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삐용B무비
[삐용삐용B무비]특명
김선경, 1976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라는 제목이 박노식 감독의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1976)에서 온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미처 몰랐지만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8)와 최호 감독의 <사생결단>(2006)도 각각 과거 독고성, 장동휘 주연, 이신명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65)와 이두용 감독의 <사생결단>(1975)이 있음도 알게 됐다. 그렇게 재미삼아 찾다보니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2007) 이전 김수용 감독의 반공영화 <추격자>(1969)와 김선경 감독의 ‘짝퉁’ 합작 액션영화 <추격자>(1979)도 발견하게 됐다. 사실 류승완 감독의 경우처럼 장르적 자의식이 새겨진 제목 모방은 아니겠지만, 어쨌건 무척 흥미로웠다.

같은 제목 다른 영화 포스터들
그러면서 다소 덜 알려진 B무비 감독 김선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특히 <추격자>는 사운드트랙 ‘Run and Run’은 물론 올리비아 핫세가 다소 육감적으로 등장하여, 올드팬들에게는 지금도 굉장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탈리아 B무비 <섬머타임 킬러>(1972)의 주인공 크리스 미첨(로버트 미첨의 아들)이 출연한 영화이기도 하다. 소련에 있는 한 한국 과학자가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고, 미국 CIA 요원(크리스 미첨)이 그의 망명을 돕는다는 내용의 첩보액션영화였다. 멋진 태권 액션을 선보인 권부길이 크리스 미첨의 태권도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캐스팅이 이뤄졌고, 재미교포가 제작자였기에 한미 합작영화라는 타이틀이 붙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김선경은 <잘 살아다오 내 딸들아>(1972)로 데뷔했는데 이형표, 최영철, 김시현, 고영남, 이혁수, 김정용 감독의 경우처럼 장르를 가리지 않았던 한국 장르영화 감독 계보에 포함시킬 만한 인물이다. 조감독으로는 김시현 감독의 <필살의 검>(1969)에 참여하기도 했다. 데뷔 이후로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항일 액션영화 <빌리쟝>(1974)을 시작으로 <흑룡>(1975), <밀명객>(1976), <흑룡강>(1976), <금호문>(1977), <무림대협>(1978), <노명검>(1980), <산동반점>(1982), <산동여자물장수>(1983) 등 주로 권격 액션영화나 한홍합작 액션영화들을 만들었다. 가공할 뱀떼가 등장하는, 아마도 실제 동원한 뱀 숫자만으로 기네스북에 올라도 될 법한 동물 공포영화 <인사대전>(1983)도 떠오른다.
주로 트렌드에 편승한 액션영화들을 만들긴 했지만, 그의 영화들은 나름의 선 굵은 액션 연출과 이야기 전개로 독특한 매력을 풍겼다. 특히 호쾌한 발차기가 일품이었던 액션배우 왕호가 주연을 맡은 <밀명객>과 <흑룡강>이 그러했으며, 이를 통해 왕호는 홍콩 골든하베스트로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영상자료원에서 영화제를 통한 필름 상영이 아닌 VOD나 DVD로 감상 가능한 김선경의 액션영화는 <특명>(1976)과 <산동여자물장수>(1983) 정도다. 최근 TV 드라마를 통해 다시 주목받은 캐릭터 ‘각시탈’이 최초로 등장했던, ‘권격영화의 결산시대가 왔다’는 당당한 카피와 함께 김추련이 각시탈로 출연한 <각시탈 철면객>(1978)도 그의 영화다. 영상자료원에 DVD가 있는 것으로 검색되지만, 영상자료실에서 재생해본 결과 왕우가 등장하는 엉뚱한 액션영화였다(자료원 담당자 분께서는 꼭 참고해주시길).

라호용의 첫등장과 한참 후의 얼굴 공개
김선경 감독의 영화들 중 베스트 서너 손가락으로 꼽긴 아쉽지만, 어쨌건 <특명>은 그의 전체적인 스타일을 가늠할 수 있는 여러 단서들을 던져준다. 용(라호룡)은 독립군인 아버지 황대인을 잃고 한 도사 밑에서 자랐는데, 이제 그는 독립군의 지령을 받아 아버지가 목숨을 잃으며 탈취당한 불상을 찾으러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현주(김정란)가 자신의 정혼자였음을 알게 된다. 주인공 라호룡은 김선경 감독이 야심적으로 발굴한 배우로, 액션을 시작하기에 앞서 목을 쭉 빼고 자세를 낮춘 포즈가 독특하다. 하지만 역시 액션스타도 ‘얼굴’이 중요해서인지 <특명> 이후 그의 별다른 활약상을 들어본 적 없어 안타깝다. 현주를 연기한 김정란은 태권도 3단으로 홍콩 쇼브라더스로 진출해 <여신탐>(1976)을 찍기도 했으며 성룡이 한국에서 촬영한 <사학비권>(1978), <오룡대협>(1978) 등에 출연했다. <여신탐>에서는 홍콩경시청의 요청으로 홍콩으로 파견된 한국 여경이었다. 당시 ‘한 액션’했던 대표 여배우 중 하나였으며 <애권>(1980)에서는 사부(배수천)의 애권 연마를 도운 화류계 여자였다.
기본적으로 ‘불상’을 ‘금괴’로 바꾸면, <특명> 역시 당시 전세계적인 트렌드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셀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1964), 그러니까 이만희의 <쇠사슬을 끊어라>(1971)나 <용호대련>(1974) 등 이두용 감독의 태권액션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파게티 웨스턴’의 변형에 가깝다. 가짜 불상이 판 치고, 서로 다른 세력들이 주인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암투를 벌인다. 영화 속 누군가의 대사처럼, “불상을 노리는 사람이 많지만 불상이 하나뿐이라는 게 비극”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영화에서, 흑장미를 협박하며 “5분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흑장미가 똥장미가 될 줄 알아라!”라는 식의 언어유희도 빠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특명>은 이두용 감독의 영화들처럼 만주 독립군들이 가죽점퍼에 나팔바지를 입고 화려한 발차기를 구사하는 ‘무술 레지스탕스 영화’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수원화성 표현주의, 아수라 백작, 꺽기도 스타일
수원 화성을 무대로 펼쳐지는 후반부 심야의 추격 결투신은 거의 표현주의적인 명장면이다. 불상을 찾으러 나타난 아수라 백작 스타일의 선글래스 쓴 금발 남자를 비롯해, 성곽 이곳저곳에서 총을 겨누고 뛰어내리며 옥죄어오는 악당들의 위압감도 좋다. 그런 가운데 주인공은 느닷없이 <개그콘서트>의 ‘꺾기도’ 스타일로 느닷없이 ‘대’자로 드러누우며 적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이후 현주가 자신의 오래전 정혼자임을 알게 된 순간 찾아오는 황당한 연애장면들(사이좋게 자전거 타고 가다가 괜히 쓰러지는 그런) 만큼이나 당황스럽지만, 어쨌거나 설득력은 있다. 실력도 없는 사람이 비현실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니니까. 나중에 다나까(박동룡)의 본거지를 습격할 때의 활력도 좋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쫓고 쫓기는 가운데 느닷없이 ‘쌍부채’ 액션을 펼치고, 급기야 모터사이클에서 뛰어올라 악당(권일수)에게 날아 차기를 후려갈기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이때도 멈춘 오토바이의 돌아가는 굉음은 멈추지 않는다. 승부는 끝났으되 관객의 감각은 여전히 열려있다는 액션영화 연출의 장인적 감각인 것. 그렇게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고서야 주인공이 사실은 멀쩡하고 의협심 강한 ‘태권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요즘 사람들이 래프팅 하러 많이 가는 동강 혹은 한탄강에서 작별하는 장면을 끝으로, 그때서야 영화 제목이기도 한 ‘특명’을 받들어 떠난다. 그러니까 영화는 주인공이 비로소 ‘특명’을 받기 전까지의 이야기인 것. 한 송이 특명을 받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안타깝게도 인용하고 보니, 영화의 정서와 반대로 서정주 시인의 친일 논란을 불러일으킨 시의 한 구절일세).
라호룡
김정란
감독: 김선경
각본: 최영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