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갬블러의 파리지옥
1996년 이전까지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골칫덩이였다. 어린이날이 되면 광화문에서 <만화 화형식>이 열리고 엄마들은 <우리아이가 공부는 안하고 만화만 봐요>하며 상담을 청해오고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냐?>라고 누가 물을 때 만화책 제목을 대면 비웃음을 당했다.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의 필름은 밀짚모자의 테두리 장식으로 모두 없어져 일본에서나 필름을 찾아오고 주옥같은 만화들의 원고들은 뻔데기 장수들에게 뻔데기 포장지로 근당 얼마로 팔려갔다. 그러던 만화, 애니메이션이 하루아침에 나라에서 애지중지 하는 문화가 되었다.
1996년.. 1월 정부는 <만화산업육성발전방안> 발표한다. 3년 후 서울특별시는 국내 만화, 애니메이션을 육성하기 위해 <서울애니메이션센터>를 세운다. 뒤이어 <문화콘텐츠진흥원>도 문을 연다. 어린이날이 되면 화형 당할까봐 조마조마 했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1996년 하루아침에 대접이 바뀐 것이다. 왜일까? 문화예술로서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가치를 1996년, 드디어 인정하기 시작했던 걸까?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미래에 우리의 가치를 표현할 중요한 예술 장르라는 걸 깨달은 걸까?
아쉽지만 아니다. 1993년 <쥬라기 공원>이 개봉을 했고 1994년엔 <라이온 킹>이 개봉했다. 뉴스에서는 일제히 영화 한편의 해외 흥행 수익이 자동차 수출 몇 만대에 버금간다는 소리를 높였다. 집에서 골치만 섞이던 주워 온 자식이 알고 보니 부잣집 씨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정부는 놀랐다. 하루아침에 대접이 달라졌다. 이놈하나 잘 키우면 큰 몫 한번 챙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입에서는 군침이 돌고 머릿속에선 벌써 셈이 한참이다. 1996년 발표된 정부의 <만화산업육성방안>은 그렇게 만화 애니메이션이 <돈이 된단다.> 한마디에 숨가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라이온 킹=자동차 몇 만대.> 이게 전부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라이온 킹=현대자동차 몇 만대.> 논리가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을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의 몇몇 투자자를 만나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 논리는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을 없앤 게 아니라 거대 도박판으로 만들었다! 여전히 가동되고 있는 이 대박논리는 상인의 마음을 투기꾼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만일 한 영화에 10억 투자한다면 당연히 투자자는 이익을 기대할 것이다. 보통 상인이라면 10억을 투자했으면 한 20억쯤 벌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애니메이션에 투자하려고 하는 투자자들은 생각이 다르다. 10억을 투자해서 1000억을 벌려고 한다. 그들의 눈에 애니메이션 산업은 거대한 노름판으로 보인다. <그깟 만화영화가 자동차 몇 만대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는데....> 눈이 뒤집어 졌다.
그렇다면 그 투기꾼은 과연 확률 높은 노름을 하고 있는 걸까? 90대 중반에 투자되어 완성된 장편 애니메이션만 살펴봐도 상업 애니메이션 연출 경험이 전무한 감독들이나 내러티브 없는 단편 몇 편 연출한 감독들의 프로젝트들이 줄줄이 제작에 들어갔다 그중에는 지금 실사 영화판에서도 대규모급인 100억원의 제작비를 넘는 프로젝트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단순히 <라이온 킹=자동차 몇 만대>의 논리만 믿고 애니메이션 판에 돈을 쏟아 붓는 투자자들.. 과연 그들이 확률 높은 노름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항상 시나리오가 문제라고 쉽게 이야기하기 이전에 과연 이 작품이 정상적인 투자심리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완성된 작품의 완성도를 논하기 이전에 이 비상식적인 투자 시스템과 제작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먼저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렇게 비상식적으로 완성된 작품이 흥행에 실패한 후 갬블러들은 <한국에 애니메이션 내수시장은 없다>라고 성급하게 결론내렸다. 그리고 이제는 글로벌을 노려야 한다며 아직도 이 노름을 멈추지 않고 있다. 벌써 10년이 훨씬 지난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애니메이션 판에서 일어난 이 이상한 일에 대해 관심 갖는 이는 없었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트랜스포머가 개봉했을 때 뉴스에선 한국의 트랜스포머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또 몇 년이 지나 아바타가 나왔을 때는 한국의 아바타를 만들어야 한단다. 또 아바타의 흥행수입이 자동차 몇 십 만대를 수출한 것과 비슷하단다. (왜 항상 자동차와 비교하는지 모르겠다.)
영화 투자자들은 이제 더 이상 한탕주의의 갬블러에서 상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고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을 만들 것이다. 향긋한 촉수에 이끌려 파리지옥을 향해 가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