 나는 영상자료원에서 했던 공연을 먼저 보았다. <만추>는 네 번이나 리메이크되었지만 이만희의 원본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우리가 이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녹음대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런 공연뿐이다.
 
<만추>를 읽다, 공연 현장
<만추>를 읽다, 공연 현장

이 칼럼에서 내가 맡은 역할도 필름이 사라진 영화를 재구성하는 일이니, ‘<만추>를 읽다’의 작업은 내 작업과 여러모로 겹치는 구석이 있다. 그렇다면 내 식으로 시나리오 리딩 공연의 작품을 선정해보면 어떨까? 몇몇 ‘거장’의 작품들을 놓고 고민한 끝에 김기영의 64년 작 <아스팔트>를 골랐다. <하녀>와 같은 걸작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결점이 많은 작품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낭송에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기영의 그 독특한 대사 톤을 따라 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후반부의 몇몇 액션은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대사의 비중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제목의 의미는 뭐냐고? 도입부의 내레이션을 보라. 
 
여기에 누가 어떻게 살고 있나 그건 아무도 모른다. 
검은 거미줄과 같은 아스팔트 길위로 서로 노리고, 
서로 겨누고, 아는것은 단 한사람 자기뿐일거다.

김진규가 연기하는 김 형사가 석원근이라는 강도를 체포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이런 대사들이 속사포처럼 튀어나온다. 
 
노파: 석원근의 어머닙니다. 
형사 머리 깐 죄는 얼마나 더 받아야죠? 
김형사: 공짭니다. 허나, 그 버릇 어머니가 가르쳐 주셨읍니까? 
노파: 모두가 내 죄지요. 그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론 짐승보다 다 가난해서 그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못 먹이고 깨끗한 옷도 못 입혀 애미 구실을 못했어요. 그래, 나쁜짓을 해도 염치가 없는것 같아 채찍을 못들었어요. 
김형사: 언젠가 절도로 잡힌 젊은 사람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살려달라기에 놔줬더니, 얼마 못가 살인을 저질렀읍니다. 말하자면, 내가 살인을 한 셈이죠. 그날부터 난 용서없이 죄인을 형무소로 보냅니다.

그리 사실적이라고 할 수 없는 대화지만 압축률과 속도가 엄청나다. 대화가 두 번씩 오갔을 뿐인데 벌써 김 형사가 어떤 인물인지 보인다. 
 

김 형사(김진규)

하여간 그는 20년 경력의 민완 형사이다. 범죄자를 잡은 상으로 받은 ‘양옥집’에서 아내, 애 둘과 함께 사는데 (잠깐, <하녀>와 공간과 설정이 은근히 비슷하지 않나?) 미국에서 과학수사를 공부하고 왔다는 인텔리 후배들에게 벌써 치이고 있다. 위의 대사가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체포되었던 석원근이 병원을 탈출해, 그 엘리트 후배 신 형사와 다시 잡으러 가야 한다. 

석원근의 집으로 간 두 형사는 그의 누이동생인 현숙을 만나는데 김기영은 이 캐릭터에게 오좀싸개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신 형사가 현숙에게 수작거는 대사를 들어보라. 
 
신형사: 아가씨, 별명이 오좀싸기라면서요? 
현숙: 처녀 쌍통 깨는군요! 
신형사: 절도를 저즐렀다면서? 
현숙: 향수가 탐이 났어요. 
신형사: 아--. 애인 때문에? 
현숙: 몸에서 냄새가 나서요. 이동리엔 목욕탕두 없거든요. 
신형사: 으-- 오좀 냄새 때문이군!

분명 신 형사는 현숙에게 호감이 있는데 이런 여자에게 한다는 소리가 “아-- 휴, 오좀냄새 나는구나! 하하하...”라니 참 김기영스럽게 원초적이라고 할 수밖에. 

척 봐도 석원근은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영화가 그의 가족에 집중하는 것은 김기영이 이 영화를 만들면서 그가 젊은 시절에 보았던 암흑가 배경의 30년대 프랑스 멜로드라마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상업적 타협을 할 수밖에 없어 중간엔 <케이프 피어> 비슷하게 변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에는 범죄자와 형사 가족의 일상 묘사가 기대보다 훨씬 많은 편이다. 신 형사와 현숙은 데이트를 하고 김 형사의 가족 묘사도 상당히 길게 볼 수 있다. 

그러는 동안 탈출한 석원근이 현숙의 밀고로 잡히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석원근은 형무소에서 최태원이라는 미치광이를 만났다. 그는 체포 과정 중 일어난 총격전으로 아내를 잃었는데 그는 곧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다. 그가 과연 자기 아내를 죽이고 그 사건의 상금으로 ‘양옥집’을 산 형사를 용서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는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화가 아니랄까 봐, 이 영화에서도 부동산 재산은 엄청 큰 무게를 가진다. 
 
김형사: 양옥집이 원수다. 
내가 상금을 받았다는 영수증처럼 자리잡고 있는 거다. 그때 나는 지휘자였고 내가 상금을 타고 내가 계급이 올라간것이 최태원 뿐만 아니라 세상이 내가 그의 처를 죽인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출옥한 최태원의 복수 목표가 그가 아닌 그의 아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셰익스피어스러운 독백이 하나 더 이어진다. 시나리오 리딩 공연이 현실화된다면 이 대사도 한번 듣고 싶다. 
 
김형사: 어쩌면 좋으냐! 어제까지 무서운 것이 없든 형사가 여편네를 죽인다는 바람에 고양이 머리처럼 아물아물하게 생각되고 열병을 앓고난것 처럼 내 팔의 힘을 뺏어갔다. 최태원이는 내 처를 죽이러 온다. 도망 보낼까? 안돼? 내 처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줄 순 없다.

김기영은 김 형사 역의 김진규 이미지가 지나치게 우유부단해서 미스캐스팅이었다고 불평했던 모양인데, 이런 독백들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고도 그렇게 생각한 건 좀 너무했던 거 같다. 이 영화의 김 형사는 더티 해리보다 햄릿에 더 가깝다. 그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결국 김 형사는 사표를 제출하고 경찰은 그를 미끼로 최태원을 잡기로 결정한다. 사방에 경찰이 깔리고 마침내 최태원은 그에게 협박 전화를 건다. 그와 아내가 ‘양옥집’ 테라스에 앉아 그의 표적이 되지 않는다면 살인이 일어날 것이다. 정말 총격이 일어나지만 셜록 홈스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던 게 분명한 트릭으로 김 형사의 부인은 목숨을 건진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부인은 가출하고... 그렇다. 또 독백이다. 
 
김형사: 처는 갔다. 처가 없는 생활, 그건 죽엄의 생활이었고나! 오늘 절실히 느꼈다. 세상에 의지했던 것이 싫거나 좋거나 내 처였다는걸 이제 생각하니 내 처에게 너무 무관심했고 너무 고생시켰어.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나의 처는 날 원망할지도 모른다.

이 뒤에 벌어지는 최태원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그렇게 재미있거나 설득력 있지는 않다. 하지만 시나리오 리딩에서 굳이 이 부분에 집중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김 형사의 가족 묘사(“난 이제 더 못먹겠어. 배가 부르니 대통령두 부럽지 않어!” 같은 대사를 하는 형사 아들 연기는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나 석원근 가족의 묘사는 건질 게 많을 것이며 여러 의미로 빵빵 터질 대사들도 많다. 그리고 김 형사 역의 배우에겐 앞으로 정복해야 할 수많은 독백들이 남아있다. 그의 마지막 대사도 독백이다. “내버려 두자, 울어본 사람이...” 하지만 이것까지 다 읽어줄 필요는 없겠지.
 
시나리오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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