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종로의 기적, 마법같은 GV
최종 편집이 끝나면 영화 제작도 끝인 줄 알았다. 극장용 상영본을 출력하며 해방감에 도취되어 대단원의 막을 축하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개봉을 했어도 영화는 도통 끝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새로워지고 있다. 관객과의 교감을 통해 영화는 스스로의 의미를 재구성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관객과의 대화(Guest Visit) 덕분이다. 혹자는 그저 영화 흥행을 위한 마케팅 전략이나 관객 서비스 정도로 생각할 지 모르겠다. 아니면 영화에서 하지 못한 가쉽과 뒷이야기로 시간을 때우거나, 멋진 주인공과의 팬미팅 정도로 폄하할 것이다. 하지만 직접 해보니, 남다르더라. 특히 <종로의 기적>과 같은 다큐멘터리에게 GV는 마치 예측불허의 마법처럼 놀라운 순간의 연속이었다. 소소한 궁금증을 털어놓는 GV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다큐멘터리가 주장하는 사회적 이슈를 토론하는 장이 되었고, 관객과의 교감을 통해 얻은 피드백은 새로운 쟁점과 의제를 설정하는 반성의 계기가 되었다. 다큐멘터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큐멘터리를 뛰어넘는 자리로서의 GV. 어느덧 <종로의 기적>의 관객과의 대화는 관객과의 거리감을 좁히는 행사이면서도 새로운 창작의 시간이 되었다. 동시에 내게 있어서 GV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마음가짐과 전망을 가다듬는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사실 게이 커밍아웃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은 개봉 과정에서 GV를 적극적인 ‘캠페인’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스크린에 재현된 동성애자의 삶을 감상하는 것에서 벗어나 주인공과 직접 만나 교감할 수 있다면 다큐가 의도했던 ‘커밍아웃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상영회에서 객석을 향해 농담처럼 “게이 처음 보신 분 계세요?”라는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져보았는데, 예상외로 많은 관객들이 동성애자를 처음 본다며 수줍게 고백하기도 했다. 성소수자를 향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대부분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있어 만남과 대화는 중요한 전략이었다.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 대해 ‘살갑게’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무지는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GV를 통해 성소수자들과 만나고, 뒷풀이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서로의 삶에 공감하면서 관객과 주인공은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재현’된 주인공들과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만난 ‘실재’의 존재감이 큰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관객과의 대화는 <종로의 기적>을 통해 누군가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랐던 우리의 기획의도가 실현되는 순간을 선사하기도 했다. <종로의 기적>으로 커밍아웃한 출연진들처럼 영화를 본 성소수자 관객들이 GV 시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며 감상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당당함 덕분이었겠지만, 무대 위에서 관객들의 커밍아웃을 보며 나와 주인공들은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 내게 힘을 주었던 관객 역시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종로의 기적>에는 HIV/AIDS 감염인의 인권에 관한 이슈가 매우 중요한 비중으로 담겨져 있다. 비록 다큐의 감독이지만 나 역시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동성애자와 HIV/AIDS라는 예민하고 부담스러운 주제가 관객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을까. 혹시 이 영화를 본 감염인 당사자들은 불쾌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을까. 여느 때와 같이 관객과의 대화를 마치고 한 관객이 조용히 내게 다가와 수줍게, 하지만 밝은 얼굴로 말을 건네왔다. 자신은 HIV/AIDS 감염인이라고. 다큐멘터리 덕분에 큰 위안과 힘을 얻고 간다고.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 영화에 담아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스스로 감염인임을 커밍아웃하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나는 그 큰 용기 앞에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울컥, 명치가 뻐근해져왔다. 무인도에서 아무 반응이 없음에도 꾸준히 SOS 신호를 보내는 조난자처럼, HIV/AIDS 감염인의 삶을 담은 에피소드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노심초사 기다려왔었다. <종로의 기적>의 메시지에 힘을 얻을 수 있는 관객이 어딘가에 꼭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HIV/AIDS 이슈를 영화에 담기로 강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이렇게 관객과 만나게 되었다. 감사함을 표하는 관객의 미소에 눈매가 뜨거워진 나는, 눈물을 감추려 그 관객을 꼭 끌어안았다.
이 원고를 마무리하는 오늘, <종로의 기적>이 개봉한 지 2개월째 되는 날이다. 전국 방방곡곡 다니며 강행했던 관객과의 대화는 어느덧 38회차에 이르렀다.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행복했다. 감정적으로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관객과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기적처럼 찾아온 성소수자 관객들의 커밍아웃도 보지 못했겠지. 그 누구보다 용기내어 다큐멘터리에 출연했지만 조금은 부끄럽고 두려워했던 주인공들이 자신감 넘치는 ‘국가 대표 게이’로 변신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첫 연출작을 만들며 내 스스로 갇혀 있었던 엄숙주의에 대한 반성도 더뎠을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가 만든 이 다큐멘터리가 누군가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가슴 벅찬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서히 종영을 준비하는 시점에 접어들고,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하는 관객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대화의 순간, 내 눈과 관객의 눈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화학반응이 주는 쾌감은 여전하니까. 그러니 오늘도 기꺼이, 39번째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극장으로 나설 준비를 해야겠다. 오늘은 좀 더 이쁜 옷을 입고 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