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만화영화에도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이 있다 :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
우리나라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캐릭터 중 대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캐릭터는 무엇일까요? 유아 타겟인 ‘뽀로로’를 말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둘리’라고 할 겁니다. 1983년부터 보물섬에 연재되어 지금 40대 중반에 이른 어른들도 익히 알고 있는 캐릭터이면서, 두 번에 걸친 TV애니메이션 시리즈와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통해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 캐릭터입니다. 특히 20년 만에 새로 제작되어 올해 선보인 TV애니메이션 시리즈는 괄목할 만한 시청률을 보이면서 21세기에 태어난 어린이들에게도 둘리를 또렷하게 알렸습니다. 새 시리즈 방송과 함께 선보인 여러 관련 상품들도 우수합니다. 둘리와 또치, 도우너, 희동이 봉제인형은 그간 국내에서 제작한 어떤 캐릭터 봉제인형보다도 높은 완성도를 보였습니다. 이렇게 애니메이션을 뛰쳐나온(?!) 둘리는 제 딸내미 침대에 자리 잡고 앉아 사랑받는 캐릭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헌데 둘리에는 비록 봉제인형으로 나오지 못했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진 캐릭터가 있습니다. 둘리 일당이 세 들어(?!) 사는 집주인 ‘고길동’ 입니다. 인상만 본다면 약간 심술궂게 생겼고 전반적으로 평범해 보이는 하찮은 동네 아저씨 모습입니다. 이런 캐릭터를 봉제인형으로 만들었다간 무슨 욕을 먹을지 모르죠. 하지만 작품 내에서의 비중은 만만치 않습니다. 때로는 둘리 일당을 가로막는 악의 축으로, 때로는 둘리 일당에게 골탕 먹는 불쌍한 어른으로, 아주 가끔 아빠로서의 모습도 보여 주면서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특히 이번에 방송된 새 시리즈를 보면서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아기공룡 둘리’를 엣지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캐릭터가 고길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고길동의 복합적인 성격과 극중 역할은 절묘합니다. 아이들 눈높이인 주인공 캐릭터들과 체면불구하고 툭탁거리는가 하면, 우리나라 특유의 가부장적 권위도 보여줍니다. 거기에 더해 출신도 불분명한 둘리 일당을 재워주고 먹여주는 거의 부처 수준의 자애로움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풀어서 보면 괜히 성격이 복잡한 캐릭터가 아닌가 싶지만 그 복잡함이 하나로 묶이는 고리가 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국형 ‘아저씨’ 캐릭터라는 겁니다. 권위를 내세우지만 아이 같은 내면이 있고, 정이 있는 중년 남자. 이렇게 다시 정의해보니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저는 당장 ‘삼촌’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아마도 제 조카들이나 딸내미는 저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고길동 캐릭터는 만화 캐릭터인 만큼 거의 한계치까지 과장되어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때 독자와 시청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끼죠.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이른바 ‘명랑만화’ 속 캐릭터니까요. 하지만 그 뼈대는 아주 일반적인 우리네 아저씨라는 것에 다시 한번 주목하게 됩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서 제작되고 있는 애니메이션을 평가하는 잣대가 ‘수출’이란 분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외국인의 눈과 유머에 맞추고자 하는 작품들이 기획됐죠. 이런 작품들의 기획서를 보면 나름 어디서나 통할 것도 같다는 긍정적인 느낌도 오지만, 왠지 정이 가지 않는다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또 재미가 부족해 보인다는 느낌도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무조건 재미가 있어야 하니까요.
우리가 재미있어야 다른 이들도 재밌어 합니다. 지금까지 해외에서 인정받은 우리 애니메이션은 우리의 정서가 듬뿍 담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캐릭터도 마찬가지고요. 이번 둘리 새 시리즈가 외국에 수출된다면, 그 나라 더빙PD는 아마 ‘고길동’ 캐릭터에 둘리보다 더 주목할 것 같습니다. 둘리 유머코드의 핵심 캐릭터로 파악하고 말입니다. 주연이 아닌 조연 캐릭터이며 흔한 아저씨 정서인 ‘고길동’. 하지만 이 고길동이 있기에 둘리가 재미있고, 나아가 외국에도 자랑할 수 있는 우리 애니메이션의 엣지가 완성되지 않나 싶습니다. 앞으로 기획, 제작되는 우리 애니메이션에 고길동 같은 캐릭터들의 재미난 활약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