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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서대호 - 배급

[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서대호 - 배급 대표 이미지

1950년대 한국전쟁의 정전(停戰)과 경찰기구 인력 축소는 상이군인과 퇴역 경찰의 증가를 가져왔다. 그들 가운데 생계 방편으로 순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일부는 지역 청년의 의무이자 반공 국가 ‘국민’으로서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순업을 수행한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남 군(郡) 지역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해남군 ‘해남영화반’ 서대호가 대표적일 것이다. 1910년대 출생으로 추정되는 서대호는 식민지시기 해남군에서 전기 관련 업무에 종사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그는 해방 정국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독립청년단원으로 활동하면서 ‘G-2’의 요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해방이후 한국에 진주한 미 육군 24군단은 일반참모부(General Staff)와 육군 소속 방첩부대를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G-2는 한국 내 첩보 활동과 정보 수집 그리고 한국인 정치 지도자 사찰을 전담하면서 남한 우익 반공청년단체들과 연계하여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G-2의 활동과 참여 인력 및 신분은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서대호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작고(作故)한 서대호를 대신하여 그의 아들 서아귀(1937년생)의 구술 증언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서아귀는 부친의 순업을 도와 해남영화반의 영사 기계 정비를 담당하였고 1970년대 해남극장의 운영을 몇 년 동안 맡아보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에 참가한 서대호는 9 ․ 28 수복과 함께 북진하던 도중, 인민군에 의한 부친 사망 소식을 듣고 반공 청년들을 규합하여 귀향한다. 이후 해남군 계곡면 흑석산에 남아있던 빨치산을 대상으로 선무(宣撫) 작업을 하던 중 목과 입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게 된다. 부상으로 음식 섭취와 대화가 불편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서대호의 얼굴에 난 상흔은 해남군 행정 기관과 경찰 관료들로부터 예우를 받는 ‘애국의 증거’이자 ‘육화된 훈장’이 되었다. 상이군인에게 주어진 혜택 - 보훈처 상이군인 등록과 연금 지급 등 - 도 마다하고 입버릇처럼 ‘국가를 위해 마땅한 일’을 했다고 되뇌던 서대호는 4 · 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던 즈음, ‘청소년 시청각 교육’을 이유로 지역 학생 대상 무료 영사에 나서게 된다. 교육과 계몽을 앞세운 그의 순업은 퇴역 경찰 및 반공 활동에 참가한 청년운동 후배들이 동참했다. 광주 미공보원으로부터 리버티뉴스(liberty news)를 대여 받고 공보부의 대한뉴스와 문화영화를 챙긴 그는 일주일 또는 보름 단위로 새로운 필름으로 교환해가며 선전 활동에 나섰다. 서대호는 ‘해남영화반’이라는 이름을 걸고 조랑말 손수레에 16mm 영사기와 확성기 그리고 조명에 쓰이는 카보나이트(carbonate)를 싣고 해남군 일대를 순회하였다. 

하지만 서대호는 1960년대 초중반 흥행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꾀하게 된다. 주간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계몽영화를 상영하는 한편으로 야간에 흥행 목적의 35mm 상업 영화를 흥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 수입한 35mm 영사기와 군부대에서 사용된 지프차 엔진을 영사용 발전기로 조립하여 해남군 일대와 강진군과 영암군 일부 지역을 돌았다. 해남군 13개 면(面) 전체와 인근 군 단위 마을까지 아우르기 위해 순회 영사 차량을 세 개 조(組)로 나눴고, 각 조별 순업 인원도 아홉 명에서 열 명에 이르렀다. 당시 필름 간접 배급 체계에 따라 도시 이후 군 단위 상설극장, 마지막으로 순업 차례로 필름이 배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해남영화반은 순회 지역도 넓고 흥행 성적도 좋았던 까닭에 광주의 배급사로부터 신망이 두터웠고, 따라서 군(郡) 지역 상설극장과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순업이 영화를 상영하려면 해당 지역 경찰서에 집회 허가와 면사무소에 상영 신고를 하고, 이들 각 기관에 영화 대본을 제시해야 했다. 서대호의 경우, 반공 활동 이력이 확실한데다 지역에서 ‘원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절차가 형식적인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 후반 해남극장을 사들인 서대호는 상설극장을 운영하면서도 해남읍내 인근 마을에서 해남극장과 시차를 둔 ‘동시 상영’ 형식의 순업을 계속했다. 극장으로 올 수 없는 지역민에 대한 배려이자 여전히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백 TV 보급이 확산되고 1980년대 칼라 TV가 등장하자 관객 수는 급감하기 시작하여 결국 해남극장을 팔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부친을 ‘말로(末路)가 좋지 않았던’ ‘외골수’로 단언하는 서아귀와 달리, 광주전남 지역 필름 배급사가 증언하는 서대호는 지역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흥행사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 글: 위경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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