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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용삐용B무비]몽마르트 언덕의 상투
강대진, 1987
최근 개봉한 <집으로 가는 길>을 봤다. 안타까운 사연에 눈물도 많이 났지만, 다른 면으로는 우리나라 영화도 해외 로케이션이 많이 자연스러워졌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파리, 마르티니크 섬이 서울 쪽 연출과 어색하지 않게 연결이 되고 있었다. 프로덕션의 방식과 과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겠고 연출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었으니, 한국 최초의 파리 올 로케이션 영화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다. 제목부터... 살벌하다.

곱슬거리는 정동환의 수염
상투를 튼 정동환이 피리를 불고 있다. 그런데 그의 입 주변에 난 수염이 뭔가 살바도르 달리스럽기도 하고 하여간 조선사람 몸에서는 안 나올 듯한 꼬불꼬불한 수염이다. 뒤에 바라보는 외국인 부자(어쩌면 모자일지도 모른다)의 미묘한 표정은 또 뭔가.
이 한 장의 이미지가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를 대변한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은 일반 시민들에겐 요원한 이야기였다. TV, 영화를 통해 접하는 해외의 모습이 전부였을 것이다. 영화 제작 시 해외로케이션에 대한 열망은 당연하다고 느껴진다. 올림픽을 목전에 둔 1987년, 세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채비를 갖추던 한국인. 우리와는 생김새가 다른 외국들의 땅에서 활보하는 대한 남아(혹은 여아)의 모습을 당당하게 스크린에 담아 오겠다는 야심!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는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작자는 거기 갈 생각만 했지, 가서 뭘 할지는 충분히 생각하지는 못한 것 같다.
제목이 < OK 목장의 결투 >를 닮았지만 별로 비슷한 구석은 없는 영화다. 1987년에 개봉된 강대진 감독(제작자로 유명한 강대진 감독과는 동명이인이다.)의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는 앞서 말했듯 ‘한국 최초의 파리 올로케이션’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지금까지 안방극장의 지지않는 해로 존재하는 정동환과 <애마부인> 하나로 모든 것을 평정했던 안소영이 투톱으로 출연한다.
아마도 빈센트 미넬리의 <파리의 미국인>을 느슨하게 가져오지 않았나 싶은 이야기다.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파리 유학을 떠난 진호(정동환)는 그곳에서 개인전을 여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다. 하지만 그의 파리 생활을 첫 도착부터 순탄치가 않다. 그가 신세를 지기로 한 황 화백의 집에서, 과거 미대 동기이자 연인이었던 희정(이진경)이 반라의 차림으로 나오는 것을 본 그는 파리에서의 첫 번째 좌절을 경험한다. 그녀는 돈 많은 재일교포이자 상업 작가인 황 화백의 재력과 박력에 넘어가 그와 함께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호는 이에 실망하고 곧 혼자 레스토랑 서빙을 하면서 그림 작업에 몰두한다. 그의 열정은 ‘다다이즘 거장’ 삐숑 선생님의 마음을 열게도 하는데, 한 달에 한 번 자신의 그림을 평가해달라는 진호의 부탁을 거절하자 그는 외친다.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러니 삐숑 선생님의 가정부가 감동하고 3초 만에 설득하여 그의 청을 받아주게 된다.(다다이스트들이란!)
이제 곧 개인전을 열 것 같이 꿈에 부푼 진호는, 아르바이트하는 레스토랑에서 만난 윤 여인(안소영)에게도 호감을 가진다. 그녀에게 모델을 제안하자, ‘사생활에 대해선 절대 묻지 말라’며 조건부로 제안을 수락한 윤여인은 급기야 누드모델까지 허락하지만, 술 취해 그녀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그에게 다시는 연락 말라며 매몰차게 내친다. 그렇게 두 번째 좌절.
이후로는 좌절의 연속이다. 아니, 그냥 외국인 부랑아라고 해도 좋다. 이 부분에 대한 연출이 꽤 재미있는데, 진호는 파리 내의 관광 명소들을 골라가며 방황을 한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려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센 강 인근에서 술을 마시며 방황을 하며, 길거리에서 정치, 문화를 이야기하는 청년들에게 한국인의 세계사 지식을 뽐내기며 먹을 것은 얻어먹기도 한다. 진호의 방황을 핑계로 파리의 관광코스를 쭉 훑은 영화는 급기야 그를 프랑스인들의 새해 행사인 성 실베스트리의 날에 등장시켜 들뜬 사람들 사이에 혼자 심각하게 서서 술을 들이키게 한다. 그런 그의 방황은 한 창녀에게 이끌려 갔다가 바지가 벗겨지면서 끝난다. 이건 아니야! 이래선 안 돼! 바지춤을 부여잡고 창녀의 집을 나서면서 본인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순간, 진호는 자신의 방황에 대해 반성하고 정신을 차리지만, 영화를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탄식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그림 그리기
그런 방황 중 우연히 버스킹을 하는 거리 예술가들을 본 진호는 기발한 생각을 해내게 된다. 몽마르뜨 언덕에 위치한 계단에서 한국 전통의 의상과 악기를 통해 색다른 문화를 선보이며 호객을 해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이를 통해 유명해진 진호는 파리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개인전 의뢰를 받게 되고,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이에 때맞춰 희정도 황 화백을 떠나 진호에게 돌아오고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개인전은 사실 윤 여인이 뒤에서 진호를 위해 기획한 것이었다. 근본도 알 수 없는 한국인 미술대생의 개인전을 개최하기 위해 윤 여인은 화랑 주인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던 것이다.(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윤 여인은 화랑 주인에게 눈물을 흘리며 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진호는 윤 여인의 집을 수소문해 찾아가 충격적인 장면을 본다. 윤 여인이 사생활에 대해 알리기를 극구 꺼린 것은 장애인 남편을 수발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휠체어에 앉아 선글라스를 낀 남자를 수발하는 윤 여인을 멀리서 바라보던 진호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랬군요. 그랬었군요. 멀찌감치서 그녀를 보던 진호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다. 그때, 윤 여인은 진호를 불러 세우고, 둘은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 영화는 유럽에 대한 예술적인 동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멜로 영화다. 물론 그 만듦새가 탄탄하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는 주인공 진호가 그렇듯 일단 외국에 나가긴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야기는 중구난방이고 인물들은 저마다 심리적이든 물리적이든 모두 헤맨다. 비밀을 가진 듯 행동하는 윤 여인의 사정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이고 영화의 라스트씬에 가면 저 여자는 뭐하는 여자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말하자면, 80년대 우리가 ‘외국’, 특히 ‘유럽’을 생각하면 떠오를만한 이미지들을 대충 엮고 그 위에 ‘한국의 미술 대학생’을 쑤셔 넣은 영화가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되겠다. 그래서 그 충돌이 재미있다. 이 글 초반에 올라가 있는 사진처럼, 미묘하게 안 어울려 충돌하는 이미지와 행동들이, 세계에 편입되고 싶은 대책 없는 욕망이 끓어오르던 80년대 중후반의 당시의 모습을 비춰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거지가 만든 두 세계의 이상한 만남. 이후로 세계는 급속히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인다. 진짜로 그렇게 되고 있는지는 뭐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동환
안소영
감독: 강대진
각본: 박철민
개봉극장: 스카라
관람인원: 4,618(서울)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