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페스티벌 진화론
한해 지구촌 곳곳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들을 어림잡아 헤아려도 그 수가 몇 백 개를 훌쩍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 우리에게 익숙한 몇몇 해외 영화제들을 굳이 꼽자면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행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와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비롯하여 예술 지향의 일본의 히로시마와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북미를 대표하는 캐나다 오타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그리고 세계 컴퓨터 그래픽스 역사의 궤적을 함께 그려온 미국 시그래프 컴퓨터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정도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영화제라 할 수 있겠다(물론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말이다). 이외에도 전 세계에는 수 없이 많은 영화제들이 그 나라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 위에 개성을 입혀 신선하고 톡톡 튀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애니메이션의 다양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며 축제의 장을 선사하고 있다.
정말 우연한 기회로 국내 어느 한 학생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로 시작한 영화제 인생이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났다. 처음 영화제를 시작했을 때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그렇게 덤벼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모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영화제 운영이 뭔지도 모르는 제로베이스에서, 소위 4대 영화제라고 불리는 페스티벌들의 홈페이지를 일일이 뒤져가며 그렇게 시작했으니 말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단 표현이 그저 적절할 뿐이다. 그래도 역시 세월만한 스승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영화제 프로그래머란 직업적 특성 상 세계 여러 나라의 페스티벌들을 다니며 작품들을 찾아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색다른 경험과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되는데 바로 이런 즐거움과 설렘이 지금도 내가 영화제를 계속하는 이유인 것 같다.
세계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담아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행사를 찾는 관객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참신한 작품들을 끊임없이 수혈하고 새로운 포맷을 제시하며 진화해 나간다. 실사 영화제들처럼 레드카펫 위에 세계적인 스타들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하는 것도 아니요, 세계 영화산업의 흐름을 좌지우지 할 만큼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지만, 여기에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마다 ‘변화’ 혹은 ‘지속’이라는 나름대로 지켜나가야 할 명제와 철학을 담아 행사를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때로는 잘나가던 페스티벌도 정체된 철학만을 고수하다 한계에 부딪치기도 하며 도태되기도 한다. 자그레브와 함께 가장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영화제 스타일을 고수해 왔던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지난 2004년 10회째를 고비로 산업 논리를 일부 수용한 마켓을 유치하면서 변화를 꾀했고, 2008년까지 비엔날레로 개최됐던 홀랜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연례행사로 전환하면서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안시 역시 수년전, 정체된 페스티벌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연간행사로의 변모를 꾀했고 상업지향적인 페스티벌로 전향하면서 다른 이종 행사와의 교류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애니메이션 페스티벌과 fmx행사와 같이 영화제와 컨퍼런스가 만나면서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 하이브리드적 페스티벌 포맷도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다. 이렇게 세계의 애니메이션 영화제들은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하는 애니메이션 환경과 장르를 수용하며 발빠르게 적응해 나가기도 하고, 뚝심과 열정으로 전통과 역사를 지켜나가기도 하면서 애니메이션의 활성화와 과거에 누렸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꿈꾸며 제 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여러 페스티벌들 중에서도 독특함과 세심한 친절함, 그리고 페스티벌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의 열정 때문에 그 매력에 흠뻑 빠져드는 영화제가 있다.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페스티벌이 보여주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개성 가득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프로그램과 함께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영화제가 갖춰야 할 덕목은 바로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해마다 그곳을 가면 오랜 친구를 만날 수 있고, 보고 싶은 작품들을 챙겨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영화제를 지속적으로 찾는 원동력이 된다. 이제는 고인이 되셨지만, 히로시마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가면 늘 뵐 수 있었던 분이 바로 퍼펫 애니메이션의 거장 카와모토 키하치로 감독이셨다. 그리고 시그래프에 가면 현존하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대가들을 모두 만날 수 있고, 영국 브래드포드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찾으면 영국을 대표하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거장 닉 파크 감독과 매혹적인 연필 드로잉의 조안나 퀸 감독 등도 볼 수 있다. 또 어느 영화제에서 운이 좋으면 <나무를 심는 사람>의 프레데릭 벡 감독과 잠시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된다.
페스티벌과 같이 성장하고 발전해 온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며 한 걸음에 달려와 열심히 참여해 주는 페스티벌들. 페스티벌이 변화의 기로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도 페스티벌의 존재 이유를 피력하며 끊임없이 진화해 나가고 있는 해외의 페스티벌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우리는? 어렵고 힘들게 쌓아올린 한국의 애니메이션 역사와 함께 지켜나가고픈 페스티벌을 우린 지금 만들어 가고 있는가? 변화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역사와 전통은 절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페스티벌을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과 애정이 있어야 하고, 다양한 비전을 보여줘야 관객들이 영화제를 계속 찾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변화에 성공한 영화제들에서 그런 의지와 열정을 읽었다. 해마다 규모가 쪼그라드는 국내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우리도 안시나 히로시마, 시그래프 행사들처럼 오랫동안 지켜나갈 가치가 있는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제의 대표선수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