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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용삐용B무비]퀵맨

이혁수, 2002

[삐용삐용B무비]퀵맨 대표 이미지

2000년대 초반은 여러모로 참 재미있는 시기였다. 세계 종말도 Y2K도 없었다. (있었어도 나 같은 서민은 모를 정도로 능력자분들이 잘 처리해 주셨다.) 그렇게 맞이한 밀레니엄에서 사람들은 뭔가 해방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2000년 이후의 삶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이전과는 다른 문화현상들이 나타났고, 이전부터 근근이 이어지던 서브컬쳐들이 폭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영화계에서도 그런 모습은 다르지 않았는데 과격한 상상력과 놀라운 실행력이 결합된 재미난 작품들도 많았다. 그런 경향의 일부였던 <씨어터>와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를 본 코너에서 소개하기도 했었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이들 젊은이들의 재기가 꽃피우던 시기에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려 고독하게 16mm 카메라를 다찌마리로 수놓았던 어느 노감독의 마지막 영화에 대한 것이다.

2003년 8월 21일 주간지 ‘일요 서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퀵서비스 배달원의 애환을 그린 영화 <퀵맨>이 최근 극장에서 개봉 돼 화제다.”

이 문장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 <퀵맨>은 퀵서비스맨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 직업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둘째, 개봉됐다는 언급은 있지만 정확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KMDb에는 개봉 날짜 및 관람객 수 표기란이 아예 비어있고 네이버 영화에는 2002년 개봉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위의 기사는 2003년 기사... 도시 전설이 보통 이런 식으로 탄생하곤 한다. 게다가 ‘화제’였는지도 불분명하다. 정말 <퀵맨>은 화제였는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화제’는 일반 관객이 아니라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 영화는 1967년 <새벽길>로 영화인생을 시작해 1996년 <알바트로스> (그렇다 차인표, 이휘재의 국방부 퀘스트였던 그 영화다.)까지 쉼 없이 달리던 그가, 6년의 공백 끝에 발표한 영화기 때문이다.

이혁수라는 이름은 뭐랄까. 임권택도 남기남도 아니지만 상당한 다작에(KMDb 등록 감독작이 51편이다) 나름대로 인정받는 흥행작, 장르의 걸작도 필모에 몇 편 포함되어있는 (그 중 42번째 영화이고 86년에 연출한 <여곡성>은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한국 공포영화의 클래식이다.) 감독이다. 그는 결코 거장도, 연타석 안타의 흥행 마술사도 아니었지만 영화인으로서 오랜 시간 갈고닦은 연출력을 통해 장르 영화의 구조를 튼실하게 구축할 줄 아는 감독이었던 것 같다. 그의 필모에는 권격 영화, 호러 영화, 사회 고발, 코미디 등 여러 장르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액션영화 연출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한 때는 흥행사로 불리기도 했다. ‘삐용삐용 B무비’의 다른 필진인 주성철 기자가 소개했던 <애권>에 언급되었던 ‘웃겨서 죽여버리는 권법’이 등장하는 <소권>이 이혁수 감독의 작품이며 이 작품은 장르 팬들의 애정을 받는 영화다.

<퀵맨>은 그런 이혁수감독이 2000년대에 들어 연출한 유일한 영화다. 영화가 제작된 2002년 당시는 디지털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고(한국 디지털 에로영화의 춘추전국시대가 바로 이 시기였다. 클릭 엔터테인먼트와 봉만대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던 시기.) 한국 영화계에 ‘새로움’이라는 화두가 실제로 눈에 펼쳐지기 시작하는 때였다. 그러나 이혁수 감독은 <퀵맨>을 16mm 필름으로 찍고, 등장인물은 퀵서비스 기사와 사악한 기업의 부사장이지만 영화의 골격은 무협영화를 그대로 따라가는 권격 영화로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 놀라운 반전까지.

모델인 승희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뛰어난 미모 덕에 급상승 중이다. 그러나 업체 관계자들과의 술자리, 에이전시의 무리한 요구에 염증이 난 승희는 일을 그만두고 본인의 전공을 살려 미술학원 강사로 돌아간다. 한편, 코리아유통의 오 회장은 ‘코브라’라고 불리는 암살자에게 살해 당한다. 그는 사망 전 유언 동영상을 남겨 자신이 어릴 때 버렸던 유일한 혈육 ‘오승희’를 찾아 자신의 전 재산을 상속해 주기를 당부한다. 이 유언을 본 고문 변호사 문 변호사와 부사장 태욱은 ‘오승희’의 사진 한 장을 그 가지고 그녀를 추적한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다르다. 문 변호사는 오 회장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 그녀를 찾지만, 태욱은 그녀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오 회장을 ‘코브라’에게 사주해 살해한 것이 태욱이기 때문이다. 회장을 살해하고 기업을 통째로 먹으려던 태욱에게 몰랐던 승희의 존재가 매우 성가신 것이었다. 태욱은 기어코 승희를 찾아내고야 만다. 위기에 빠진 승희는 우연히 만난 퀵서비스 기사 성민의 도움을 받게 되고 이 둘은 사랑에 빠진다.

적어놓은 줄거리만 보면, 적당한 액션 영화가 될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다. 실제로 이런 식의 이야기기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를 주무르는 자의 ‘감각’과 추구하는 ‘방향’이 영화의 모양을 결정한다.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이 <퀵맨>을 어디에서든 검색한다면 많은 정보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몇 안 되는 포스팅에서 이 영화가 ‘괴작’이라고 불리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어느 시대에나 통할 법할 이야기를 현재시제의 상황으로 변형시킨 뒤, 감독 본인이 가장 잘했던 시절의 연출을 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 영화의 마지막은 암살의 실행자 ‘코브라’와의 결전이 아니다. (진짜로 멋지게 찍힌) 성민 최후의 결투는, 영화 내내 이태리제 소파에 앉아 암살자에게 지시를 내리던 부사장 태욱과 이루어진다. 이것은 마치 한 명씩 적들을 격파하며 올라가는 옛 무협영화의 공식이다. 게다가 성민이 위기에 빠지자 수많은 오토바이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등장해 벌이는 깡패와 퀵서비스맨의 패싸움 장면은 마치 위험에 처한 사형을 구출하기 위해 단체로 출동한 ‘퀵서비스 문파’의 형제들을 보는 듯하다. 그렇듯, 이 영화는 진지하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진지함이 웃음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혁수 감독의 장기인 다찌마리 액션 장면을 떼어놓고 본다면 대사 하나하나, 상황 두 개 세 개가 황당하다. 이런 장면이 있다. 성민과 승희의 이야기가 진행되던 도중, 갑자기(정말 아무런 두서가 없이) 호스트바가 나타난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처음 본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한 여자 손님이 선수(호스트바 남성 접대부를 지칭하는 말)가 마음에 안 든다며 꼬장을 부린다. 그러자 마담이 오늘 처음 온 친구라며 장발의 청년을 소개하고 이 둘은 잠자리까지 가게 된다. 둘의 욕정이 무르익고 있는 상황에(여기까지 한 5분 걸린다) 갑자기 성민이 등장한다. 다짜고짜 신참 선수를 때리기 시작하는 성민. 장면이 바뀌어 한강둔치로 예측되는 곳에서 성민은 계속 구타하며 말한다.

'달수야 임마! 사내놈이 할 짓이 없어서 고추장사를 해!? 내가 널 친동생같이 생각하는 걸 모르는 거야?'
그러자 달수는 말한다.
'형 그럼 어떻게 해! 취직도 안 되고 돈은 필요하고... 훌쩍훌쩍'
'그래도 어떻게 고추 장사를 하느냔 말이야! 나는 널 이제 안 볼 거야!'
아무 말 없는 달수. 돌아가는 성민. 그러자 달수는 성민의 뒷모습에 대고 말한다.
'형... 내가 잘못했어. 이제 고추 장사 안 할게.'
그러자 성민은 환하게 웃으며 달수에게 다가가 말한다.
'그래. 잘 생각했어.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어야지. 앞으로는 형과 함께 퀵서비스를 하는 거야! 하하하'
그리고 달수는 퀵맨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소개에 할애된 시간이 무색하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한다.

이런 장면도 재미있지만, 여주인공 승희의 사정은 감탄이 나올 정도라 소개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모델 오승희는 코리아유통의 인물들이 찾던 승희가 아니었다. 진짜 승희는 그녀의 이모부인 박 선생(레전드 박동룡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이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었던 것이다. 결국 문 변호사는 그녀를 찾아내고 한국으로 입국을 시키면서 태욱은 멘탈이 붕괴된다. 그렇다면 자신이 쫓고 있던 오승희는 누구란 말인가? 물론 이 배역은 전혜윤 배우의 1인 2역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던 관객은 이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이 영화 시작할 때 오승희를 찾기 위해 들고 있던 사진에는 얼굴에 점이 하나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모델 오승희에게는 점이 없다! 이 점을 영화 초반엔 극 중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태욱의 부하 중 하나가 “사진엔 점이 있는데 이 여자는 점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태욱은 “요즘 성형수술을 많이 해서 점 하나 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대충 넘어가는 장면이 잠깐 나오긴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처리 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아유유...’ 하는 기분이 들어 괜히 몸이 조금 오그라든다. 결국 진짜 승희가 등장하는 후반부에 가서는 지금이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내의 유혹>적 리얼리즘’이 이미 시도되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만다.(‘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공자님의 말씀. 막장의 세계에서도 이 진리는 통한다.) 그러니까 전직 모델 오승희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에 엮여 온갖 고초를 다 겪게 되었던 것이다. 불쌍한 사람. 그래도 성민이라는 듬직한 사랑을 만났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하지만 인연이란 것은 꼭 그런 고생은 안 해도 만날 수 있는 것일 텐데 여하간 불쌍하다는 생각 외에는 그녀에겐 아무런 생각이 안 드는 것이다. 닮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

이런저런 산만한 부분들이 있지만, 액션에 관해서는 절대로 웃기거나 하지 않다. 오히려 격투 씬 때문에 앞서 말한 황당함들 조차 잊을 수 있을 정도라면 조금 오바스러운 이야기일까? 특히 공장에서 펼쳐지는 내분으로 인한 코브라와 깡패들의 일대 다수 싸움, 마지막 개천에서 부사장 태욱과 성민의 결전은 왕년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시원한 다찌마리였다. 이혁수 감독님은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시고 본인의 내공을 풀어낸 연출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 ‘액션 영화’라는 말은 있지만 ‘권법’이나 ‘권격’ 이라는 말은 거의 사장된 듯 싶다. 정말, 정말 마지막 권격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퀵맨>은 그 만듦새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노감독의 작별인사로는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 더 이상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정의를 위해 세상을 등지는 쾌남의 시대는 없다. 세계는 그런 사람을 (예전에도 그렇긴 했지만 지금은 더더욱) 완전한 멍청이로 보이게 재구성되었다. 영화 속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의의 주먹은 현실에서 더욱 더 멀어져 만화 속에서 스크린으로 이주한 캐릭터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것이 된 것 같다. 나는 이혁수 감독의 <퀵맨>을 보면서 다시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고 관객들이 좋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의는 단순하고, 영웅은 원래 바보다.

PS : 영화의 주연인 윤세웅(KMDb에는 ‘윤호’로 기재)씨는 배우 ‘윤양하’ 씨의 아들이라고 한다. 영화는 많지 않은 수의 출연을 했지만 현재까지 성우로 맹활약 중이다. 

전혜윤
윤호
송금식

감독: 이혁수
각본: 윤석훈, 안진원


퀵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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