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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세 가지 기억과 내가 바라는 독립영화

[칼럼]세 가지 기억과 내가 바라는 독립영화 대표 이미지

이 순간 두서없이 떠오르는 몇 가지 기억과 상념들이 있다. 먼저 몇 해 전, <행진하는 청춘>으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페드로 코스타에게 한 관객이 어떤 영화들을 즐겨보는지 질문한 적 있다. 이때 그가 어떤 감독들과 영화들을 언급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절대로 보지 않는다던 영화들은 기억난다. 그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주류 상업영화를 보지 않는다 했다. 그는 그러한 영화들을 불량 식품에 비유했다. 그 순간 관객들은 웃었지만, 그의 표정만큼은 정말이지 단호했다. 이것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굉장히 확신에 찬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지 아는 감독처럼 보였다.

그리고 얼마 전, TV 채널을 돌리다 경찰출두를 앞둔 김미화 씨의 기자회견 방송을 보게 됐다. 이미 신문기사를 통해 그녀의 회견에 대해 읽은 터였지만, 그녀의 발언과 표정에는 기사들에서는 읽어낼 수 없던 기개 같은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그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도 감정을 과잉 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역시 가장 강렬했던 그녀의 발언은 ‘저를 잃지 마십시오.’라는 것이었다. 이 멘트가 나에게 그저, 코미디언이자 방송인으로, 무심하게만 인식되던 그녀가 달리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당당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믿음과 실천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무엇보다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녀는, 무능하고 무력하며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언론노조보다 훨씬 더 훌륭해 보였다.

바로 어젯밤. 태준식 감독의 <당신과 나의 전쟁>을 보았다. 지난여름 벌어진 쌍용자동차 노조의 파업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한여름 폭염 속, 공장 내부에 고립된 노동자들의 숨 막히는 공포와 사투, 공정하지도 올바르지도 못한 세계에 대한 절규와 눈물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나의 막연한 예상은 빗나갔다. 이 작품은 노사협상이 끝난 이후, 내 기억 속에서도 ‘실패’라는 단어와 함께 쌍용차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버린 순간부터 시작된다. 해고자 명단에 없었음에도 점거투쟁을 끝까지 함께 해야 했던 서른세 살 가장의 현재적 삶의 모습. 그리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온 국민적 추모 열기 속에서 모두 외면당했던 그들의 투쟁. 무엇보다도 ‘산자’와 ‘해고자’로 분류되어, 어제의 동료가 하루아침에 구사대가 되어 점거투쟁을 벌이고 있는 그들에 대해 던지는 비난과 압박들(사측과 용역들은 고립된 노동자들을 향해 시종 ‘오, 필승 코리아’라는 응원가를 틀어대고 있었다. 카니발적 애국주의와 상업주의가 결합한 이 응원가야말로 그들의 절묘한 선택이자 상징이 아닌가?)이 가져온 비참과 울분.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던지는 가장 커다란 질문은, 왜 이 싸움이 ‘우리’가 아닌, ‘그들’의 싸움으로 치부되고 외면당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한국 사회에서 계급이라는 용어는 언제나 적대와 외면, 그리고 ‘구별 짓기(나 자신을 내가 속한 계급적 지반으로부터 구별 짓기)’의 이데올로기 및 감정을 수반한다. 이미 신자유주의의 모든 기획과 전략들이 우리의 일상까지 침투해 실행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온 국민의 대부분이 불안정 고용과 정치적 억압에 시달리는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라는 환상적 공동체는 나 자신의 계급적 혹은 정치적 지위에 대한 실제적 인식을 거부한다. 이러한 거부 혹은 환상은 쌍용자동차 노조의 싸움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을, 실업자들의 불안을 나와는 구별된 ‘그들’의 문제로 한정한다. 이러한 안이와 무지가 결국 내 삶의 위기로 닥친다는 것을 직시하지도, 상상하지도 않는다. 정말로 걸판진 싸움이 필요한 시기에, 정작 ‘우리’라는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왜 싸워야 하는지,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게 되고 만 것이다.

독립영화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위의 세 가지 기억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마도 영화에 관한 나의 사적인 편향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 영화를 통해 세상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었다. 60-70년대, 해방 영화를 선언했던 중남미의 다큐멘터리에 매혹됐고, 우리나라의 민주영화운동에 마음이 가닿았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그러한 믿음조차도 막연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어제, 태준식 감독의 <당신과 나의 전쟁>은 나의 오래된 기억들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것은 최근 몇 년 동안 각종 영화제와 심사를 계기로 접했던, ‘독립’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무수한 영화들(독립 단편인 경우, 대부분 학생영화들)에 대한 아쉬움과 상념으로 이어졌다. 

심사를 명목으로 수백 편의 출품작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 중 상당수의 작품이 거의 비슷하게 겹쳐진다. 반지하 단칸방, 취업문제, 연애문제, 빈곤, 일상적 폭력의 키워드들을 벗어나서는 설명되지 않을 만큼 중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그들에게 ‘사회적-구조적 모순’으로 인식되기보다는 그저 나에게 닥친 개인적 시련들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우울은 개인적 우울이지, 사회적 혹은 계급적 절망이 아니다. 이러한 자기침체는 무엇보다도 영화적 형식에 대한 자의식이나 혁신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러한 영화들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그것을 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질문하고 싶어진다. 독립이라는 이름이 주는 자유와 한계들이 있다. 그것을 무력함으로 소진하기보다는, 보다 도전적인 방식으로(그것이 정치적이던, 미학적이던, 기술적이든 상관없이) 도발하는 영화들, 단지 한두 편이 아니라, 하나의 ‘세대’를 이룰 만큼 무수한 실험과 기개, 창의성이 빛나는 그런 영화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지금 시대야말로 그러한 걸판진 싸움과 도전을 할만한 시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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