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삐용삐용B무비]버려진 청춘

정소영, 1982

[삐용삐용B무비]버려진 청춘 대표 이미지

얼마 전 한참 선배인 모 영화감독, 영화평론가와 대화를 나누다 자정이 훌쩍 넘었고 다들 남자다 보니 화제는 자연스레(?) 에로영화로 넘어갔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볼 때 그 두 사람의 영화 취향은 확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미지의 여배우에 대한 애정의 크기만큼은 완벽히 일치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타르코프스키의 <첩혈쌍웅>’같은 경이로운 조합이었다면 황당한 비유일까. 에로영화에 대해 나름 남부럽지 않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해왔음에도, “예상치도 않은 장면에서 훌러덩훌러덩 벗어서 충격적이었다”라거나 “그녀보다 뛰어난 에로배우는 많았지만 그녀만큼 몸이 예쁜 여배우는 없었던 것 같아”라는 그들의 원색적인 찬사 앞에 나의 무지를 탓해야만 했다. 그들이 여자 일행이 떠나길 기다려 한사코 자정이 넘어서야 애정을 고백했던 여배우는 바로 이기선이었다.
 
<깊은 밤 갑자기>의 이기선, '몸이 참 예쁘구나'
<깊은 밤 갑자기>의 이기선, '몸이 참 예쁘구나'

아마도 영상자료원을 즐겨 찾는 이라면, 필름으로도 몇 번 상영했을뿐더러 VOD 관람도 가능한 고영남 감독의 컬트 호러 <깊은 밤 갑자기>(1981)를 기억할 것이다. 바로 거기서 무당의 딸이자 가정부로 등장해 윤일봉, 김영애 가족을 파국으로 몰고 갔던 여자가 바로 이기선이다. 여기서도 김영애는 이기선의 몸을 씻겨 주며 “몸이 참 예쁘구나”라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이듬해 출연한 정소영 감독의 <버려진 청춘>(1982)에서 이기선은 그 빛나는 ‘야성’을 더욱 드러낸다. 이른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라 불리던 이 시기 수많은 성인영화들 중에서 이처럼 ‘센’ 여자 캐릭터가 있었나 싶다. 영화가 시작하면, 배드민턴을 하는 남자들과 부딪혀 넘어진 그녀가 대뜸 “이 새끼들, 눈은 어디다 뒀어. 별 거지 같은 놈들 다 보겠네. 앞으로 조심해”라며 성깔을 표출한다. 그리고는 호텔 카운터에서 다짜고짜 마당에 주차돼 있는 빨간 피아트 자동차의 주인이 바로 자신의 오빠라고 거짓말하며 그의 방까지 급습한다. 우여곡절 끝에 방 주인을 만난 그녀는 빨간 비키니를 입은 채 대놓고 유혹한다. 성질 급한 남자를 향해 “왜 이리 급해, 도련님”이라며 저지하더니 샤워실까지 따라 들어온 것만은 못 이기는 척 어쩌지 못한다. 남자가 온몸에 비누칠을 한 이기선을 마구 껴안자, ‘이 새끼 걸려들었군’ 하는 나른한 표정으로 허리춤에 도도하게 손을 올리고는 말한다. “거칠게 다루지마, 숙녀야.”
 
이 새끼, 걸려들었군
이 새끼, 걸려들었군

그러니까 이기선이 연기하는 ‘명자’는 바로 ‘꽃뱀’이다. 며칠 뒤 서울에 올라온 명자는 한 대궐 같은 부잣집으로 쳐들어가고, 문지기가 막아서자 당차게 외친다. 오는 말이 곱지 않으니 가는 말이 고울 리 없다. 아니, 명자는 오는 말이 고와도 가는 말이 더러운 여자다. “별 거지 깡깽이 같은 소리 다 들어보겠네, 비켜! 나 양회장 만나러 왔어. 양회장 아들한테 강간당한 사람이다, 왜?!!!” 집으로 들어가서도 그 기백은 여전하다. 대뜸 스타킹을 내리고 웃통을 벗어서 강간당한, 아니 자해 공갈 상처를 보여주며 5백만 원을 요구한다. 증거가 없다며 디스카운트를 요구하는 양회장과 비서실장에게 “양가집 규수가 아니면 정조도 없냐? 그럼 재판을 하자!”며 떼를 쓴다. 결국 명자는 가공할 ‘강짜’ 앞에 5백만 원을 약속한 양회장의 민머리에 뽀뽀를 하고는 유유히 사라진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집을 나와 자신을 미행하는 비서실장을 따돌리기 위해 명자는 낯선 빌딩의 화장실로 숨어들어가고, 정체를 숨기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고는 얼굴에 큰 점을 찍는다. 너무나 티 나는 변장에 어이가 없지만, TV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 점찍고 나타난 장서희의 원조쯤 된다고 생각하면, 등잔 밑이 어두워도 너무 어두운 비서실장의 답답한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버려진 청춘

<버려진 청춘>은 김기영 감독 <하녀>(1960)의 B급 신파 버전 혹은 줄리아 로버츠 주연 <귀여운 여인>(1990)의 하드코어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후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만난 양회장의 아들을 따돌리다가 격투 끝에(진짜 제대로 된 남녀의 격투다) 달아난 명자는 한사장(남궁원)의 벤츠에 숨어서 달아나게 되는데, 바로 이때부터 두 사람의 나이 차를 초월한 <귀여운 여인>스러운 달콤한 멜로드라마가 펼쳐진다. “홀아비에 부자인 남자 없어요? 집도 있고 자가용도 많은데 인생이 재미없어 하품만 하는 늙은 남자 없냐구요”라며 애초에 진심 어린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던 명자지만, 아내와 아들이 7년 전에 비행기 사고로 죽으면서 홀로 된 한사장의 딱한 사연에 공감하게 된 것. 더구나 그 사고 이후 여자를 안을 수 없게 됐다는 한사장의 가슴 아픈 고백을 들은 명자의 반응이 걸작이다. “그럼 아저씨가 병신이란 말이에요? 아저씨는 내가 한 푼도 안 받고 고쳐줄게요.” 이후 한사장은 콘 아이스크림이 묻은 명자의 입술을 보면서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기력을 회복한다. 들판에서 말을 타다 말고 느닷없는 키스신이 이어지며 두 사람은 드디어 한몸이 된다. “오늘부터 아저씨는 환자고 나는 의사에요. 자신 있어요”라며 명자의 성격만큼이나 급하게 진행되는 ‘진도’앞에 두 눈이 즐겁다. 집에 돌아와서도 두 사람은 한 욕조에 있다. “불행한 과거는 싹 잊어버리는 거예요. 알았죠?”라는 명자의 애교 섞인 ‘치료’앞에 한사장은 잊고 지낸 감각을 되찾는다. 몽환적인 표정으로 다음과 같은 낮은 탄식과 함께. “아 간지럽다...”
 
경마장에서 기력 회복하시는 한사장님
경마장에서 기력 회복하시는 한사장님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명자가 뇌종양에 걸려 5, 6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 앞에 와르르 무너진다. 이때 길게 이어지는 명자의 플래시백이 가슴을 후벼 판다. 고향에서 보따리 하나 들고 도망친 명자는 서울의 공장과 술집을 오가며 범죄소굴에 빠져 소매치기까지 하고 살았다. 딱 천만 원만 있으면 술과 노름에 빠진 깡패 같은 아버지 밑에서 신음하는 엄마와 어린 두 남동생을 데리고 나와 시범아파트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현재로 돌아와 명자는 오랜만에 고향 집에 돈을 들고 찾아가는데, 남동생은 “몸 팔아 번 돈은 필요 없다”며 누나를 반기지 않는다. 그렇게 누나의 가슴에 못을 박은 놈이 나중에는 울며 떠나는 누나의 버스를 쫓아 미안하다고 뛰어가니 이 불쌍한 가족을 어찌할꼬. 그게 다 이 나라 개발독재 근대화의 산물일 텐데 우리 가여운 명자가 ‘내가 더러운 짓을 많이 해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 자책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버려진 청춘>은 바로 김수현 작가가 부지런히 시나리오를 써내던 시절의 작품이다. 또한 이기선의 마지막 영화이기도 하다. 1962년생 이기선은 1979년 TBC 공채 탤런트로 연예계에 첫발을 디뎌 아쉽게도 데뷔작 <야성의 처녀>(1980) 이후 <깊은 밤 갑자기>와 <버려진 청춘> 그렇게 단 세 편의 영화만 남겼다. 이후 본업인 탤런트에 집중하며 MBC <조선왕조 5백 년>의 세 번째 이야기 <설중매>의 ‘폐비 윤씨’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쩌면 데뷔 초기 혹독한 성인영화들에 지쳐 이후 TV 탤런트에 집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돌이켜 보니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신인배우에게 <깊은 밤 갑자기>와 <버려진 청춘>은 실로 감당하기 버거운 영화였을 것 같다. 그러니 그녀가 더 대단해 보일 수밖에...

이기선
남궁원

감독: 정소영
각본: 김수현

개봉극장: 중앙
관람인원: 26,847(서울)명

버려진 청춘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