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삐용B무비
[삐용삐용B무비]랏슈
이봉원, 1989
영화 동아리 시절. 매일 밤 음주 70% 저질농담 20% 영화 얘기 10%의 함량으로 지새며 아침 해를 맞이하던 때였다. 당시 나와는 꽤 학번차이가 많이 났던 선배가 ‘너 이런 영화 아냐?’라며 한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영화판에서 10년이나 연출부 생활을 하던 두 사내가, 인생 역전을 꿈꾸며 현금수송차량을 탈취한다는 내용이었다. 케이퍼 무비라는 장르에 나름대로 재미를 느껴왔던 바이고, 또 한국에 그런 장르 영화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때였기 때문에 <랏슈>라는 좀 이상한 제목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 선배는 넌 평생 볼 일 없는 영화라며 마치 전설 속의 무엇처럼 말했지만, 섭섭한 소리. 영상자료원에 비디오테이프가 있다.

영화는 고층 빌딩에서 추락하는 여자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아마도 명동으로 생각되는 곳.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에 한 여인의 몸이 추락한다. 땅에 부딪히는 순간 감독의 ‘컷!’ 소리가 들리며 그것이 마네킹임을 알게 된다. 연출부로 일하고 있는 택호(송승환)와 촬영부인 영준(최영준)은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영화인이다. 하지만 십 년째 이러고 있는 본인들의 처지가 불쌍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택호는 영준에게 이렇게 살 수는 없다며 죽여주는 계획을 풀어 놓는다. 그것은 가짜 영화 제작사를 차리고, 실제 현금수송차량이 지나가는 시간, 장소에서 영화를 찍는 것처럼 위장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배우들에게 차량 탈취를 시키는 것이다. <서울 루팡>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가짜 영화 계획은 탈 없이 성공한 듯 보였다. 그들은 탈취한 차량의 돈을 서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의 어느 산속에 묻어놓고 1년 후에 찾기로 했으나, 돈은 사라지고 처음 보는 사람의 시체가 누워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때부터 돈의 행방을 찾기 위해 온갖 곳을 수소문하는 택호와 영준. 알고 보니 택호는 단골술집 마담인 혜란의 술수에 걸려들어 이용당한 것이었고 혜란 역시 영화 제작사의 사장인 황사장(박용식)의 사주를 받은 것이었는데.
영화의 초반은 상당히 재미있다. 십 년째 영화판을 전전하지만 늘 구박 덩어리에 언제 감독 입봉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현실을 한탄하며 가진 돈도 없어 깡소주를 까거나 단골 술집에 가 남은 술을 요구하는 택호와 영준(이 부분은 2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한다.)이 가짜 영화 촬영을 하며 현금수송차량을 탈취하는 부분까지는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을 만큼 썩 괜찮은 연출을 보여준다. 늘어지지 않는 진행과 필요한 부분을 적절히 보여주며 흥겹게 도둑질의 과정을 그린다. (개그맨 백재현이 앳된 모습으로 등장해 반가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돈의 행방을 찾는 모험은 허탈할 만큼 아쉽다. 훔친 돈이 없어졌다. 그렇다면 관객으로서 기대하게 되는 것은 이들의 탐정 같은 활약일 테다. 그러나 택호와 영준은 굳이 그러지 않는다. “아 어떡하지.” “어쩐담.” 을 연발하며 불쌍한 얼굴을 하고 수소문 한다. 원래도 불쌍한 얼굴인데 더 불쌍하게 영준은 여장을 한다.(말투도 여자 말투 흉내를 낸다.) 수배 전단이 뿌려져 정체를 감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둑질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도둑들>이 그렇고 <리얼 맥코이>가 그렇듯이 멋있어야 한다. 그것은 장르의 법칙이다. 그러나 택호와 영준은 지질하기만 하다. 그렇게 돈을 찾아 헤매던 중간 중간 영준은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자수하자며 잉잉 울고, 택호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럴 수는 없다고 달래고. 이 안쓰러운 기분.

택호와 빨간 원피스를 입은 영준
그러니까, 시작은 현금 탈취인데, 진행될수록 휴먼드라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쯤 되면 끝까지 영화를 보게 만드는 원동력은 ‘돈을 찾는다’가 아니라 ‘이 불쌍한 두 영혼이 결국 어떻게 될까’ 가 되어 버린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게 되면 돈의 행방은 궁금하지도 않다. 얘네가 이 곤경을 어찌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가 관건이 되어 버린다. 그래도 80년대 한국 영화이니 잘 끝나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게 되면...
거 참 예상 밖의 엔딩이 우리를 기다린다. 모든 범죄를 지휘한 황사장을 찾아낸 택호와 영준은 그를 잡기 위해 뛰어다닌다. 마찬가지로 최종 보스의 체통 따위는 내다버린 황사장도 뛴다. 마치 통과 제리처럼 건물 안에서 서로를 쫓고 쫓기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참 안됐다는 생각 이상 어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갑자기 엘리베이터를 탄 황사장이 머리를 벗는다. 가발이었던 것이다!(고 박용식씨가 앞서 머리가 있는 모습으로 출연하고 있어 아, 그때는 두발이 있으셨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장면의 충격은 꽤 크다. 물론 너무 뜬금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고서는 황사장은 포위된 경찰과 구경꾼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니 이 영화는 범인이 잡히지 않는 영화의 몇 안 되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갖다 붙이자면 <살인의 추억>의 선배쯤이라고나 할까. 사라지는 황사장 뒤로 경찰에게 체포된 택호와 영준의 억울한 외침이 들리지만 영화는 그렇게 끝나고 만다.
생각해보면, 장르 영화라고 시작은 했지만 결국 뛰어도 날아도 제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처지를 표현한 영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결국 택호와 영준은 그럴만한 깜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혜란이 전달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어찌어찌 일은 해내지만 결국 누군가의 손 안에서 놀아난 장기말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봉원 감독은 전작 <내일은 뭐 할거니>를 통해 담담한 일상 속에 현실 풍자를 녹여내 당시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스타일을 선보였지만, 검열 당국의 폭력 속에 많은 부분 삭제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그의 경험이 <랏슈>를 조금 애매한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진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쉬운 일이다.
<랏슈>는 ‘RUSH’를 발음한 것이다. 옛날 신문에도 ‘러시아워’를 ‘랏슈아워’로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러시 필름’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였다. 영화판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설정된 제목일 테다. 장르 영화 제작이 원활하지 않았던 1989년에 제작된 영화라는 점에서 꽤 모험이었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케이퍼 무비’라는 장르는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이어서 <랏슈>의 소재선택은 나름대로 과감한 면이 있다. 꽤 섭섭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지만 매력적인 소재와 괜찮은 연출의 초반부를 생각하면 아쉬운 생각이 든다. 얼마 전 개인 블로그에 이 영화에 대한 글을 간단히 올렸더니, 이봉원 감독 본인이 찾아와 ‘6공 시절에 영화 만들기가 너무 힘들었다. 개인적으로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 라는 댓글을 남겨주셨다. 이해가 간다. 전작 <내일은 뭐 할거니>를 제작하면서도 검열 삭제를 통해 큰 상처를 입은 뒤였다. 당시 많은 영화들이 진부한 가치관을 보여주며 제자리걸음을 할 때, 나름대로의 야심으로 색다른 영화를 들고 나왔지만 흥행에도 실패 하고 말았다. 영화 중반을 넘어가면서 갈 길 모르고 한숨 쉬며 방황하듯 돈의 행방을 찾는 택호와 영준처럼, 이봉원 감독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많은 제한들 속에서 어쨌든 영화 한 편 만들겠다는 의지만 남았을 것이다. 범인이 잡히지 않고 도심 속으로 사라지고, 피해자인 택호와 영준이 황사장이 저기 간다며 고래고래 악을 쓰지만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경찰의 모습은 이봉원 감독의 작은 반항은 아니었을지. <랏슈> 이후 이봉원 감독의 연출작은 확인되지 않는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송승환
최영준
감독: 이봉원
각본: 이봉원
개봉극장: 허리우드(서울)
관람인원: 3,424(서울)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