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삐용삐용B무비]하피

라호범, 2000

[삐용삐용B무비]하피 대표 이미지

2000년은 한국 슬래셔 영화계의 원년이었다. 갑작스레 한국형 슬래셔 영화 네댓 편이 동시다발적으로 개봉을 했다. 대체 왜? 그게 다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 탓이다. 덕이 아니다. 탓이다. 
 
다 내 탓이오
다 내 탓이오

고등학생들의 살인을 다룬다는 이유로 수입이 금지됐던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1996)은 1999년 뒤늦게 개봉했다. 슬래셔 영화는 장사가 안 된다는 시장의 법칙에도 불구하고 이 끝내주는 메타-호러영화는 서울에서만 3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같은 해 개봉한 <스크림 2>역시 서울 관객 17만을 동원했다. 1999년으로서는 꽤 괜찮은 성적이었다. 두 영화의 성공을 보며 충무로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그즈음 충무로 제작자들이 입봉 준비 중인 신인감독들을 커피숍에서 앉혀놓고 했을 법한 대화를 한번 상상해보시라. 

“어이 김 감독, 요즘 시나리오 하나 쓰고 있다고?” “네. 대표님. 끝나면 보여드리겠습니다. 고다르적인 영화적 개념을 상업적으로 한번 풀어보려고….” “에이 그걸로 언제 입봉하려고? 마흔 돼서? 그러지 말고 공포영화부터 하나 만들어서 돈부터 번 다음에 김 감독 하고 싶은 거 해” “공포….영화요? 저 공포영화 무서워서 못 보는데…” “에이. 포르노는 뭐 섹스 잘하는 놈만 만드나? 그 뭐더라 ‘스크림’인가 그거 봤어? 그거 비슷하게 하나 만들면 무조건 되는 거야. 이거 잘 되면 내가 김 감독 지금 쓰는 걸로 꼭 영화 만들어줌세”. 오오 통제라.
 
2000년을 수놓은 슬래셔 영화들
2000년을 수놓은 슬래셔 영화들

여하튼, 2000년 여름에 개봉한 한국형 슬래셔 영화는 <가위>, <찍히면 죽는다>, <해변으로 가다>와 <하피>다. 이 중 성공한 건 안병기라는 장인의 대표작인 <가위> 하나뿐이다(서울 관객이 30만이 넘었다). <해변으로 가다>는 할리우드 슬래셔 영화의 가장 심심하고 슴슴한 오마주로 남았다. <찍히면 죽는다>의 부제는 ‘또 찍으면 죽는다’로 공식화하는 게 마땅하다. 그렇다면 <하피>? 이게 좀 문제다. 다들 이 영화를 <맨데이트: 신이 주신 임무>(2008)와 함께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졸작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 영화에 관한 거의 유일한 리뷰라고 할 수 있을 네이버 독자 리뷰 하나는 “나중에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원본 필름을 없애야 합니다”라고 절규하며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런 리뷰도 영화를 본 적이나 있어야 쓸 일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하피>라는 영화를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보기는 쉽지 않을 거다. DVD를 출시할 만큼 배짱 있는 제작사도 없고, 무엇보다도 주연인 김래원과 이정현이 DVD의 출시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게 어떤 영화냐고?
 
수연, 현우, 예림
수연, 현우, 예림

내용은 아주 간결하다. 전반부에서는 모범생 수연(이정현)과 불량소녀 예림(김꽃지)이 양아치 현우(김래원)을 둘러싸고 연애질을 벌이다가, 중반부에서는 세 명이 주축을 이루는 영화동아리(대체 이딴 세 명이 왜 영화 동아리의 주축 인물인지는 미스터리미스 어쨌든….)가 단편공포영화를 만들러 외딴곳으로 가고, 후반부에서는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아마도 장르 영화광이었던 모양인 라호범 감독은 심지어 90년대의 가장 핫한 단체인 ‘대학 영화동아리’를 배경으로 설정한 뒤 일종의 메타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정말 못 만든 영화다. 하지만 못 만든 영화가 어디 한둘이던가. 못 만들었기로 말하자면야 같은 해 개봉한 <찍히면 죽는다>가 더 격렬하게 못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찍히면 죽는다>는 컬트가 되지 못하고 <하피>가 일종의 컬트가 된 이유는, 이 못 만든 영화를 못 만든 스태프들이 어떻게든 ‘일부러 못 만든 영화’처럼 보이려 편집실에서 행한 놀라운 투쟁 덕분이다. 

아마도 스태프들은 <스크림>을 대충 흉내 내면 꽤 근사한 한국형 슬래셔 영화가 나올 거라 생각했을 거다. 막상 다 찍어놓고 보니 그렇지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대의 성우 이선영을 뒤늦게 섭외해서 내레이션을 깔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아 <하피> 내레이션의 오묘한 힘은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다. 현우(김래원)가 살인마의 목을 쇠사슬로 조르는 장면에서 “아저씨는 왜 저렇게 괴로워할까? 쇠사슬이 아니라 플라스틱 소품일 뿐인데”라고 이선영의 내레이션이 흐를 때, 2000년 여름의 극장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한번 떠올려 보시라. 

* 내레이션 컬렉션 *
 
“잠깐, 이 영화의 모든 끔찍한 장면은 고등학교 영화 동아리가 제작하는 공포영화의 표현이므로 실제 살인과는 무관하다”
“잠깐, 이 영화의 모든 끔찍한 장면은 고등학교 영화 동아리가 제작하는 공포영화의 표현이므로 실제 살인과는 무관하다”
“아이들은 나이트클럽이 콜라텍인 줄 알고 왔다. 아이들을 속이는 건 어른이다”
“아이들은 나이트클럽이 콜라텍인 줄 알고 왔다. 아이들을 속이는 건 어른이다”

 
“담배가 많이 등장하지만 이건 다 소품일 뿐이다”
“담배가 많이 등장하지만 이건 다 소품일 뿐이다”
“이 줄은 사실 플라스틱이다. 따라서 임산부나 노약자가 놀랄 필요 없지만 이 여자의 연기를 흉내낼 필요도 없다.”
“이 줄은 사실 플라스틱이다. 따라서 임산부나 노약자가 놀랄 필요 없지만 이 여자의 연기를 흉내낼 필요도 없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잠깐, 이 영화의 모든 끔찍한 장면은 고등학교 영화 동아리가 제작하는 공포영화의 표현이므로 실제 살인과는 무관하다”는 내레이션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은 걸까. “아이들은 나이트클럽이 콜라텍인 줄 알고 왔다. 아이들을 속이는 건 어른이다”라는 내레이션은 공익광고에 대한 스태프들의 준엄한 농담인 걸까? “담배가 많이 등장하지만 이건 다 소품일 뿐이다”라는 내레이션은 추후 한국 TV에서의 방영을 염두에 둔 일종의 검열적 예언일까? 내레이션으로는 부족했던지 스태프들은 후반 작업에서 효과음으로도 농담을 시도한다. 단추가 떨어지면 엔진음이 나온다. 농구공이 골대를 맞으면 “띠오오옹”하는 만화 속 효과음이 나온다. 이거 내가 지어내서 쓰는 게 아니다. 정말로, <하피>에는 그런 내레이션과 효과음이 끝도 없이 나온다. 

아마도 <하피>의 제작진은 편집실에서 첫 번째 편집을 하던 중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공멸하느니 차라리 웃기기라도 하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라호범 감독은 이런 식의 메타장르영화적 농담이라도 넣으면 헛발질에 유독 열광하기 쉬운 극소수의 비평가와 장르광들이 상찬하고, 그 덕에 어찌어찌 다음 영화라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최종 편집실에 모인 스태프들의 가당치도 않은 모험은 결국 <하피>를 몇 안 되는 한국형 컬트영화 중 하나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김완주 전주시장. 노력했으나 영화 속 출연장면 찾지 못함.
당시 김완주 전주시장. 노력했으나 영화 속 출연장면 찾지 못함.

사족으로, <하피>는 전주에서 촬영된 가장 최초의 영화 중 하나다. 당시 전북도민일보에는 전주시장의 첫 번째 영화 출연이라는 기사가 났다. 기사는 “김완주 전주시장은 문화영상산업의 도시, 전주를 알리기 위해 빅히트가 예고되는 영화 <하피>에 출연하게 됐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돼 “시장의 영화출연으로 이정현 양을 비롯한 유명영화 배우와 출연진 모두를 전주시의 홍보요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김 시장은 ‘테크노의 요정 이정현 양을 지도하는 체육교사’를 연기했다. 당시 전주 지역의 흥행 성적은 KMDb에 남아있지 않을 터인데, 전주시청 공무원 수만큼의 흥행 성적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누구든 테크노의 요정 이정현양을 만나면 나 대신 누가 좀 물어봐 주시길. 당시 <하피>의 시사회장에서 이정현과 김래원을 비롯한 주연배우들이 영화가 너무 민망했던 나머지 도망가버렸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여전히 확인할 길이 없다. 

이정현
김래원
김꽃지

감독: 라호범
각본: 권소연

개봉극장: 피카디리 등
관람인원: 26,591명


	하피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