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오타쿠의 재발견
문화를 향유하는 행위 중에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문화로 인정하지 않거나 저급하게 인식하는 엄숙한 사회에서 애니메이션 마니아는 썩 사회 친화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안여돼(안경+여드름+돼지)’라는 달갑지 않은 외모 가이드라인도 마련돼 있다. 방구석에서 미소녀와 메카닉 애니메이션을 탐닉하며 마우스를 클릭하는 것 외에 운동을 하지 않는 일부 행태를 희화화해서 일반화한 농담조다. 게다가 이들의 전문성은 어찌된 게 드러낼수록 손해다. 그러니 취미를 넘어선 해박한 지식은 자랑하지 말고 넣어두길 권한다. 우리는 이들을 흔히 ‘오타쿠’라 부른다.
오타쿠는 일반적으로 한 분야에 심취한 정도가 마니아보다 심한 사람을 일컫는 용어지만, 그 안에는 그들의 광적인 취미활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의 조롱도 덤으로 얹혀있다. 때문에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면서도 이를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거나 애니메이션은 좋아하지만 오타쿠는 아니라고 반색하는 경우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사회부적응자라는 뜻을 내포할 것만 같은 일본어 오타쿠(お宅)는 그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댁’, 그러니까 상대편을 높여 부르는 대명사다. 일본에서 동호회 회원끼리 서로를 오타쿠라 부른데서 유래해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분야에서 주로 사용돼왔다. 사실 ‘존중’의 의미가 ‘폄하’로 퇴색된 데에는 오타쿠들의 탓도 있다. 가상 세계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는 자폐성향이나 아키하바라(전자상가가 밀집한 도쿄의 한 지역으로 오타쿠들의 성지로 알려짐)를 배회하며 부모가 준 용돈으로 관련 상품을 사들이는 민폐성향의 마니아들은 애니메이션의 천국인 일본 사회에서도 암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오타쿠 덕분에 먹고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감독들조차 그들을 혼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안노 히데아키는 <에반게리온>의 세계를 비틀면서까지 그들을 각성시키려했고,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 요시유키는 오타쿠와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비꼬았으며,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정열이 없는 오타쿠는 고용할 생각이 없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대로 오타쿠의 경제적인 파급효과는 엄청나다. 일본에서의 오타쿠 시장은 무려 조(兆)단위를 웃돈 지 오래다. 이들이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큰 축을 지탱해왔다는 점은 비난하는 사람들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재밌는 건 그들을 꾸짖는 거물급 감독들 역시 대단한 오타쿠 출신이라는 것. 소비활동만으로 욕을 먹던 오타쿠의 생산적인 역할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이래저래 오타쿠라는 존재 없이 그들의 신화와도 같은 애니메이션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
문제는 이제 비난의 이유가 단순히 “오타쿠라서”가 됐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엮어 모욕을 하기 위해 오타쿠라고 부르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미 심각한 오류는 오타쿠 자체가 아닌 고정관념에 와 있다. 여기에는 드라마나 영화보다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문화로 여겨지는 애니메이션, 특히 일본 작품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심도 작용한다. 작품에 대한 토론과 지지 활동으로 문화의 동력이 되는 이들의 긍정적인 면은 평가절하되다 못해 잘못 포지셔닝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소녀물을 보면 오타쿠”라거나 “나는 오타쿠와는 차원이 다른 애니메이션 마니아”라는 식의 프레임은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다 못해 의미가 없다. 필요한 것은 격리가 아니라 오타쿠 또는 오덕후, 오덕, 덕후들의 재발견이다.
문화의 다양성은 서로 다른 취향이 공존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대중에 의해 소비되지 않는 서브컬처의 이해 없이 성숙한 문화 형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특히 다양성이 결핍되고 고유의 특색이 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 애니메이션 판에는 오타쿠와 같은 전문적인 팬덤이라도 있어야 흥이 날 판이다. 오히려 오타쿠가 문제가 아니라 소위 ‘덕질’을 하고 싶을 정도로 즐길만한 콘텐츠가 우리나라에 있는지가 걱정이다. 보고 싶고, 사고 싶어 애니메이션을 소비하는 오타쿠 문화는 차라리 자연스럽다. 적어도 자국 애니메이션이니까 재미없어도 무조건 격려하고 봐줘야 한다는 고역보다는 낫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