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의 OST
[비장의OST]기쿠지로의 여름 (기타노 다케시, 1999)
작곡가: 히사이시 조
아홉 살 마사오에게 여름방학이 찾아온다. 그러나 마사오는 즐겁지 않다. 친구들은 저마다 산으로 바다로 가족들과 떠나는데, 부모 없이 일하는 할머니와 사는 마사오에겐 함께 떠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공놀이할 친구도, 학원에 갈 급우도 없고, 심지어 선생님마저 일찍 퇴근하는 여름방학이 마사오에겐 못내 섭섭하게 느껴진다. 누군가 같이 떠날 수 없다면 혼자 가면 된다고 생각한 건 바로 그때.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빠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날아든 엄마의 택배에 적힌 주소 덕분이었다. 여름방학 숙제와 그림일기를 넣은 가방을 챙겨 든 마사오는 엄마를 찾아 먼 길을 떠난다. 하지만 곧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으니 얼마 못 가 동네 양아치들에게 돈을 빼앗기고 만다. 이를 해결해준 건 이웃집에 살던 씩씩한 아줌마. 혼자 엄마를 찾으러 가는 마사오를 걱정하던 그녀는 자신의 전직 야쿠자 백수 남편 기쿠지로를 보호자로 붙여준다. 그러나 그는 마사오의 엄마를 찾아주기는커녕, 모처럼 자신이 얻은 여름방학을 만끽하기 위해 더 열을 올린다. 경마장과 술집에서 돈과 시간을 탕진하고 마사오를 한번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대책 없는 여행길에 오르게 되는데, 윽박지르고 욕과 손부터 먼저 나오는 그의 성질 때문에 잠시도 편안할 순간이 없다. 이에 대한 뒤치다꺼리는 오롯이 어른스런 아이 마사오의 차지다. 하지만 뜨거운 여름날 길 위에서 더위를 뒤로 한 채 추억과 여정을 공유한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해간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폭력과 피의 의미를 묻는 기자들과 평론가들의 공세가 지겨워 기타노 다케시가 차기작으로 폭력이 전무한 영화를 찍겠다고 했을 때, 이를 솔직히 받아들인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와 <키즈 리턴>에 이어 필모에서 가장 잔잔하고 따뜻한 로드무비 <기쿠지로의 여름>을 8번째 작품으로 들고 나왔고, 이 영화는 제52회 칸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을 비롯해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돼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대척점의 두 사람이 같이 여행을 떠나며 성장하고 교류해간다는 이야기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지만, 이 평범한 이야기에 기타노 다케시의 색채가 덧칠돼 독자적인 매력을 갖췄다. 영화는 기존의 관습적인 문법과 틀을 거부한 채 투박하고 거칠게 붙어있지만, 특유의 만화적이고 생뚱맞은 점프와 관조적인 시선을 통해 독특한 리듬과 유머를 부여하며 천진난만하면서도 감동적인 삶의 동질성과 유대감을 포착해냈다. 물론 이전의 <그 남자 흉폭하다>나 <소나티네>, <하나비>에서 보였던 단초들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며 여전히 불완전하게 연소한 채 남아 그 근간을 살짝 비추는데, 그런 지점들이 단선적일 수 있는 영화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대오각성을 가져다준 일생일대의 획기적인 여행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에 있어 이런 방학과도 같은 휴식이 만들어준 치유와 관계의 소중함만큼은 오래 남아 두고두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여기에 그럴듯한 악센트를 남겨주는 건 (지금은 비록 깨졌지만) 기타노의 뛰어난 음악적 파트너 히사이시 조의 존재감이다.

1950년 일본 나가노에서 태어난 히사이시 조는 국립음악대학의 학생이던 시절부터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 음악에 심취했다. 본명은 ‘후지사와 마모루’지만 무대에서 쓰기 위한 예명을 위해 ‘퀸시 존스’의 일본어식 발음에서 따와 ‘히사이시 조’란 이름을 만들어냈다(퀸시의 일본어식 발음인 ‘쿠이시’를 히사이시(久石)라고 읽은 것에 존스의 애칭인 조 역시 한자어 음독(讓)을 붙여 완성했다). 졸업 후 일본 필하모니 교향악단과 뉴 사운드 인 브라스의 오케스트라 편곡을 맡는 한편 틈틈이 원더 시티란 회사를 세워 다양한 앙상블과 솔로 작업을 병행하며 독자적인 사운드를 완성해갔다. 그의 지명도가 높아지게 된 건 1983년 음반사로부터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이미지 앨범의 작곡을 제안 받았을 때부터다. 원래는 YMO출신의 호소노 하루오미가 음악을 맡기로 했지만, 작업한 곡이 영상과 어울리지 않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과감히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 히사이시 조를 선택한다.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 그가 작곡한 이미지 앨범을 듣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 후로도 콤비를 이루며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의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 <모노노케 히메>,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음악을 도맡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음악가 반열에 올라선다. 1992년에는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진 나가노 동계 패럴림픽을 위한 테마송을 작곡하며 총책임자로의 역할도 수행했고, 야마다 요지 감독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실사 영화에서 탁월한 멜로디를 선사했다. 2001년에는 직접 음악영화 <콰르텟>의 연출을 맡기도 했고, 프랑스 판타지 <엄지 동자>의 음악을 담당하며 세계로 활동반경을 넓혀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과 김종학 피디의 <태왕사신기> 그리고 중국영화 <이모의 포스터모던 라이프>와 <해양천국>, <삼장법사의 모험> 등의 음악을 작곡했다.
히사이시 조가 기타노 다케시와 다섯 번째로 작업한 <기쿠지로의 여름>은 그들의 파트너쉽 중 가장 큰 변화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전까지의 영화들이 미니멀한 색채를 짙게 품고 절제된 테마를 반복, 변주해가며 미묘한 변화를 통해 캐릭터의 심리와 극적인 전개를 다루고 있다면, 이 영화에선 아예 그런 방식을 포기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에서 나올 법한 아름다운 선율의 테마를 정면에 배치해 분위기를 일신한 것이다. 대사와 음악이 없을수록 순수한 영화에 가깝다고 생각하던 기타노 다케시였기에 <그 남자 흉폭하다>나 <3-4x 10월>같은 초기작들에선 영화음악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히사이시 조를 만나 작업하며 영상이 가진 매력을 200% 끌어올려주는 음악의 효과를 체험하고 나서 그는 점점 변해갔다. 음악을 의뢰할 때 항상 “자신의 작업이 아니다”라며 히사이시 조에게 전적으로 맡기던 기타노도 이번 <기쿠지로의 여름>만큼은 제작 전에 “피아노 위주의 부드러운 곡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주문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요구가 있었다. 히사이시 조와 첫 만남 자리에서 “영화에는 반드시 음악이 들어갈 자리가 있죠? 그런 곳의 음악은 일체 뺍시다”라고 대놓고 밝혔던 그였기에, <기쿠지로의 여름> 음악 쓰임은 거의 혁명에 가까운 수준으로 변모한 셈이다. 음악적 사용에 대한 혜안과 자유를 얻은 지금의 기타노 다케시는 더 이상 히사이시 조가 없어도 이케베 신이치로나 스즈키 케이지, 카지우라 유키, 후지카와 쇼고 등 다양한 뮤지션들과 작업을 진행할 만큼 개안했다.

로드무비답게 그리고 기타노 다케시 영화답게 음악은 에피소드보다 주로 길 위 장면에서 흘러나온다.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주된 테마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Summer’라는 곡인데, 영롱한 피아노는 도로에 갓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경쾌하고 시원한 스트링은 한 줄기 바람처럼 산들산들 영혼을 간질이며 이들의 여정에 부담 없는 미소와 흐뭇함을 안겨준다. 히사이시 조의 마력이라면 절제됐지만 명료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에 있는데, ‘Summer’는 그 효과가 가장 극대화돼 발휘된 곡이기도 하다. ‘Going Out’과 ‘Mad Summer’, ‘Angel Bell’, ‘River Side’와 ‘Summer Road’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며 영화 내내 활용되었다. 빼놓을 수 없는 트랙이라면 마사오와 기쿠지로가 어머니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흐르는 ‘Real Eyes’를 꼽을 수 있는데, 잔혹할 수도 있는 현실에 대해 서늘한 스트링으로 무겁게 짓누르는 선율이 만만치 않은 삶의 벽을 실감하게 만든다. 이런 풍부한 서정 속에 가려진 외로움과 허무함을 담아낸 감성은 이전 작품들 속에서 언뜻언뜻 등장했던 부분들과 유사하다. 하지만 쉽게 함몰되지 않는 건 평화롭고 여유로운 사운드로 이를 치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전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와 비슷하면서 다른 부분이기도 한데, 관조와 냉소의 시선이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바뀌었음을 암시한다. ‘Two Hearts’와 ‘Mother’가 그런 정서적인 분위기의 큐들이다. 그 외 영화에서 마사오가 꾸는 악몽에 등장하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Nightmare’와 또 다른 아름다운 테마 ‘Kindness’나 ‘The Rain’도 잊을 수 없는 트랙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올해 <바람이 분다>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은퇴만 벌써 5번째지만). 기타노 다케시 또한 이제 다른 작곡가들과 호흡을 맞추는데 어색하지 않다. <동경가족>과 <작은 집>을 함께 한 야마다 요지 감독은 여든을 훌쩍 넘겼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듣게 될 기회는 점차 줄어드는데 반해 그의 새로운 영화음악을 기다리게 되는 심정은 늘어만 간다.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AMPAS) 멤버로 선출되고, 2015년 완공 예정인 새로운 나가노 시민 회관의 예술 감독으로도 뽑혀 더욱 바빠질, 일본의 현존하는 최고 마에스트로 중 하나인 그의 신작을 고대해본다.
Track List
1. Summer
2. Going Out
3. Mad Summer
4. Night Mare
5. Kindness
6. The Rain
7. Real Eyes
8. Angel Bell
9. Two Hearts
10. Mother
11. River Side
12. Summer Ro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