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내 친구 데니스
금요일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다. 그는 캐리어를 끌고 전철의 맨 마지막 칸으로 들어서는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미는 새까만 정장 차림의 덩치 큰 아저씨다. 순간 내 눈엔 땀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훤한 이마 위로 네온사인처럼 떠오르는 낯익은 이름 석 자가 보이지만, 그는 내 손을 붙잡더니, ''정말 미안한데 너 이름이 뭐지?''라고 한다.
-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농담이고, 백승빈. 그러자 친구는 시익 하고 웃는데 순간 옛날의 그 익살맞은 얼굴과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오버랩 되면서 소름이 쫙 돋는다. 반면에 스물넷에 결혼해서 지금은 세 아이의 아빠에 큰 아이가 초등학생이라는 얘긴 딱히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난 ''웃기시네!'' 라면서 그의 툭 튀어나온 배를 거의 칠 뻔 한다.
그는 예전에도 지금의 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머니들이 보시면, ‘그 친구 참 듬직하니 보기 좋네.’ 라고 입을 모을 법한 푸근한 덩치와 붓다 같이 속을 알 수 없는 관조적인 인상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머금은, 커다랗고 고상한 석조건물 같은 아이였다. 복장 검사 때 바리깡에 앞머리를 밀려 빡구가 되어도, 월별 모의고사 성적표에 빨간 그래프가 땅바닥에 꽂혀도, 야자 시간에 짤짤이 하다가 걸려서 싸대기를 쳐맞더라도, 그의 얼굴은 여전하고 고요한 미소를 잃는 법이 없었다. 어떠한 자극도 그의 잔잔한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골프 용품 관련 회사에서 일한지 거의 십년이 다 되어간다는 그는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마치 엊그제 옥상에서 유에프오를 봤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해하며 듣는다. 그러자 스마트폰을 꺼내 내가 만든 영화의 제목을 또박또박 메모하더니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볼 수 있냐고 묻는데 뭔가 수줍은 나는 더듬더듬 얼버무린다.
성공하면 골프 한번 쳐야지? 명함 속 영어이름이 ‘데니스’인 그가 내게 소맥 한잔을 함께 말아서 건네는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고는 시익, 웃는다. 그 난데없는 술 한 잔에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 드는 나는, 언젠가 내가 골프를 치게 된다면 반드시 너를 통해서 치겠노라는 식으로 주정한다. 귀엽게.
- 두류역에서 내리지?
이제 나는 그의 스마트폰에 내 전화번호를 찍어주고, 내 이름 한 번 더 또박또박 말해준다. 세르게이... 아니고, 백승빈. 나는 그제서야 잘 가, 하며 그의 툭 튀어나온 배를 톡 하고 치는 미션을 완수하고, 작정하고 집 나온 사람의 짐 같은 캐리어를 질질 끌면서 열차에서 내린다. 내 등 뒤로 한참 머무는 그의 눈길이 느껴지는 나는 열차의 창문 너머를 한 번 더 돌아본다. 거인의 것처럼 우람하게 크고 두꺼운 손바닥을 들어 보이는 데니스가 거기에서 웃고 있다. 그러자 다시 십년도 훨씬 전에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러면서 내가 왜 데니스의 석가모니 미소를 좋아했는지에 대한 어렴풋한 이유를 짐작해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반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외롭고 수줍은 이 아이는 무법자들의 전쟁 같은 점심시간에 몰래 학교정원 한 구석, 울창한 이파리의 나무 밑으로 피신해 와서 혼자 삼각김밥을 먹으며 배를 채우고 있다. 때 마침 옆에 와서 앉는, 거인의 손을 가진 덩치 큰 친구. 삼단 찬합으로 된 자기 도시락을 하나씩 풀면서 묻는다.
- 유부초밥 많은데 같이 먹을래?
여기서는 그 친구도 학교아이들의 먹이사슬 피라미드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볼 수 없는 언더그라운드 캐릭터지만, 함부로 얕잡아 볼 수 없는 덩치로 인해 왕따의 과녁을 간신히 피해간 케이스일 것이다.
- 니가 만든 거야?
외롭고 수줍은 이 아이는 왠지 바보 같지만, 필요한 질문을 한다.
- 응, 간단해, 어렵지 않다.
그때부터 외롭고 수줍은 아이는 친구의 얼굴에 새겨진 문신 같았던, 고요하고 여유로운 미소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다. 그러니까 뭘 물어도, 괜찮다. 그건 간단하고 어렵지 않다고 대답할 것 같은 스마일. 바리깡에 밀린 앞머리 탓에 빡구처럼 보여도, 모의고사에서 전교 사백 오십등을 하더라도, 싸대기를 맞아서 울긋불긋 돌아가는 색깔의 얼굴 위로 늘 괜찮다고 웃는 내 친구 데니스.
물론 여기서 삼각김밥을 가슴에 품고 교실에서 도망나온 왕따아이와 그 옆에 삼단찬합 도시락을 놓고 앉아 유부초밥을 나눠먹은 덩치 큰 친구 간의 에피소드가 실제로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현재 골프 용품 관련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삼십대 중반의 아저씨인 데니스란 내 친구가, 과거에나 지금에나 복잡한 고민을 사서 하면서 얼마 전엔 대상포진 같은 몹쓸 병에나 걸려 멘붕했던 내게, ‘괜찮아.’ 라며 톡 튀어나온 배 한 번 툭 치고 또 먼저 미래로 휘익, 갔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예시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이야기의 요지는, 누군가에겐 그토록 쉬워 보였던 영화 만들기 놀이가 내겐 전혀 그렇지 않아서 지치고 화딱지 났던 최근, 본가에 내려와 있으면서, 지난해 명절 귀향길에 만났던 데니스가 갑자기 생각나 그의 명함을 찾아봤지만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는 것 정도? 근처에 있으면 소맥이나 한잔 해, 문자하려고 분명히 지갑에 넣어두었는데... 머리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다보니 내가 그를 정말 만나긴 만났던 것일까에 생각이 미치기 시작하면서 이 이야기는 요즘 나를 가장 사로잡고 있는 유령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그가 유령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이렇게 나는 붓다 미소를 가득 지은 채 데니스에게 정말 의외로 간단하고 어렵지 않은 땡큐 노트를 쓴다. 영화작업도 그런 식으로 해야 필모도 ‘열심히 살았구나’식으로 길어질테고,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나는 학교 동창의 유령들도 지금보다는 더 반갑게 만날 수 있을텐데 말이지.