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아스팔트의 상처와 사랑
‘독립영화’를 키워드로 다시 칼럼을 써보고자 했으나, 머릿속이 이상하리만치 공허하다. 텅텅 비어 회오리바람이라도 불 지경이다. 마치 머리를 도둑맞은 느낌이랄까? 그렇다면 주어가 목적어를 결정하게 하고 그 목적어가 다시 서술어를 결정하게끔 하면서 그렇게 자유연상에 의지하여 글을 한번 써보자.
예전엔 시나리오도 그런 식으로 써본 적이 있다. 다양한 장면들을 생각나는 대로 잔뜩 써놓은 후, 그 장면들의 순서만을 편집하여 하나의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것. 당연히 알 수 없는 줄거리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이런 적도 있었다. 시나리오에서 출발하여 영화가 완성되듯 영화의 제작 과정은 보통 문자가 영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데 난 그것을 거꾸로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무작위로 아무거나 촬영하여 그것으로 아무 영상이나 만들고 난 후, 그것을 다시 문자로 바꾸어 보았다. 내가 만들었던 영화(?)들에 자막이 많은 이유에는 아마 그런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영화제작에, 정확히 말하면 카메라로 뭐 좀 찍은 후 한번 편집해 보는 것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6여년이 지난 요즘, 영화라는 것을 다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며칠 전엔 나의 자전거가 머리를 도둑맞았다. 불특정다수를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오류까지 감수하면서 자전거를 꽁꽁 묶어두었는데 밤사이 누군가가 안장만 날름 빼내간 것이다. 요즘 거의 나의 발 역할을 담당했던 자전거가 마치 효수라도 당한 것처럼 서 있었다. 덕분에 가까운 거리는 이제 걸어 다니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의외의 발견을 가져다주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는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아스팔트 거리의 상처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상처라는 것이 각도를 달리 해서 보니 하트모양으로 보이는 것이다. 요사이 비가 온 후 다시 가보니 그 하트모양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하트모양을 한 상처라니!
지금의 글처럼 자유연상에 생각을 맡겼더니 하트모양의 사랑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물론 난 아직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색하고 낯설다. 그런데 아스팔트 길거리도 자신의 상처를 하트모양으로 안고 있는데, 이참에 나도 ‘사랑’이란 단어로 공허해진 머릿속을 한번 채워보기로 한다. 이제 나는 설렁탕 위에 얹힌 잘게 썰린 대파 조각에서도, 방 안에서 끊여 먹는 라면의 건더기 스프에서도 하트모양을 발견할 것이다.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는 노래가사도 있었지만, 그 아스팔트의 상처 덕분에 난 ‘사랑’이란 단어를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머리 잘린 자전거 덕분에 거리를 걷게 되고, 그러다 만난 거리의 상처 때문에 사랑을 환기하게 된 것이다.
“독립영화를 하려거든 몸에 부적을 지녀야 해!” 가끔 술자리에서 하던 농담이다. 이제 그 맥락을 달리해서 독립영화인들에게, 하트모양으로 변태한 거리의 상처처럼, 그래서 상처를 부적처럼 지니게 된 그 거리처럼, 저 마다의 상처가 하트가 되고, 그렇게 사랑이란 것이 각자의 부적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